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에 핀 블루벨

by 아름나무



영국의 봄은 꼭 긴 터널의 끝에서 스며드는 빛 같았다. 싱그러운 잎사귀도, 향긋한 꽃들도, 영국의 길고 우중충한 겨울을 지내느라, 우리 모두 수고가 많았다고 말하는 듯했다. 공원의 기지개는 생기가 도는 것이었다. 마치 "이제 슬슬 움직여볼까?" 하고 찌뿌둥한 몸을 풀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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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또 하나의 꽃이 있다. 이름도, 생김새도 정말 귀엽고 예쁜 '블루벨 (bluebell)'.
숲이나 그늘진 나무 아래에 피는 이 작은 야생화는, 파랗고 보랏빛을 띠며 서유럽에서만 볼 수 있는 봄꽃이다. 특히 영국에선 각지의 숲에 이 작은 꽃들이 모여 만개하며, 보랏빛 융단(실제로 bluebell carpet이라고 부른다.)을 이룬다. 그래서 '블루벨 시즌(보통 4월)'이 되면 영국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러 숲으로 향한다. 우리가 봄마다 벚꽃을 보러 가듯, 그들은 블루벨을 만나며 계절을 자축하는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블루벨을 본 곳은 배터시 파크였다. 손톱만 한 종 모양의 꽃이 고개를 살짝 떨군 채 모여있는 모습이 정말 귀엽고 어여뻤다. 멀리서 보면 보랏빛 안개 같고, 가까이 들여다보면 수줍은 얼굴들 같았다. 실제로 영국인들은 블루벨을 요정처럼 묘사하기도 한다. 그래서 블루벨 숲엔 요정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도 영국에선 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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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에도 이렇게 작고 어여쁜 것이 피는구나.'


나는 올망졸망한 그 꽃들 앞에 슬며시 앉아, 한참을 바라보곤 했다. 그 귀엽고 순수한 것은 매번 날 붙잡았다. 그래서 내 몸과 마음이 그 순간에 머물 수 있었다. 어제 아침도, 내일 저녁도 아니고 그때 그 시간, 그곳에. 지나고 보니, 그건 마치 명상 같았다. 그러니까 내 마음속에 꽃을 심는 작업 같았다.

내면에 꽃 한 송이 심는 건 마음밭이 완벽하게 정리되지 않았어도, 잡초나 먼지 따위가 있어도 괜찮은 것이었다. 좀 그늘이 져있어도 괜찮은 것이었다. 거기서 무럭무럭 잘 자라는 블루벨을 심으면 되니까.


블루벨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후로, 이 꽃을 보고 싶어서 계절을 기다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다음 해 봄, 나는 더 이상 그 미운 사람을 곱씹지 않았다. 대신 나도 구글에 'bluebell spots in England'를 검색해 영국사람들처럼 이름도 가물가물한 어느 숲에 갔다. 질투나 시기를 밀어내고 1년동안 기다린 꽃을 보러 가는 건 나 자신이 꽤 근사해지는 일이었다.

'안녕, 나 너네 진짜 많이 기다렸어!'


그렇게, 내 마음밭에도 블루벨이 피어났다.

그리고 앞으로도, 매해 봄마다 다시 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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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 is a silent eloquence
In every wild bluebell
That fills my softened heart with bliss
That words could never tell.


야생 블루벨은 말없이도

마음을 울리는 깊은 감동을 전하죠.

그 작고 조용한 꽃이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줘요.


<The Bluebell> by Anne Brontë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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