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시 파크의 봄은, 돌아보면 황홀 그 자체였다. 연둣빛은 점점 짙어지고, 바람이 살랑살랑 내 몸을 스치며 계절을 알렸다.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아니 풀밭 위에 철푸덕 누워 있기만 해도, 그 자체로 황홀한 계절.
그 싱그러운 봄을 처음 만났던 때, 내 속은 황폐하기 짝이 없었다. 잠은 쉽게 들지 않았고, 쉽게 피곤했고, 꺼내기 어려운 기억들은 내 안에서 엉켜 날 예민하게 만들었다. 이놈의 생각은 멈출 줄을 몰랐다. 뇌를 꺼내서 찬물샤워를 시킬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차가운 음료나 밀가루 음식을 잘 소화하지 못했던 것도, 매일같이 이어진 설사도 이제 와 보니 모두 '신체화' 증상이었다. 사람에겐 본능적으로 자신을 지키려는 힘이 있는 걸까. 어쩌면 그때 난, 살기 위해 공원을 매일같이 드나들었던 게 아니었을까. 살려고. 살아보겠다고.
* 신체화: 심리학에서 주로 사용되는 용어로, 정신적인 스트레스나 감정적인 문제가 신체적인 증상으로 나타나는 현상
그 무렵, 나를 유독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도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마음이 심란하고 괴로웠다. 애써 거리를 두려는 내 행동은, 나를 돌보기 위한 시도라기보단 그 사람을 피하려는 방어였다. 그러니 오랜만에 만나도 괴로운 건 매한가지.
재수 없어.
쟨 고생을 안 해봐서 그래.
뭐가 그렇게 당당해?
왜 자꾸 날 무시하는 거 같지?
나는 그를 더 미워하고 오해했고, 내 안에서 나를 몰아붙이던 그 여자는 어김없이 이런 나를 다그쳤다. '걔 앞에선 아무 말도 못 하면서.' 돌이켜보니 그 사람은 거울이었다. 인생에 크게 그늘이 없고, 늘 쾌활하고, 자기 자신을 분명하게 사랑하고 긍정하는 그 사람은 나를 비췄다. 그늘로 남은 과거에 붙잡혀 우울하고, 속으론 끙끙 앓고,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나를.
아마 그날도 그 사람을 곱씹으며 공원에 들어섰던 것 같다. 온갖 생각을 해가며, 그런 나를 괴로워하며 입구로 들어갔는데, 어디선가 맑고 깨끗한 향기가 났다.
'뭐지? 이 향기 뭐지?'
향기가 나는 곳으로 방향을 트니, 산책길 옆으로 하얗게 피어난 꽃들이 보였다. 그냥 좋았다, 그 향긋한 냄새가. 그것은 마치 해변의 파도처럼 부드럽게 내 안으로 밀려와, 마음속 어지럽게 흩뿌려진 생각들을 지웠다. 깔끔하게. 한참이 지나서야 그 꽃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예쁘기도 하지. 오렌지 블러썸.
그 하얀 꽃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공원을 돌다 보면 또 다른 향기가 내게 인사를 건넸다. 익숙하면서도 새롭게 다가오는, 내 감각을 즐겁게 해주는 라일락. 이쪽에선 하얀 라일락, 저쪽에선 연보라색 라일락이 마음속 그 사람을 밀어버렸다. 그럼 아주 단순한 생각이 고개를 내밀었다.
'오늘 저녁은 뭐 먹을까.'
아픈 마음이 회복이 된 한참 후에야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봄, 나는 참 많이 아팠고, 이 구겨진 마음을 공원이 조금씩 어루만졌다는 걸. 그 해 봄, 꽃향기는 파도처럼 밀려와 마음속 낙서를 지워주었고, 파크는 주름진 내 마음을 펴기 시작했다.
후각은 가장 강력하고 원시적인 감각이다. 마음에 독성 감정이 가득하면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지만, 냄새는 그런 장벽을 뚫고 들어온다.
<정원의 쓸모>, 수 스튜어스 스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