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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박하 Nov 20. 2019

감정은 보라, 감정을 보라

손 끝에서 번지는 붉고 푸른 보라색.






 들여다보면 깊은 우울처럼 잠겨 있는 보라색. 너는 그런 눈을 가지고 있었다. 오래 볼 수가 없었다. 손을 뻗으면 피멍처럼 물들어 버릴 것 같았다. 섣불리 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알고 싶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말해봤자였다.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감정이 있었고, 누구에게도 꺼내 놓을 수 없는 비밀이 있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모두 한 개씩 가슴에 안고 산다. 꺼낼 때마다 손바닥을 찌르는 아픔을 머금고 산다. 그런 보라를 감당하며 살아야 한다.



 어릴 적부터 좋아해 온 색은 우울한 색이라고 그랬다. 좋아해서 우울했다. 우울해서 좋아했다. 누군가에게 닮아 온 감정처럼 품고 살았다. 옮겨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보고 배워서 우울을 삼킨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울은 그렇게 전염처럼 번진다. 나도 모르는 사이 물드는 보라. 깊은 보라. 군청색 그리고 붉은색을 휘섞어 만든 탁하고 어두운 보라색에 발목이 빠진 채로 질척거리며 걸었다. 누구든 그런 우울을 한 번씩은 경험한다. 누군가는 금방 털고 나와서 맑은 물로 발목을 씻어내지만 영영 색이 배이고 피부에 물들어 어딘가에 굳게 묶여 있던 것처럼 검푸르고 붉은 발목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발목으로 기어이 걸어야 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씻어낼 겨를 없이, 서툴게 걸음을 옮겨야 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휘휘 섞으면 붉고 푸르다.


 변질된 색. 혹은 왕좌의 색. 가장 높게 올라갔다가 가장 낮게 처박히는 색. 붉음과 푸름, 전혀 다른 두 가지를 섞었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색. 눈물과 피를 섞었을 때 나타나는 보라색, 보라색. 상처받은 색. 주먹만한 울음을 눈가에 매달고 너는 물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해?


 남들은 다 괜찮아 보이는데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해?


 좁아터진 방에서, 겨우 발을 뻗으면 저쪽 벽에 머리가 닿고 이쪽 벽에 발이 닿는 좁아터진 방에서 모로 누운 채로 울었다. 베개를 다 적셔가면서. 젖은 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면서 흠뻑 적셨다. 울면서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했다. 이런 게 삶일까. 정말 이런 게 내게 주어진 삶이라는 걸까. 산다는 건 다 이런 걸까. 왜 나는 이렇게 살고 있는 걸까. 다들 이렇게 살고 있는 걸까. 다들 이런 삶을 견뎌내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왜 나는 견뎌내지 못하는 걸까. 남들이 다 견뎌내고 있는 걸 왜 나는 견디지 못하는 걸까. 나는 약한 걸까. 왜 나는 약하게 태어났을까. 걷잡을 수 없는 우울에 잠기면서. 걷잡을 수 없는 생각에 짓눌리면서. 나는 왜. 왜. 대답도 없는 물음을 자꾸만 던져가면서. 아무도 대답해 줄 수 없는 물음을 허공에 던지면 그대로 떨어져 다시 나에게 처박혔다. 질척질척했다. 눅눅했다. 그리고 끈적했다.


 떨어진 그대로 움푹 움푹 패이는 마음이 찰흙 덩어리 같았다. 말랑했고, 누르는 대로 자국이 남았다. 선명했다. 지문까지 보일 것 같았다. 소용돌이 치는 문양이 마음 같았다. 누구나 마음속에 보라색 소용돌이를 가지고 산다. 지문처럼 찍고 산다. 낙인처럼 찍힌다. 그 소용돌이에 휩쓸리는 나는 약하다. 연하고, 약하다. 연약한 무언가가 갈기갈기 찢겨서 원래대로 돌아올 수 없는 모양을 보고 맞출 수 없는 퍼즐을 맞추는 것 같다.


 답이 없는 문제를 풀고 대답이 없는 질문을 던지고 완성될 수 없는 퍼즐을 맞추고.


 그런 것도 삶이야?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또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아무 말도 못할 것이다. 이런 것도 삶이야? 스스로에게 수없이 물었던 질문을 다른 누군가에게 물었을 때,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이런 게 삶일까? 끊임없는 물음 속에서. 보라는 자꾸만 번지고. 붉고 푸른 가장자리에서 모든 것은 섞이고 얽혀서 하나가 되는데 왜 나는 혼자일까 생각했다.


 스스로 껴안으면 팔이 저렸다. 손끝에서 번지는 보라. 온통 보라. 웅크린 보라. 아름다운 보랏빛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찬란히 빛나는 보라색으로 아름다웠지만 그건 나의 것이 아니었다. 타인의 보라를 탐내면서 나는 왜 나의 삶은 이런 것인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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