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거면 의사 하지 마

내가, 나의 행복이, 더 우선인 사람들.

by 아름나무


1.

나를 붙잡아주고 응원해주던 친구들이 곁에 있었지만 나의 번아웃은 그들도 어찌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어쩌자고 나를 잃어버릴 만큼 달렸는가 싶다. 안타까울 만큼. 그러나 청춘에 한 번쯤은 자기 자신을 잃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만큼의 열정을 갖고 있는 청춘이라고 나를 보듬어 주고 싶다. 내가 했던 숱한 고민과 갈등과 실패, 번아웃마저 지난날의 나의 열정이었다고. 이젠 그 시간들을 바탕으로 나의 에너지를 잘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고. 그러고 보면 지나간 시간들이 다 소중하고 의미가 있다.


마지막 시험 후, 혼자 자취하던 그 작은 방에서 나는 또 불도 안 켜고 누워있던 적이 많았다. 어지럽혀있는 방상태가 꼭 내 마음 같았다. 빨래통 속의 옷들을 세탁기에 넣을 힘조차 없이 그저 흘러만 가던 시간들.


그때의 난, 모든 의욕을 잃은 상태였고 제일 친한 몇몇의 친구들 빼고는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말하자면 대인기피증이 있었던 것 같다. 어느 날은 본가에 내려갔는데 어머니와 동생과 집 근처 치킨집에 간 적이 있다.


"비가 온다. 치킨집이 하나 새로 열었는데 거기 가서 치킨에 맥주 할까?"

"싫어. 사람들 있잖아. 그냥 시켜먹자."

"가을비가 오잖아. 바람 쐬고 들어오자."


그 치킨집에 앉아서 나는 내내 테이블만 보았다. 사람들이 불편했고, 그 분위기 속에 내가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는 내게 과일을 깎아주었다.


"과일 먹을래? 이거 맛있는 거야."


나는 그때 비로소 내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대학에 간 이후로 어머니는 나를 한 번도 우쭈쭈(?) 한 적이 없던 분이셨다. 서울에서 자취하는 동안 반찬 좀 만들어달라는 내 투정에도, 거기 마트랑 시장이 잔뜩인데 뭣하러 만드냐고, 사 먹으라고 했던 분이셨다. 그런 어머니가 과일을 깎아서 건네주셨을 때, 아, 지금 내 상태가 말이 아니구나, 하고 나는 직감적으로 안 것이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 어머니는 내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셨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너 자신이 제일 중요하니 너를 잃어버리면서까지 그러지 말라고. 그렇다, 난 나를 챙길 만큼의 에너지도 다 쓰고 없던 것이다.



2.

그래도 다행히 나는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내 곁에 있던 친구들의 도움이 컸다. 시간은 흐르고 어느새 시험성적이 나왔고 또 어느새 원서접수를 했다.


1차 합격, 면접 준비.


이럴 수가. 1차가 붙어버렸다. 솔직히 내 심정은 복잡했다. 기쁘기도 했지만 어떡하지, 하기도 했다. 그래도 면접을 보아야 하니 면접스터디를 했다. 모르는 사람들 네다섯 명이서 예상 질문을 뽑아보고, 시뮬레이션을 해보는 스터디였다. 본격적으로 처음 스터디를 했을 때가 생각난다. 서로 잘됐으면 한다고 겉으로는 말하지만 눈빛을 다들 경쟁자를 바라보는 것 같던 그 살벌한 분위기. 나를 캐내고 캐내던 날이 선 질문들. 그 속에서 헤매다가 정신을 바짝 차리다가 결국 진이 빠지고 말았다. 5시간의 스터디였다.


멍한 얼굴로 나와 누구에게라도 전화를 걸고 싶었다.


"언니. 어디야? 우리 맛있는 거 먹자. 나 너무 힘들어서 맛있는 거 먹어야겠어."

"그래. 성수지? 언니 1시간 뒤쯤이면 도착할 거야."


여전히 멍한 얼굴로 다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빠..."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왜 그래. 왜 우는 거야."

"몰라. 그냥 너무 힘들어."


"그렇게 힘들 거면 그냥 하지 마. 그만해. 의사 하지 마."


나는 이상하게 그 소리가 위로처럼 들렸다.

그렇다 아버지는 나의 부모.

딸이 시험이 합격해서 의사가 되는 것보다, 행복한 게 더 우선인 분.

그 우선순위가 정확하게 확인되는 문장이어서.

나는 울음을 뚝 그쳤다.


그 후로 담담하게 면접을 준비했고 또 시간이 어느새 흘러 최종 면접을 치렀다.


'결과는 하늘에 맡깁니다' 하며 마음속에 시원한 바람이 불던 그해 초겨울이었다.


Cabo da roca, 2019. / photographed by largo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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