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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당동붓다 Jun 04. 2020

엄마

나는 태생이 게으르고, 놀기 좋아한다.


금방 취하는 주제에 술을 좋아해서 밤에 노는 것을 특히 좋아한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그렇게 오만군데 전화를 해서 나랑 놀자고 놀자고 읍소한다. 보통 내 친구들은 번개를 싫어하니, 집에 빨리 들어가서 애나 보라고 하며 퇴짜를 놓기 부지기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생각나는 모든 이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슬프게 집으로 돌아온다. 어쩌다가 약속이 잡혀 놀게 되면, 조금만 더 놀자고 그렇게 애원한다. 그렇게 놀고 오면, 풀린 동공으로 집으로 돌아와 그 누구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은 채 화장실로 직행해, 한바탕 게워내고 깨끗이 샤워하고 또 화장실에 가기를 반복하다 다음날 출근을 포기하고 골골댄다. 그리고 다짐한다.


'내가 또 술 마시면 개다, 진짜.'


하지만 슬프게도 이 사이클은 거의 한 달 주기로 반복된다.


그래서 나는 남들 기준의 좋은 엄마는 아니다. 대단한 음식을 해주는 것도 아니고, 퇴근하자마자 집에 와서 아이를 깨끗하게 씻겨주는 엄마는 더더욱 아니다. 내가 하는 음식은 보통 한 그릇만 만들면 되는 일품요리이고, 그마저도 힘들 때는 배달음식을 먹는다. 쫒아다니면서 밥을 입에 넣어주는 것은 3살까지는 해보다가 아주 진절머리가 나서 억지로 밥을 주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5살 때부터 딸에게 혼자 샤워를 가르쳤고, 이제는 혼자 화장실에 들어가 샤워하고, 이 닦고, 로션까지 바르고 나와서 머리를 말린다. 정말 그동안 머릿니가 없던 게 다행 중 다행이다.


우리 엄마는 '무서운' 엄마였다. 우리 집은 먼지 하나 없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집이었으며, 우리 엄마는 늘 예쁘고 단정하게 화장하고 있었다. 엄마는 공부하라고 잔소리를 하지는 않았지만, 엄마의 말에 거역하면 혼났던 기억이 난다. 매일 아침 나를 깨워 오 첩 반상을 먹게 하시고 학교까지 친히 차로 데려다주셨으며, 저녁에는 직접 싼 도시락을 독서실 앞까지 배달해 다시 집으로 돌아가셨다가 새벽 2시에 다시 독서실로 데리러 오셨다. 생각해보면, 엄마는 엄마의 생활과 일상을 바쳐 나를 키워냈는데 나는 왜 엄마를 무섭다고 생각했을까?


나는 엄마를 실망시킬까 봐 두려웠다. 나는 엄마가 나를 너무나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의 자존감의 기저에는 엄마의 충분한 사랑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한편으로는 엄마를 실망시키면 우주가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엄마는, 엄마는 내가 외고를 가서 좋은 대학에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중간중간 엄마를 실망시키는 일이 있었지만, 나는 엄마가 생각하는 목적지까지 힘겹게 갈 수 있었고, 엄마의 자랑이 되었다. 엄마의 자랑이 된 그 무렵 나는 몹시 허탈했다. 나는 무엇을 위해 공부를 했는지,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나는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나의 취미는 무엇인지 조차알 수가 없었다. 깊이 생각하기 싫었고, 그저 친구들과 술먹고 깔깔대며 놀기 바빴다.


그즈음에,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늘 지치지 않고 열심히 살고 고민이 깊던 친구였고, 대충살며 고민없는 나와는 많이 다른 친구였다. 지금 나의 딸은 그 남편과 꼭 닮아 있다. 나와는 달리, 무슨 일이든 대강대강 하지 않고, 자신의 일은 꼼꼼히 해낸다. 자기가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을 할 때 기분이 좋은지, 어떤 동물을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다. 좋아하는 것들이 많아서,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그 일을 잘 해내려고 섬세하게 준비한다. 단단한 마음을 가졌지만 또 예민한 성격을 가졌고, 변화를 싫어하고 마음의 상처를 몹시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사람이 어떤 마음인지 아주 깊게 살피고 말을 조심한다. 나는 나와는 너무 다른 그런 딸이 좋다. 좋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매일매일 봐도, 마음속 깊이 사모한다. 그런 훌륭한 딸이 나를 사랑해주는 것이 너무나 고맙다. 사랑은 주기만 하는 것일 뿐, 무엇을 바라는 것이 아닌데, 감사하게도 나의 딸은 내가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많이 사랑해준다. 나는 그게 느껴진다.


보통 내가 나이가 좀 든 것 빼고는 딸보다 잘난 것이 없으니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내가 누구를 가르칠 깜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녀가 나를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공부를 못했다고 나를 두려워하지 않고, 힘든 일이 있을 때 나를 떠올려주었으면 한다. 무엇보다 엄마라는 믿을만한 구석 덕분에, 자신을 잘 알고, 자기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그저, 충분한 사랑을 '주기만' 하는 존재가 내가 되었으면 한다. 내 딸은 내가 주는 충만한 사랑 속에서 자라주었으면 한다. 

나는 그렇게 우리의 관계가 사랑하기만 하는 관계가 되었으면 한다. 공부나 돈이나 그딴 게 끼어들 틈 없이, 사랑만으로 똘똘 뭉친 관계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 동아는 존재 자체로 충분한 존재임을, 내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증명해주고 싶다. 엄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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