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도 패션처럼 돌고 돈다니까?
1.
나의 영어 이름은 도로시. 바로 오즈의 마법사의 여주인공 도로시에서 따온 이름이다.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아주 어렸을 때 오즈의 마법사를 보고 그때부터 아무 생각 없이 영어 이름으로 도로시를 썼던 것 같다. 당연히 런던에서도 내 이름은 도로시였다. 아주 사랑스러운 영어 이름을 쓴다고 자부하며 지내다 어느 날 내 이름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풉. 야 이거 되게 옛날식 이름이야! 말하자면 미자, 영순 같은 느낌."
"아 진짜? 헐, 나 전혀 몰랐어."
옛날 이름이라니. 구식이라니... 촌스럽다는 거잖아! 친구의 말 한마디에 나는 그때부터 도로시라는 이름이 부끄러웠고 바꾸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이미 한발 늦었다. 은행이며 카페 계약서며 중요한 서류에 도로시라고 썼기 때문이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한국 이름 쓸 걸! 아니면 좀 더 세련된 영어 이름 사용할 걸! 그 후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물어볼 때마다 나는 머뭇거렸다. 창피했다.
'제발 내 영어 이름 물어보지 말아라' 아무리 속으로 외쳐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그건 바로 내가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이름이 불리는 카페에서 일을 하기 때문이었다.
"도로시! 스몰 사이즈 카푸치노 한 잔만 만들어줘!" 이런 식으로.
그리고 그곳에선 동료들만 내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니었다.
2.
바로 손님들 추가. 카페에 적응을 하고 나니 손님들은 나를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특히 단골 어르신들이 나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하셨다. 하긴 그들 눈에는 웬 키 작은 동양 여자아이가 갑자기 동네 카페에 와서 일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궁금하셨을까. 어디서 왔니. 학생이니. 아 그냥 일하는구나. 질문은 지나고 지나 결국 피할 수 없는 질문으로 넘어간다. 내 이름은 ㅇㅇ이야. 이름이 뭐니?
나는 도로시가 부끄러워서 일단은 한국 이름을 말했다. 그러면 다들 재차 되묻거나 어렵게 내 본명을 발음하려고 하셨고 나는 결국 창피함을 애써 감추며 그 말을 꺼냈다.
"영어 이름은 도로시예요. 그냥 도로시라고 부르시면 돼요." (실제로 도로시라고 말할 땐 목소리가 작았던 거 같기도 하고.)
어르신들이 풉 하고 웃을 줄 알았는데 웬걸, 반응은 내 예상과 달랐다.
"오! 도로시! 이거 조금 옛날 이름인데! 괜히 반갑다. 그런데 너랑 너무 잘 어울린다. 사랑스러워!"
비웃는 어조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그들은 진심이었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니 이해가 된다. 어떤 외국인이 한국 이름을 만들었는데 미자 혹은 춘식 이런 이름이면 나 같아도 그냥 귀엽고 사랑스러울 것 같다.
솔직히 내 영어 이름이 부끄럽다는 나의 말에 어떤 단골손님은 이렇게 말했다.
"도로시! 뭐가 부끄러워~ 아니 이름도 패션처럼 돌고 돈다니까? 너무 사랑스럽다. 오즈의 마법사의 그 여주인공 같잖아."
나는 두 눈이 동그레 져서는 그녀에게 답했다.
"어머 맞아! 나그래서 도로시 이름 쓰기 시작한 거거든!"
누군가가 내 마음을 알아주었을 때의 그 즐거움이란! 그 후로 나는 내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이게 다 한국인 여자 도로시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격려해준 그들 덕분이었다. 물론 나의 이 촌스러운 영어 이름을 듣고 풉 웃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더 이상 민망해하지 않았다.
"Oh, you use a 'Old-fashined name?" (옛날 이름 쓰시네요?)
"Yes. I quite like old-fashined things." (네, 제가 아날로그 한 걸 꽤 좋아해서요.)
그러면 상대는 아 그렇구나, 하고 그냥 받아들였다.
3.
그 도로시가 이제 좀 달라졌다. 이제는 모든 이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 나를 알아주는 이들이 있으니까. 나를 있는 그대로 좋아해 주는 사람들을 마주하며 나는 조금씩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나 스스로 나를 인정하려고 노력 중이다. (노력한다고 표현하는 건 아직도 연습 중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스럽다고 생각해서 쓰는 영어 이름이라면 누가 뭐라 해도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그 이름을 쓰는 것처럼. 이름뿐만 아니라 내가 선택한 모든 것들도.
나는 그렇게 가장 든든한 나의 1호 팬이 되어가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쓸 나의 영어 이름은 도로시이고 나는 내가 도로시인 게, 그 이름이 나와 잘 어울려서,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