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생전 돈 봉투를 받아 본 적은 없지만, 편지 봉투를 받은 적은 있다.
초등학교 4학년, 아호 생일날이었다.
초4 아들놈은 변신 로봇 장난감이나, 게임기를 기대했건만 받아쓰기 만점도 못 받는 어린 고사리 같은 손에 쥐어진 것은 어른의 언어가 담긴 종이쪼가리였다.
그 편지 속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있었다.
"너에게 좋은 '향기'가 난다."
황당한 소리였다.
하지만 이 문장이 아직까지 기억 한구석에 남아있는 이유는 딱지치기만큼이나 언제나 사랑 앞에서는 진심이었던 초4 아호는 당시 짝사랑하던 짝꿍에게 엄마의 문장 그대로 베껴서 러브레터를 적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문장력으로는 절대 만들어낼 수 없는 표현이라 훔치고 싶었나 보다.
저자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저작권료도 내지 않은 채 도둑질한 문장은 짝꿍의 마음은 훔치지 못했다.
그날 이후 "향기"라는 단어는 긴 세월 속 잊혀 기억 속 한편으로 남아 깊숙이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뜬금없이 다시 나타났다.
엄마가 아닌, 전혀 뜻밖의 사람 입에서 그 문장이 다시 흘러나왔다.
"오빠한테 좋은 향기가 나."
멍해졌다. 머리가 하얘졌다.
나? 향기? 진짜? 나한테? 향기가 난다고?
평소 향수는커녕 한 겨울에도 로션도 바르지 않아 얼굴이 다 부르트는 상남자 아호에게 화학기술이 만들어낸 인공 향이 날 일은 절대로 없었다.
확인하고 싶었다. 의심은 곧 실험으로 이어졌다.
씻기 전, 하루의 채취를 가득 품은 땀에 절은 티셔츠를 벗어 코에 가져갔다.
"으악!! 내 코!!
뭔 향기 같은 X소리!!
그냥 식초 썩은 내이구만!!!
제기랄... "
예상은 했지만... 향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로써 아호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분명...
두 여자의 코가 고장 난 것이 틀림없었다.
이 세상에 영원한 수수께끼는 없다고, 진실은 언제나 밝혀진다고 어떤 이는 말했다.
세기의 미스터리가 될 뻔했던 향기의 비밀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드러났다.
무더운 8월 말레이시아.
그녀와 연애를 시작한 후, 서로 식성도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지 음식 거부감 지수는 제로에 가까웠고, 쌍따봉을 날리는 음식도 완벽하게 겹쳤다.
그중에서도 미친 듯이 엄지 척을 치켜세우며 폭풍 흡입했던 음식은 바로 과일의 황제 "두리안"이었다.
가시 돋친 철퇴 같은 겉모습. 냄새는 고약함의 끝판왕. 많은 사람들이 코를 틀어막으며 헛구역질을 하게 하는 과일이었다.
말레이시아에 있던 한국인 유학생 중 두리안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호뿐, 일본인 중엔 하루카뿐이었다. 몇 번 친구들을 데리고 갔지만 다들 냄새와 맛에 기겁하며 도망치기 일쑤였다.
아호와 하루카는 7~8월 두리안 제철일 때 두리안 찬양을 부르며, 매일매일 그분을 영접하러 나이트 마켓을 기웃거렸다. 대학 캠퍼스 교우들 사이에서는 두리안 냄새 풍기고 다니는 지지리 궁상 두리안 커플이 되어 버렸다.
한창 두리안에 빠져 있던 어느 날.
이날도 어김없이 두리안 커플은 손을 맞잡고 경쾌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나이트 마켓을 향해 걷고 있었다. 전방 50m부터 스멀스멀 두리안 냄새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두리안 광신도인 두 남녀는 멀리서부터 흘러오는 향을 맡고 이렇게 말했다.
"음... 두리안 향기..."
한 걸음씩 가까워질수록 향은 점점 진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행복감이 넘쳐났다.
그 순간! 딱!
어떤 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 이거였다!
엄마가 말했던 향기.
그녀가 말했던 향기.
그리고 두리안 향기.
10년간 풀지 못했던 비밀을 드디어 알게 되었다.
전혀 상관없어 보였던 이들의 공통점이 바로 비밀을 풀 열쇠였다.
비밀로 둘러싸여 있던 '향기'의 정체는 바로...'좋아하는 마음'이었다.
누구는 고약하다고 코를 막았지만, 미칠 듯이 좋아하니까 그 대상은 어느새 향기가 되어 있었다.
10년 전 엄마가 말했던 향, 하루카가 아호에게 말했던 향, 그녀들이 말했던 향은 코로 맡는 향이 아니었다. 바로 '마음에서 피어나는 향'이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향.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향.
두 여자가 말한 향은 이것이 틀림없었다.
이로써 다행히...
두 여자의 코는 지극히 정상임이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