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카가 한국에 혼인신고 하러 오기 전날,
아호는 프러포즈 스케치북을 만들었다. 복사한 사진과 글을 하나하나 오려 붙이는 작업을 했다. 손재주가 없던 그에게 이 작업은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었다.
글자를 하나씩 오려서 붙이는 작업을 하는 동안 조금씩 현타가 밀려왔다.
'아, 그냥 내 맘 다 알지?'
퉁치고 넘어가고 싶다는 나쁜 악마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곧바로 나에게 와준 그녀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지라며 착한 천사도 함께 등장했다.
'내가 참 별의별 짓을 다 하고 있구나.'
'아니야. 그녀가 네게 보여준 호의에 비하면 이 정도 수고는 아무것도 아니지.'
'어차피 서로 마음 다 아는데 굳이 이런 거까지 해야 되나?'
'결혼 선배님들 말 못 들었어? 이번 한 번으로 50년을 편하게 지내는 거야. 반평생동안 우리 남편은 프러포즈도 안 해준 망할 놈이다라는 원망 섞인 잔소리 듣고 싶니?'
'그래도 명색에 부산 사나이, 경상도 남자인데... 여자한테 이렇게 하는 게 참 부끄럽단 말이야?'
'이 놈... 아직 정신 덜 차렸네... 경상도 남자 같은 소리 하네. 감사해라, 감사해. 넌 복에 겨웠어. 너 같은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를 위해 결혼까지 해준다는 여자가 어디 있겠냐?'
아호의 마음속에서는 이중인격자처럼 '하기 싫다'와 '해야 한다' 두 인격이 치열하게 설전을 벌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 설전에서 패자는 '하기 싫다'였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프러포즈로 쓸 스케치북을 완성했다.
아호는 녹다운 상태로 방바닥에 쓰러졌다. 아호는 천장을 바라보며 내일의 시나리오를 머릿속으로 돌렸다.
오후에 그녀가 한국에 도착하면 백화점으로 향해 양가 부모님 선물을 고른다. 저녁 무렵 "결혼 도장 찍기 전 마지막 사진을 남기자"며 사진관으로 향하고 근처 꽃집에 들러 꽃다발을 준비한다. 사진을 찍고 난 뒤 미리 찾아둔 프라이빗 룸을 갖춘 이탈리아 레스토랑으로 이동해서 식사가 끝나갈 무렵, 짜잔! 프러포즈를 한다. 그 다음날 함께 손잡고 동사무소로 가서 혼인신고를 한다!
너무 완벽한 플랜이었다. 아호는 방바닥에 누워 내일의 일을 상상하며 희죽거렸다.
내일 기다리고 있을 예상치 못한 순간들이 펼쳐질지도 모른 채로...
처음엔 모든 게 순조로웠다. 계획대로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양가 부모님 선물을 고르는 데 예상보다 시간이 걸렸지만, 아호는 레스토랑을 미리 예약하지 않은 자신의 선택을 칭찬했다.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선물을 고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웨이팅 없이 들어갈 수 있으면서도 프라이빗 룸을 갖춘 레스토랑을 미리 찾아둔다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녀는 모를 것이다.
오후 6시가 다 되었다. 사진관이 저녁 7시까지만 운영하니, 힘들고 배고프지만 먼저 사진부터 찍자고 했다. 미리 알아둔 사진관으로 이동하며 찾아둔 꽃집에 들렀다.
여기서부터 일이 조금씩 꼬이기 시작했다.
사진관 근처의 작은 꽃집은 단체 주문 때문에 생화가 거의 다 나간 상태였다. 남은 건 국화뿐. 결혼을 기념할 자리에 영결식이 될 판이었다.
다른 꽃집을 찾자니 거리도 멀고 시간도 없었다. 난처한 아호의 표정을 읽었는지, 꽃집 사장님이 "꽃다발이 하나 있긴 한데..." 라며 구석에서 뭔가를 꺼내왔다.
시들지 않는 꽃, 프리저브드 플라워였다. 예쁘게 엮인 꽃다발을 보니 이것이라도 사야 했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후들후들한 금액에 한 대 얻어맞았다. 왜 구석에 고이 모셔두었는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하루카는 굳이 꽃 들고 사진 안 찍어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아호는 꼭 사야 했다. 그는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꽃다발이 필요했다.
선택지가 없었다. 결국 고가의 프리저브드 플라워를 사들고 사진관으로 향했다.
하루카가 준비한 커플 스웨터를 입고 사진을 찍었다. 사진은 성공적이었다.
사진 촬영도 다 마치고 서로 허기진 배를 붙잡았다. 저녁은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좋은 곳을 찾아뒀다고 아호는 큰소리를 쳤다.
식당 앞에 도착했다. 느낌이 싸했다.
분명 지도 앱은 이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느낌의 널브러진 공사 잔재물들이 눈에 밟히면서, 아호의 마음도 함께 짓밟히고 있었다. 도착한 건물에는 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너저분한 상태로만 존재하고 있었다. 전화를 걸었다.
뚜.. 뚜.. 뚜...
"이 전화는 없는 번호이니 다시 확인하시고..." 어쩌고 저쩌고...
텅 비어 있는 저 공간이 아호가 가려던 레스토랑이 아니길 바랐건만, 식당에 전화를 걸어 낯익은 안내 음성을 듣는 순간 '에이... 설마'는 '에라이... 역시'로 바뀌어버렸다.
예약은 안 하더라도 존재 여부라도 확인할걸... 6개월 전 누군가 남긴 네이버 리뷰만 믿고 찾아온 게 실수였다. 이런 중요한 날에 대충 알아보고 온 그놈. 그래, 그게 아호였다.
하루카는 오늘 저녁, 얼마나 대단한 이벤트를 아호가 준비했는지도 모른 채 그냥 눈에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서 아무거나 먹자고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짜증이 날 만도 했다. 한국에 도착한 후 빡빡한 일정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녔으니 몸도 피곤하고 배도 엄청 고팠을 것이다.
하루카는 가끔 엄청 투덜댈 때가 있었는데, 지금까지 연애하면서 봐온 결과 대부분 그 이유는 잠이 오거나 배가 고플 때였다. (아기인가??)
그녀의 짜증은 점점 한계치에 도달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눈앞에 보이는 순대국밥집에서 프러포즈를 할 수는 없었다.
아호는 등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급하게 다른 레스토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철거당한 레스토랑을 알아볼 때 근처의 괜찮은 식당들도 몇 군데 메모해 뒀던 게 있었다는 것이다. 공통점은 하나. 모두 프라이빗한 공간에 프러포즈하기 좋은 분위기를 갖춘 곳들이었다.
첫 번째 레스토랑에 전화했다.
"예약제로 운영 중입니다. 당일 예약은 받지 않습니다."
두 번째 레스토랑에 전화했다.
"죄송하지만 만석입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레스토랑이었다. 이곳에서도 거절되면 순대국밥집 행이었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하나하나 번호를 정성스레 눌러 전화를 걸었다.
"예약 손님이 예정보다 일찍 나가셔서 마침 한 자리 비어 있습니다. 지금 오시면 한 시간 반 정도 이용 가능하십니다."
할렐루야~ 오! 주님!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닿았나 보다. 신께서 전에 앉아 있던 커플에게 "저 절박한 영혼을 위해 자리를 비워주거라!" 하셨나 보다.
아호는 "바로 갑니다!"를 외쳤다.
1인 셰프가 운영하는 작은 레스토랑이었다. 테이블도 단 두 개.
조금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한 테이블에는 벌써 다른 커플이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감지덕지였다. 저 커플한테는 좀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곧 옆 테이블에서 펼쳐질 오글거림의 향연을 감수해 주시길 양해를 구할 수밖에...
메뉴판을 받았다. 메뉴는 그날 셰프가 만들어주는 코스 요리 하나뿐이었다. 하루카는 와인, 아호는 병맥주를 주문했다. 첫 모금을 마시고 나서야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 휴우... 살았다. 순대국밥집에서 행해지는 최악의 프러포즈가 될 뻔한 순간이었다.
음식이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 굶주린 두 남녀는 나오는 족족 순식간에 해치웠다. 다행히 코스 요리라 음식 사이사이 기다리는 시간이 있었다. 만약 한 번에 다 나왔다면 식사 시간이 10분도 채 안 걸렸을 것이다. 그래도 천천히 나오는 코스 요리 덕분에 술도 여유롭게 천천히 즐기며, 분위기는 조금씩 무르익고 있었다.
때가 되었다.
메인 요리까지 다 나왔다. 배를 채운 하루카의 얼굴에는 처음의 짜증이 온데간데없어졌다.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보니, 이제 슬슬 시작해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준비한 헤드셋과 스케치북을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냈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가가서 헤드셋을 씌워주었다. 헤드셋 안에서는 당시 아호가 즐겨 듣던 Lee Morgan의 재즈 연주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스케치북을 들고 그녀 앞에 섰다. 왠지 모르게 옆 테이블의 시선도 함께 느껴졌다.
괜찮았다. 일단 스케치북의 내용은 모두 일본어로 적혀 있었다. 그녀만 알아볼 수 있을 것이었다.
스케치북을 한 장씩 넘겼다.
"매번 공항에서 헤어질 때마다, 넌 눈물을 흘렸지. 그 눈물을 볼 때마다 다짐했어.
언젠가 꼭, 너의 눈에서 눈물 흘릴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너무 오래 걸렸어. 미안해.
긴 장거리 연애 동안 변함없이 사랑해 줘서 고마워.
이제 너의 눈에서 눈물 흐르지 않게 할게.
하루카. 나와 결혼해 줄래?"
스케치북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하루카 눈에는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긴 장거리 연애의 슬픔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정성에 감동한 걸까.
사진 찍으려고 샀던 그 비싼 프리저브드 꽃다발을 다시 건넸다. 꽃다발을 받은 하루카가 아호에게 말했다.
"난 오빠가 프러포즈 안 해줄 줄 알았어..."
옆 테이블에서 박수가 터졌다.
아놔... 부끄러웠다. 진짜 숨고 싶을 만큼. 철저히 프라이빗을 원했는데, 식당 예약 실패로 엉겁결에 공개 프러포즈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스스로를 달랬다. '레스토랑 망한 거 치고는 덜 쪽팔린 거야. 다행이다. 이제 반평생 "프러포즈도 안 해줬잖아" 잔소리는 안 들어도 되니까.'
다음 날 동사무소에 가서 함께 혼인신고서를 제출했다.
5년간 길었던 장거리 연애를 종결하고, 이제 아호와 하루카 커플은 법적으로 부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