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들과 싸우며 얻은 것.
1.
갈등이 두려워서 대화로 해결하기보다 그냥 내가 참고 말지, 하고 넘기는 사람. 그게 바로 나였다.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도 싫었고, 불편한 말을 하는 것도, 그 말을 듣는 것도 너무 싫었다. 왠지 불편한 말들이 오고가면 그 사이가 멀어질 것만 같아서. 하지만 그게 마냥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참기만 하면서 내 기분이 상할 때가 많았고, 더 이어질 수 있는 관계가 끊어진 적도 있었으며, 종종 누군가는 나를 바보 취급 하기도 했으니까.
돌이켜보니 나는 대화하는 방법을 잘 몰랐다. 두려움을 무릎쓰고 내 말을, 그것도 상대방의 기분이 나쁘지 않도록 잘 전달하는 건 언제나 나에게 어려운 과제였다. 그냥 대충 넘어가고 싶은데 역시 인생에 그런 법은 없지. 나는 그 과제를 런던에서 꼭 풀어야만했다.
바로 카페에서 일을 했기 때문이었다. 카페 일이 손에 다 익을 무렵, 이제 갓 스무살 조금 넘은 여자아이 A가 들어오면서부터 잊고 있던 그 과제는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A는 본인 입으로 자신을 '호랑이과'라고 말할 정도로 기가 셌다. (호랑이라니, 절레절레. 나는 양띠란 말이야...) 그녀의 자신만만함은 닮고 싶을 정도였지만 같이 일을 할 때면 그녀의 bossy(기가 센.)한 면은 종종 나를 피곤하게 했다. 짜증이 나고 화가 치밀어오를 때도 있었지만 나는 그저 꾹꾹 누르기만 했다. 늘 참는 게 편했으니까. 게다가 영어가 복병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는 것도 어려운데 이걸 영어로 다시 문장을 만들어서 말해야 했으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너무 화가 치밀어 올라 "야 네 일이나 잘 해!" 라고 말하고 싶어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한국말로 말하는 것도 어려운데 뭐야 이거 영어로 어떻게 말하는 거야... 말문은 그냥 막히고 마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짜증만 난 채로 집으로 돌아와 핸드폰으로 검색 엔진에 들어가본다.
'Mind your own business.'
아... 이거구만.
"Hey! You just mind your own business!"
노트에 써보고 여러번 중얼거리며 그 여자 호랑이 앞에서 당차게 말하는 상상을 해본다.
그러나 정작 그녀 앞에선 꿀먹은 벙어리가 되기 일쑤였다. '휴 일단 후퇴. 아니야 안돼. 말을 해야 해. 자꾸 가만히만 있으면 쟤가 날 가마니로 본단 말이야.' 나는 속으로만 이렇게 생각하며, 그 호랑이랑 같이 일하는 날마다 스트레스만 받기 일쑤였다.
2.
그러던 어느날, 그 마초같은 이탈리안 아저씨 매니저가 카페 일을 그만두었고, 폴란드 여자 B가 새로운 매니저로 왔다. B는 사려깊고 활기차며 프로페셔널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는 그녀 덕분에 나는 긴장을 풀고 더 즐겁게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B는 나와 같이 일을 할 때마다 자꾸 질문을 던졌다. 주로 시시콜콜한 일상부터 우리가 일하는 카페 얘기까지.
"도로시, 이건 어떻게 해야 좋을 것 같아?"
"아. 나는 파스타를 너무 좋아해. 도로시, 넌 주로 뭐 먹어?"
계속 입을 닫고만 있던 나는 B의 물음에 대답을 하면서 조금씩, 천천히, 영어가 늘었다. 그녀는 과연 프로였다. B는 조용히 일만 하는 내가 이 카페에서 더 재밌게 적응하길, 그래서 내가 더 자라나길 바랐던 것같다.
그 와중에 나는 A와 사이가 계속 불편했는데 어느날 B가 나를 따로 불렀다. '왜 부르는거지? A가 내 욕을 했나? 나 뭐 잘못한 거 있나?' 오만가지 생각을 하던 나와 달리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내게 물었다.
"도로시, A랑 일하면서 뭐 불편한 거 있어? 걔가 너에게 뭐 실수한 게 있는거야?"
"왜? 그건 왜물어?"
나는 당황했다.
"아니 그냥 내가 느끼기에 그래서 물어보는거야."
"음... 그런데 나는 좀 헷갈려. 뒤에서 이렇게 다른 팀원에 대해서 얘기하는 게 맞나 싶어서. 내 정서랑 안 맞기도 하고. 여튼 불편해."
"도로시, 내가 같이 일했던 한국인들도 그러더라. 물론 최선의 방법은 당사자들끼리 얘기하고 해결하는거야 무조건. 그런데 우리는 팀인거 알지? 팀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대화와 피드백이 중요해. 당사자와 해결이 좀 어려운 것 같으면 매니저인 나한테 말하는 건 괜찮아."
나는 그녀에게 툭 터놓고 말했다.
"실은 A가 너무 기가 쎄서 힘들어. 가끔 막 자기 방식대로 가르치려드는 것도 짜증이 났고. 그런데 나도 말로 표현해야하는 걸 요즘들어 깨닫고 있어. 걔가 나쁜 의도로 그러는 건 아닌 걸 아니까."
"응. 기가 좀 쎄지. 나도 알아. 그래, 네가 직접 A랑 대화를 해봐. 말을 해 도로시."
그래 말을 하자. 나는 A에게 솔직하게 얘기하기로 마음을 먹고 머리를 굴려가며 영어로 하고 싶은 말들을 문장으로 만들어내었다. 그런데 손을 먼저 내민 건 내가 아닌 그녀였다.
"도로시, 우리 관계가 조금 불편한 걸 느꼈어. 혹시 내가 너한테 실수한 게 있니? 편하게 말해줘."
"어?..."
이 호랑이같은 지지배... A의 멋진 태도 덕분에 나도 편하게 내 마음을 얘기할 수 있었다.
"실은 같은 일을 하지만 너의 방식이 있고 나의 방식이 따로 있잖아. 그런데 네가 계속 내가 하는 일을 참견하고 가르치려는 거 같아서 기분이 안좋았어. 나도 말하고 싶었는데 말하는 게 어려웠거든. 먼저 그렇게 물어봐줘서 고마워. 그리고 네가 나쁜 의도로 그런 게 아니라는 건 알아."
"그랬구나. 내가 성격이 좀 그런 부분이 있어. 안그래도 매니저가 그 부분에 대해서 피드백도 줬고. 나도 인지했으니까 앞으로는 조심할게!"
"혹시 나도 널 불편하게 한 게 있니?"
"아냐 없어. 그냥 같이 일하면서 뭔가 마음에 안든다면 참지 말고 말해줘."
우리의 대화는 거기서 깔끔하게 끝이 났고, 뒤끝이 전혀 없던 그 대화는 내 마음을 개운하게 했다. 아! 진작에 이렇게 말할 걸! 이렇게 말하는 거구나. 내 생각과 감정을 똑바로 표현했을 때 잘 받아들여지고 문제가 해결되기도 하는구나. 비로소 나는 '말하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정확하게는 나의 생각과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3.
그 후로 그 여자동료 A와 사이 좋게 일을 했냐. 천만에! 여전히 그녀가 나를 짜증나게 할 때가 종종 있었고, 그때마다 열받았다. 그러나 달라진 게 있다면, 바로바로 표현을 했다는 거. 이 문장이 맞는 건지 생각할 시간도 없이 맞든 안맞든 내 열받음을 영어로 주절주절. 그러다 영어가 전혀 안나오면 최대한 내가 너 때문에 기분이 지금 안좋다는 표정을 짓고 한국어로 당당하게 말을 했다.
"야 이건 네가 해. 왜 나를 시켜."
그러면 신기하게도 알아들었다. 그렇게 충돌이 있다가도 금세 풀고, 오늘 저녁은 뭘 먹을 거냐, 그때 만난 남자애랑은 잘되가냐 등등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 우리였다.
A와의 충돌 이외에도 다양한 때를 마주했다.
매니저와 혹은 동료와 근무시간을 조정해야할 때,
새로 들어온 신입에게 사수가 되어 일을 알려줘야 할 때,
매니저가 그 신입에 대해서 어떠냐고 물어볼 때,
태도가 너무 좋지 않은 동료에게 내가 피드백을 직접적으로 줘야할 때 등등.
그 시간들을 지나오면서 나는 조금씩, 천천히 달라졌다. 참기만 하던 나에서 또박또박 말을 하는 나로. 그런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더 마음에 들었던 건 바로 덤으로 얻게 된 영어! '네 일이나 잘 해' 를 검색해서 문장을 찾아보던 나는, 어느새 돌아보니 내 생각과 감정을 영어로 말하는 내가 되어 있었다. 문법적으로 엉터리이고, 더듬거릴 때도 많지만 자꾸 말하고 또 말하다보니 나의 영어는 계단을 타고 점점 올라갔던 것이다.
카페에서 일을 하지 않았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이 어려운 과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영어를 늘렸을까. 물론 다른 경험으로 얻을 수 있었겠지만 내가 몸 담았던 그 카페에서 이것들을 얻어서 너무나 감사하고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