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겨진 경주마의 눈가리개

아버지의 간경화와 나의 번아웃.

by 아름나무


1.

학부 4학년. 보통 의학전문대학원을 준비하는 학부생이라면 4학년 1학기는 보통 대학생이 아니라 수험생의 신분으로 그 시간을 보낸다. 수업은 한 두 과목 정도만 듣고 나머지 시간을 8월에 있을 시험공부에 쏟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려고 했던 그때, 아마 그때였을까.


나, 라는 배가 방향을 틀어 항해를 하기 시작한 게. 앞만 보며 달리던 경주마같이 살던 나. 갑자기 눈가리개가 벗겨져서 시야가 넓어졌던 게.


시험공부를 앞두고 잠시 본가로 내려갔던 날이었다.


"다들 이리 앉아봐. 아빠가 할 말이 있어."


그날, 아버지는 술에 잔뜩 취하셨고 그의 표정은 너무나 어두웠다. 술주정을 듣기 싫었던 나는 내 방에서 혼자 짜증의 한숨을 내쉬다가 방을 나왔다. 온 가족이 모이자 아버지는 다음 운을 떼셨다.


"아빠 간경화야. 길어야 5년이래."


그날 밤에 받았던 충격을 글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날 아버지는 어둡지만 담담하게 자신의 병을 말씀하셨고 나머지 가족들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자꾸만 몸이 심하게 피곤하고 살이 자꾸 빠져서 병원에 가셨다가 알게 된 거라고 하셨다. 그것도 우리에게 알려주기 6개월 전에.


무서운 마음을 가다듬으며 인터넷에 '간경화'를 검색했다.


간경화(간경변증) : 만성적인 염증으로 인해 정상적인 간 조직이 재생 결절(regenerative nodules; 작은 덩어리가 만들어지는 현상) 등의 섬유화 조직으로 바뀌어 간 기능이 저하되는 것.


원인과 증상, 그리고 치료방법을 읽으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병은 심해지면 심해졌지 정확한 치료방법은 간이식 밖에 없다는 말에. 아버지와의 시간이 5년밖에 안 남았다는 말인가? 거짓말이지? 지금 나 누가 속이는 거 아니야? 당장이라도 그가 가족의 곁을 떠날 것 같고 무서웠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빨리 다가오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무거운 돌 하나가 더 추가되어 내 어깨를 짓눌렀다. 가난한 집의 첫째 딸, 그녀의 아버지는 간경화.




2.

아버지의 간경화 소식을 들은 후 자꾸만 힘이 빠졌다. 의사가 되고 말겠다는 열정은 거짓말처럼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래서 자꾸만 혼란스럽고 마음은 심란했다. 아버지가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앞에 열정은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었다. 열심을 내고 싶지 않았다.


당연히 시험을 준비할 힘도 없었고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까지 나는 한 번도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 시험을 내년으로 미루고 아버지에 대한 불안을 마음에 가득 안은 채 흘러가는 시간에 나를 그저 맡겼다. 큰맘 먹고 쉬기로 했으니 그냥 좋아하는 걸 해보자고 생각하며.


대학교 마지막 여름방학. 늘 어디 가고 싶다 저기 가고 싶다 말만 하지만 제대로 어딘가로 여행 한번 가본 적 없었다. 처음으로 여행을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남들 다 흔히 가는 내일로 여행도 가지 않았던 나였다. 아무도 나에게 가지 말라고 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왜 어쩌자고 그만큼의 여유도 나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건지. 무튼 잠깐의 여유를 가져야겠다고 여행을 떠났다. 어디 멀리 간 것도 아니었다. 나름 서울에서 제일 먼 것 같은 곳으로 떠난 여행지는 우리나라의 남쪽이었다.


고작 3박 4일쯤의 여행이었다. 순천이었나 어느 게스트하우스에서 조촐하게 저녁 파티를 열어 처음 보는 여행자들과 시간을 보냈다. 문득, 그때 처음으로 여름밤은 좋은 거구나,라고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더위를 많이 타고, 여름마다 이것저것 뭘 하느라 여름이라는 계절을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던 나는 후텁지근한 공기를 치킨과 맥주로 달래고, 음악을 들으며 밤을 노래하는 여름을 처음 마주했던 것이다.


잘 쉬다가 여행에서 돌아와서 다시 힘을 내어 앞으로 나아가야지, 다짐했다. 내가 더 열심을 내야 할 것만 같았다. 아버지가 아프니까, 나를 더 방치해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그 이후로 자꾸만 더 힘이 없고 만사가 귀찮고 모든 것이 버겁게만 느껴졌다. 혼란스러운 나날들이었다. 아마도 그 여름밤에 대한 인상이 나를 더 심난하게 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앞으로 더 아프실 텐데 나는 어쩌자고 여름밤을 즐겼지. 나 나름 열심히 살았던 것 같은데 왜 이러고 있는 거 같지. 이렇다 할 성과 없이. 무엇을 위해서 달리고 있는 거지. 갑자기 삶에 대한 회의감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내가 왜 이렇게 달리는 거지?

우리 아빠는 이제 정말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건가?

그럼 나는 어떡하지?

내가 의사가 되는 게 맞는 건가?

아니면 그럼 어떡하지?

내가 좋아하는 건 뭐고 싫어하는 건 뭐지?

나는... 도대체 누구지?


뭐지? 나 왜 이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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