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끝, 초대

by 아름나무


20대 중반, 나는 영국으로 떠났다. 가족과 친구, 익숙한 모든 것을 뒤로하고 낯선 곳에서 오롯이 '혼자'로 보낸 2년여의 시간. 그건 설레는 도전이자 풍부한 경험이었고, 동시에 내 과거를 마주하고 작별하는 여정의 시작이었다. 알맹이를 보려면 쌓인 먼지를 치워야 하듯, 나는 내 안의 무언가를 계속 만나고 치워야 했다. 그리고 이 불편한 작업들을 하다 씨앗 두 알을 발견했다.


글과 사진.


이들을 마음밭에 심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다시 런던으로 돌아와 대학원생이 되어 있었다. 출판 석사 과정. 즐겁게 시작하면 좋으련만, 왜 그렇게도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을까. 아버지가 있는 힘을 다해 보내준 유학이었다. 비싼 학비, 비싼 월세. 따로 과외를 하고 있었지만 생활비는 턱없이 부족했다.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기는커녕 아버지에게 다시 짐을 지운 것 같다는 죄책감은 나를 짓눌렀다. 그래서 더더욱 힘을 주기 시작했다. '잘해야만 해. 너 이 돈이 어떤 돈인지 알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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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스트레스 지수가 위험 수준이에요. 치료를 받으셔야 할 것 같아요."

"아이고, 젊은 사람이 이렇게 몸이 안 좋아서 어떡해..."


런던에 가기 전, 병원에 갈 때마다 들었던 말이다. 나를 잘 돌보지 못했던 나는, 결국 쌓여있던 스트레스가 몸으로 드러나기 시작했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다시 런던에 돌아왔다. 몸이 아프니 빵이나 샌드위치, 맥주나 와인 같은 전엔 즐겨 먹고 마시던 것들도 입에 대기 힘들었다. 그 상태로 새 학기, 겨울학기를 시작했다.


수업은 따라가기 벅찼다. 영어, 한국과는 다른 수업 분위기, 어색한 반 친구들. '난 적응에 시간이 좀 필요한 사람이야.' 그 한 마디를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못했다. 아니 내가 그런 사람인지도 몰랐다. 웃는 일이 줄었고, 해야 할 일들로 숨이 턱턱 막히던 겨울 학기. '집에만 있고 싶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마음의 소리가 들릴 즈음, 절묘하게도 학기가 끝났고, 동시에 나는 코로나에 걸렸다. 몸과 마음의 긴장이 얼마나 나를 괴롭히는지, 그때 나는 늘 아파야만 깨달았다.


하염없이 잠을 자고, 누워 있었고, 드라마를 봤다. 디저트를 먹으며 책을 읽는 순간들이, 방 한 칸의 격리 속에서도 나를 숨 쉬게 해 줬다. 드디어 쉬게 되었던 것이다. 몸이 다 나을 무렵, 마스크를 쓰고 집 밖으로 나섰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바쁘게 344번 버스를 타고 학교를 가거나, 과제를 들고 카페에 가는 게 아닌, 그저 동네를 산책하는 일이. 단골 카페에 들러 플랫화이트를 한 잔 테이크아웃해 홀짝이며 길을 걷는 것조차 근사하게 느껴졌다. 한 학기가 끝나고 아프고 나니, 겨울은 봄으로 바뀌었고 햇살은 따스했다. 자연스레 발걸음은 파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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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초입에 있는 길. 웅크려있던 목련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 만개했던 동백은 꽃잎을 떨구며 작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파크에 들어서면 나는 꼭 외부와 차단된, 또 다른 어느 곳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곳은 나무가 가득했고, 공기는 달랐고, 새들이 속삭였고, 온갖 꽃들이 나를 반겼다.


내가 주로 이용하던 문으로 들어서면, 제법 큰 연못 (Pond)이 있는데 그 연못을 따라 물가 쪽으로 벤치들이 줄지어 있다. 사람들은 거기에 앉아 멍을 때리기도 하고,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책을 읽는다. 일주일간의 격리를 마치고, 몸과 마음에 붙은 긴장을 떼어낸 나도 그곳에 앉았다.


'왜 이렇게 힘을 잔뜩 주고 살고 있지? 난 왜 이렇게 힘들게 살지?'


하고 싶은 걸 해보겠다고, 그놈의 씨앗을 품고 여기에 다시 왔는데. 즐겁기는커녕 왜 이렇게 버거운 걸까. 그런 물음을 계속 던지던 복잡한 나. 그때의 나는 나를 멈추게 할 줄도, 쉬게 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늘 진이 빠지고 몸이 아파야만, 마음이 더는 못한다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야만 멈출 수 있었다. 속으로는 그런 질문을 품고, 파크로 들어갔던 그날. 파크는 파크다웠다. 내가 복잡하든, 스스로를 모질게 대하든, 몸과 마음이 지쳐있든, 그냥 있는 그대로 나를 반겨주었다.


'일단 여기 앉아봐.'


누군가로부터 초대를 받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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