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를 찍고 가난을 적었다

그리고 펑펑 울었다.

by 아름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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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쉬고 또 쉬던 나날들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미루지 않고 하는 건 마치 나를 돌보는 일과 같았다. 그러나 그것들이 넘어진 나를 온전히 치료해주진 않았다. 나는 넘어진 나를 확인하고, 정확히 어디가 다친 건지, 무엇이 아픈 건지 직시해야만 했다.


나는 그때도 글을 썼다. 글이라 봤자 일기와 같은 글이었지만 펜을 들 때만큼은 생각이 정리되고 감정이 분명해져 시간이 가는 줄 모를 때가 많았다. 그때도 너무나 혼란스러워서, 도저히 모르겠어서 글을 잔뜩 썼다. 흘러가는 생각과 감정대로. 그러던 어느 날 마음에 깊이 박혀서 모르고 지냈던, 그래서 너무나 나를 아프게 했던 유리 파편 한 조각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김 없이 마음을 글씨로 풀어쓰다 늘 무시하던 그 단어가 내 손을 통해 적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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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시절 노트엔 이런 시들이 가득 써있다. / 2014




가난.

우리 집이 가난해서, 나는 아프다.



두 글자 적었을 뿐인데 여러 가지 기억들이 우르르 쏟아 나와 나를 울렸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가 있던 동네는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가족단위가 많은 곳이었다.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 질문을 열한 살 때 또래 친구가 한 적이 있다.


"너네 집은 몇 평이야? 아빠는 무슨 일 하셔?"


어느 아파트, 몇 평에서 사는지 묻고 궁금해하며 그것으로 또래를 평가하던 것이다. 그 어린 나이에. 하교를 할 때마다 30 몇 평, 혹은 40 몇 평의 아파트로 귀가하는 친구들을 보며 부러웠다. 안타깝게도 우리 집은 더더욱 가난해졌다. <아버지는 회사원, 어머니는 주부>라는 항목이 나와 내 친구들을 평가하는 잣대였던 그 시절, 우리 집은 쌀집을 하게 되었고 집은 다른 동네로 이사를 했다. 물론 더 좁은 집으로. 그게 중학생 때 일이었다.


학교에선 가난이 묻어나지 않게 행동하다가 하교 후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조금 초라하게 느껴졌다. 마치 화려한 무도회는 끝나고 12시가 땡 하고 허름한 차림으로 집으로 들어가는 신데렐라처럼. 어느 날은 엄마가 날 학교 앞으로 데리러 오신 적이 있다. 쌀집 운영을 하며 끌고 다녔던 검은색 차, 티코. 그 차가 너무 부끄러워 저만치에서 친구와 헤어지고 잽싸게 그 차를 탔던 게 기억난다. 너무나 죄송해서 아직까지도 잊히지가 않나 보다.


영화 시월애의 유명한 대사가 기억난다. 숨길 수 없는 3가지 말이다. 기침, 사랑, 그리고 가난.

아마 그 시절의 나에게도 가난은 숨겨지지 않았겠지.


버스비 3만 원을 달라고 하는 것도 눈치를 보았던 시절. 어느 날은 부엌 한편에 쭈그리고 앉아 눈물을 훔치던 엄마의 모습을 보았던 그 시절. 그럼에도 공부하는 딸내미가 필요한 문제집이나 다른 어떤 것들은 무리를 하서라도 마련해주셨던 그 시절 나의 부모님. 돈 때문에 싸우고 돈 때문에 울었던 당신들. 그것을 지켜보며 파르르 떨던 그때의 나.


무시하며 살았던 그 가난을 인정하며 마음껏 울고 나니 나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괜찮아졌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주저앉아있던 나는 점차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계절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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