교환학생이 끝나고 각자 나라로 돌아가는 날, 공항에서 하루카는 끝내 눈물을 보였다. 그녀의 눈물을 보니 아호도 마음 한편이 저려왔다. 하지만 마지막 모습만큼은 밝고 희망차게, 좋은 기억으로만 남기고 싶었다. 아호는 평소보다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높이 흔들고 인사를 건넸다.
"좀 있다 다시 만나자!"
마치 내일 당장이라도 다시 볼 수 있을 것처럼 목소리 속 확신에 찬 희망을 담으려 했다.
이 날 이후, 우리에게 '공항'은 만남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을 동시에 품은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다.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 장거리 연애. 아자아자!
“죄송합니다. 티켓팅 마감됐습니다.”
“예? 출발까지 20분 남았는데요?”
텅 빈 공항.
창밖에는 아호가 타야 할 비행기가 비웃기라도 하는 듯 서 있다. 아호도 멍한 표정을 한 채 함께 서있었다. 하루카에게 문자메시지가 왔다.
"오빠, 나 도착했어."
아무 답장을 보낼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서있을 뿐이었다.
이 모든 사건의 전말은 모두 아호에서 비롯되었다.
장거리 연애를 시작한 지 벌써 1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 날은 부산에서 일본 오사카로 가는 날이었다.
장거리 연애를 하며 평균적으로 1년에 3-4번 정도 만났는데, 한국과 일본을 번갈아 가며 만났다.
일본 도쿄, 오사카, 나고야, 후쿠오카, 삿포로 등 여러 도시에서 만났고,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둘 다 대학생이었기에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것을 고려해 주로 비수기 평일 저가 항공을 이용했다. 언제나 비수기 부산 국제 공항은 한가했다. 줄 설 일도 없고, 대기할 일도 없었다.
이런 여행 경험이 쌓여서였을까. 아호는 오늘도 공항이 한산할 것을 확신했다. 벌써 수십 번 일본행 비행기를 탑승한 경험과 공항과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는 지리적 위치까지 더해져 아호는 어느새 국제선 비행기를 동네 버스처럼 여기고 있었다.
바로 이 자만이 화가 되어 돌아왔다. 이 날은 무슨 배짱이었는지 비행기 출발 1시간 전에 집을 나서서 20분 전에 공항에 도착하겠다는 어이없는 계획을 세웠다. 지하철을 이용하니까 교통체증으로 지연될 일은 없었고, 비수기 평일 공항은 사람도 없느니 짐 체크와 수속도 항상 10분 안에 끝났다. 이런 경험 데이터들이 쌓이다 보니 완전히 잊고 있었다. 왜 모든 항공사가 출발 2시간 전 공항 도착을 권하는지.
아호의 예상은 모두 맞아떨어졌다. 지하철은 제시간 공항에 도착했고, 공항은 한산한 풍경이었다. 티켓팅을 하기 위해 공항 직원의 말을 듣기 전까지 스스로 완벽한 계획이었다고 자부했다.
"티켓팅 마감되었습니다. ”
울부짖으며 바지끄랭이라도 잡을 기세로 매달려 사정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티켓 시스템상 마감 된거라 자기들도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되돌이표 같은 말만 돌아왔다. 아호는 한적한 공항에 덩그러니 멍하게 서있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마침 그때 하루카에게 연락이 왔다.
"오빠, 나 도착했어."
하루카는 아호를 만나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4시간에 걸쳐 운전해서 오사카공항에 도착한 상태였다. 비행기 출발 한 시간 전까지 시시덕거리며 배 긁으며 TV 보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니 대역죄인이 된 것 같았다. 이대로 있을 수 없었다. 부랴부랴 안내데스크로 향했다.
"가장 빨리 가는 오사카행 티켓 주세요."
현재 아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현장 발권을 했다. 다행히 그날 출발하는 비행기가 아직 있었다. 4시간 뒤 출발. 그것도 말도 안 되게 비싼 티켓이었다. 가난한 대학생이 비행기 티켓을 날려버린 것도 큰 타격인데, 비싼 가격에 새 티켓까지 사는 건 어퍼컷에 이어 카운터 스트라이크까지 한대 얹어 맞은 충격과 같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너무 상심할 '하루카'였다.
장거리 연애를 하면서 우리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한국에서 만날 때는 아호가, 일본에서 만날 때는 하루카가 모든 것을 준비했다.
일정에 맞춰 여행 코스를 짜고 호텔을 예약하고 먹고 싶은 식당들을 알아두거나 예약해 두었다.
그리고 여행 예산을 계산해서 알려주면, 만나는 날 비용을 주고받았다. 그렇기에 1년에 3-4번뿐인 만남은 우리에게 매우 소중했다.
길을 걷다 예쁜 카페를 발견하면 지도 앱을 열어 가고 싶은 곳에 저장했다.
우연히 찾은 맛집을 발견하면 '함께 먹고 싶은 곳' 리스트에 추가하였다.
좋은 여행지를 발견하거나 알게 되면 '같이 가고 싶은 곳' 메모장에 기록해 두었다.
몸은 떨어져 있었지만 하루하루 그녀와 함께 할 것을 상상하며 지내다 메모장이 가득 찰 때쯤 그녀와 만나는 날이 도래했다.
이번 오사카여행도 마찬가지였다. 3박 4일이지만 3-4개월 동안 하루카가 아호와 함께 할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며 촘촘하게 짜둔 계획들이었다. 그것을 수포로 만든 놈이 되어버렸으니. 만나면 어찌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을까. 혹여 그녀가 어떤 불호령을 내뱉어도 감내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일본 오사카 공항에 도착했다. 출국 게이트 문이 열리자 하루카가 보였다.
얼굴만 봐도 바로 알 수 있었다. 화가 잔뜩 나 있는 상태였다. 멍청한 남자 친구 때문에 하루 종일 공항에 있었다. 함께 먹으려했던 식당 예약을 취소했고, 삼각김밥으로 혼자 끼니를 때워야 했다.
아호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미안해..."
"..."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이내 그녀는 아호를 보며 말했다.
"보고 싶었어."
1년에 고작 서너 번 만나는 우리에게 화내고 토라질 여유는 없었다.
싸우고 삐칠 시간조차 아까웠던 시절.
그것이 우리의 장거리 연애였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처음엔 그 말이 사실일까 겁이 났다.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처음 작별할 때, 그 말이 현실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아호가 경험한 5년간 장거리 연애 시간은 처음 가졌던 걱정과 전혀 달랐다.
몸이 멀어지니, 마음은 더욱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멀고 먼 거리만큼, 길고 긴 기다림만큼, 함께 있을 때 시간이 얼마나 특별하고 소중한지 알게 되었다. 헤어짐은 늘 아쉬웠지만, 그만큼 다음 만남은 더욱 간절했고 달콤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공항에서 손 흔들며 돌아서는 대신, 같은 집, 같은 문을 열고 "다녀왔어"라고 웃으며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
그 희망이 두 사람의 긴 기다림을 버틸 수 있게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