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내면의 힘이 있어요. 자기 자신을 돕고 있는데요?"
몇 년 전 상담선생님이 내게 했던 이 말이 처음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이제껏 나는 나를 들들 볶았다고만 생각해서. 그래서 나 자신도 잘 믿지 못했다. 시간이 꽤 지난 지금, 문득 파크에서 보냈던 초여름을 떠올리니 아주 작고 단단한 믿음 하나가 떠오른다. 맞다, 그 초여름. 적어도 그 시절만큼은, 나는 나를 도왔지. 그렇다면 지금도 그럴 수 있을 거라는 믿음.
3년 전, 여름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꽃들이 진 자리엔 풀이 무성히 자라났고, 파크는 온통 푸른 기운으로 가득했다. 나는 그때, 계절의 경계는 분명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봄의 끝과 여름의 시작은, 공기부터가 달랐다. 적당히 따뜻한 바람과 저녁이 조금씩 늦어지는 낮. 그 싱그러운 초여름에 난, 내 예민함에 지쳐있었다. 차가운 물 한 잔에도 위장이 화들짝 놀랄 정도로 신경이 곤두서있었고, 마치 누군가가 내 속을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정말이지, 망가질 것 같았다.
그 초여름에도 나는 매일같이 공원으로 향했다. 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걸었다, 팟캐스트를 들으며. 가끔은 웃기도 하고, 때로는 조용히 음악을 들으며. 나는 입구로 들어가 한 바퀴 도는 식으로 산책을 했는데, 왼쪽으로 반쯤 걸으면 알버트 브릿지와 템즈강이 나온다. 해 질 무렵의 그곳은, 정말이지 아름답고 상쾌하다. 하루와 작별하기 딱 일 정도로. 사람들은 제각각의 모습으로 그곳에서 하루를 정리한다. 어떤 이는 난간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어떤 이는 벤치에 앉아 책을 읽으며. 또 어떤 이는 가뿐히 달리다 잠시 멈춰 노을을 바라보며, 다른 어떤 이는 가만히 누워있으며.
나는 주로 난간에 기대어 출렁이는 강의 물결과 짙어져 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하루를 끝냈다. 그곳엔 지나간 시간에 대한 후회도, 앞으로를 향한 다짐도 없었다. 그저 머무는 것만으로도 나는 회복할 수 있는 강한 존재라는 걸, 나는 나중에 해 질 녘의 그곳을 떠올리며 깨달았다. 공기가 점점 서늘해지면, 나는 다시 반 바퀴를 걸어 처음 들어왔던 곳으로 나왔다. 얼굴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고, 마음은 한결 시원해진 채로 집으로 돌아오면 딱 1시간이 지나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후엔, 자연스럽게 책상에 앉아 노트를 폈다. 한 장은 평범한 줄노트인데 그다음 장은 1부터 10까지 숫자가 적혀있고, 그 밑에 빈 공간이 있는 특이한 노트. 나는 그날 머릿속에 쌓인 생각들을 다 그곳에 쏟아냈다. 그리고 1부터 10까지 적혀있는 공간엔 감사제목을 적었다. 무슨 말을 적어야 할지 막막했던 감사제목은 꼭 감자를 캐는 것 같았다. 한두 개 적기 시작하니 나중엔 다른 여러 가지 제목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밑엔 아주 어려운 걸 적었다.
"자신을 비난하는 말, 일기장에 당분간 적지 마세요. 반성도 하지 마세요."
상담선생님은 나를 간파하셨던 걸까. '그때 그러지 말걸, 다음엔 그러지 말아야겠다'라고 적었던 일기장에 나는 처음으로 칭찬의 말을 남겼다. '오늘도 나가서 걷다 왔구나? 진짜 잘했어.' 이런 말들을. 살면서 처음으로 남긴 그 서툰 말들이 마음에 연고처럼 스며들었다.
그렇게 매일, 걷고 쓰고, 다시 살아나던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