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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나무 Oct 23. 2020

지독하다 지독해 런던겨울

영국은 언제 가면 좋을까요?  


1.

런던에서 살면서 비싼 물가 말고 어떤 게 또 힘들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한 가지 더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바로 겨울. 그 길고 어둡고 혹독한 계절.



가을이라는 계절이 쉬익, 지나가고 10월 말이 되면 그때부터 런던은 해가 하늘에 머무는 시간이 급속도로 짧아지기 시작한다. 그때부터다. 일기예보를 들여다보면 구름과 비가 잔뜩 보이기 시작하는 게. 트렌치코트에 브랙퍼스트 티, 구름이 가득한 흐릿한 영국 날씨를 상상한다면 바로 그거다. 한두 번이어야 운치 있다고 좋아하지 문제는 그런 날이 계속 이어진다는 거다. 어떤 흐린 날엔 정말 공기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져서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도 있다. 그리고 날씨의 변덕은 또 왜 그리 심한지. 해가 떴다가 금세 흐려지고, 갑자기 비가 내렸다가 다시 해가 뜨고. 하도 겪어서 나중엔 그 변화무쌍한 날씨가 그러려니 해질 정도였다.




그나마 연말까지는 괜찮다. 유럽은 크리스마스가 큰 명절이라서 12월까지 곳곳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해놓는데 그 따뜻한 분위기가 잠시 사람들을 속이기 때문이다. 겨울 괜찮아, 아늑하고 예쁘잖아 하고. 속이다는 표현이 정말 맞는 게 새해가 넘어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장식들이 사라지고 거리의 분위기는 휑해진다. 그리고 해의 길이는 더 급속도로 짧아지는데 어떤 날엔 해 뜨는 시간 내내 일을 해서 하루 종일 햇빛을 못 본 적도 있었다.  


일주일 내내 흐리고 어둡다 갑자기 해가 뜨면 어떨까? 런던의 겨울은 종종 그랬다. 그런 날이면 나도 모르게 하던 행동을 멈추고 눈을 감는다. 그리고 고개를 하늘로 치켜올려 햇빛을 듬뿍 흡수한다. 그 순간만큼 나는 햇빛이 간절한 식물인 것처럼.


'아... 해다.' 잠시 내게 비추는 그 빛은 꼭 목마를 때 마시는 물과 같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지, 비. 런던에 갓 도착했던 여름날에는 전혀 비가 내리지 않아서 놀랐다. 분명 비가 많이 내린다고 했는데. 계절을 보내며 깨달았다. 여름을 제외하고 비가 내리는 거였다! 하여튼 겨울 시즌의 비. 그것은 지극히 일상의 일부와 같았다. 토닥토닥 내내 보슬비가 내리지만 우산을 쓴 사람들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나 역시도 어느 순간 우산을 들고 다니지 않게 되었다. 출퇴근 복장으로 늘 입고 다닌 패딩에 달려있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조금 빠르게 걸을 뿐. 사람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한다는 건 이런 걸까.



런던에서 처음 겪었던 그해 겨울은 놀랄 만큼 어두웠고 눅눅해서 나를 누르고 또 눌렀다. 하필 친구들이 왔다가 떠난 후에 겨울이 찾아와서 더 그랬다. 우울하고 외롭고 때때로 사무치게 한국이 그립고. 겨울이 완벽하게 끝이 날 때까지 나는 앓고 또 앓았다. 외로운 건지 향수병인 건지 그냥 긴 슬럼프인 건지. 이걸 뭐라 정의해야 할지도 모른 채 그냥 속수무책으로.


잠시 휴가를 내서 여행을 가면 괜찮을까? 싶어서 잠깐의 여행을 가기도 했지만 어쩐지 마음의 환기도 잠시 뿐, 여행 후에도 나는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2.

계절이 지나간다는 게 런던에서 얼마나 위안이 되던지. 겨울이 너무나 혹독했는지 해가 조금씩 길어지는 그 미세한 움직임도 바로 느껴졌던 초봄. 겨울이 점점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고 변덕스러웠던 날씨도 점점 드물어지면 어느새 본격적으로 해가 쨍! 하고 뜨기 시작한다. 내 기억엔 5월이었다. 반짝반짝 햇빛이 거리에 비추니 거짓말처럼 평소에 걷던 그 거리가 예뻐 보였다.

 

'뭐야, 런던 왜 갑자기 예뻐진대?'

반갑게 인사하는 햇빛에 눅눅했던 내 마음도 바삭하게 말랐고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이 가벼워졌다. 내가 이렇게 계절에 민감했나 싶을 만큼 놀랬는데 이건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안녕! 달링~ 날씨가 너무 좋지 않니?!"


그 쯤에 손님들의 목소리 톤도 살짝 높아졌고, 얼굴들이 한층 더 밝아 보였다. 그러니까 모두가 햇빛을 반가워하는 것이었다!


"어우 나 이상하게 내내 피곤했는데 몸이 개운하지 뭐야. 이게 다 해 때문이라니까."


단골손님의 한 마디에 나는 단번에 깨달았다. 나의 슬럼프를 물고 늘어지게 한 게 무엇이었는지. 잠깐 앓다가 일어날 수 있는 건데 몇 달씩이나 내 안의 감정 기복과 씨름했던 게 무엇 때문이었는지. 우울도, 향수병도.


이게 다 해 때문이었다.





3.

겨울을 힘들게 보내고 나니, 나는 어느새 여름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분명 나는 더위에 약해서 여름이라면 질색팔색 했는데, 런던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여름이 막 시작될 쯤이면 그때부터 발을 동동 구른다. 아 런던의 여름! 빨리 가지 말아라! 옷을 가볍게 입고 쨍한 햇빛 때문에 늘 선글라스를 끼고 걷고 또 걸었던 여름. 한 손엔 맥주를 들고 납작 복숭아를 먹고 종종 수국을 샀던 여름. 더위쯤이야 수영으로 날려버렸던 여름. 퇴근을 하고 밤 9시가 지나도 여전히 밝아 괜히 집에 들어가기 싫었던, 찬란한 런던의 여름. 여름엔 하루하루가 지나가는 게 아쉬웠다.  


맨 처음 런던에 왔을 때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몇몇은 웃통을 벗고 거리를 돌아다녔고, 어떤 이들은 공원에서 매트도 깔지 않고 자유롭게 누워있던 그 장면들. 어머 왜 저기서 저렇게 누워있는 거야. 이해가지 않았던 그 장면들은 혹독한 겨울이 지난 후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저들은 온몸으로 여름을 누리는 거였다!


사람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한다는 게 이런 걸까.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나도 여름의 어느 날, 공원에서 자연스럽게 누워 있곤 했다. 마치 혹독한 겨울을 대비해 부족한 햇빛을 미리 비축하듯.


People in the park, 2018



영국을 언제 가는 게 좋을까요? 하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다음에 영국을 여행하게 된다면 꼭, 부디 꼭, 1월부터 4월까지는 피할 수 있으면 피하길. 그리고 정말 되도록이면 여름에 가길, 아니면 크리스마스 시즌에 가길. 여름이라면 그냥 마구 행복할 거고 크리스마스 시즌이라면 분위기 때문에 더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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