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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아론 Jun 25. 2019

내게 가장 건강한 마음

가장 건강한 마음이란 쉽게 상처받는 마음이다



“입을 옷이 없어.” “아, 오늘 왜 이렇게 입을 옷이 없지?”세상 모든 옷장 앞에서 매일 아침 들려오는 익숙한 말에 정신을 차리게 된 건 초봄의 어느 오후였다. 창 밖으로 봄이 올까 말까 고민하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날이 좋았다. 겨울이 끝나가는구나. 약속도 없지만 이런 날에는 마음에 드는 옷을 입고 카페라도 나가야한다. 나와의 데이트. 그런 낯간지러운 단어도 근사하게 들릴 수 있는 날씨는 쉽게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옷장을 여니 정말로 입을 게 없었다. 새 옷을 입고 싶은 것도, 멋지게 차려입고 싶은 것도 아닌데. 이 날씨, 이 기분에 맞는 옷이 하나도 없어!? 급기야 옷장 속에 입을 만한 옷들을 바닥에 주욱 늘어놓았다. 그 순간 문제를 깨달았다.


검은색, 검은색, 회색, 검은색, 남색, 검은색, 회색…. 칙칙하고 어두운 무채색의 향연이였다. 내가 어두운 색을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색색의 화려한 꽃무늬 원피스, 빨간색의 땡땡이 블라우스, 샛노란 니트. 분명 그런 옷들을 입은 적도 있는데? (나중에 계산해보니 거의 2년 반 전 일이었다.) 


입고 나가면 마치 봄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사람처럼 보일 듯한 어두운 옷들에 뱅 둘러싸여 주저앉은 채로, 그 옷들을 매일 입고 나갔던 일년 여전의 나를 떠올렸다. 미팅할 때 어른스러워보일 것, 무난해서 남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을 것, 연약해보이거나 만만해보이지 않을 것…. 그런 기준을 따라 옷을 고르고, 입던 날들. 그건 내가 좋아하는 옷이 아니었다. 


그시절의 나는 왜, 카멜레온처럼 눈에 띄지 않는 보호색이 필요했던 것일까. 아마도 위험하다고 느꼈기 떄문인 것 같다. 나이가 먹을수록 회사 안에서의 관계는 복잡해지고, 완벽한 해결이란 있을 수 없는 미묘한 트러블들이 곳곳에 남아있는 게 느껴졌다. 사람들은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기도 하고, 가까웠다 멀어지기도 하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었다 와해시키기도 했다. 여럿이 모여 일을 하다보면 자연스레 겪을 만한 환경의 변화지만, 그런 매일 속에서 사람이 사람을 상처입히는 것을 목격해야했다. 당연히 그 피해자가 내가 되는 날도 있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하려 항상 노력했고,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받아들였다고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특히 사람들이 하는 말들, 그 문장들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내게 하는 말이 아니라도 그랬다.“OO이는 멘탈이 약해서 안돼.” “OO이는 조금만 뭐라해도 금방 상처입고, 애가 예민해서 좀 그렇지 않아?” "OO이가 일은 잘하지. 근데 단단하지를 못해, 다혈질이고 잘 흥분하고…."


사람들은 쉽게 타인을 ‘후려쳤다’. 처음엔 당사자가 아닌 내가 나서서 반박하기에는 우스운 꼴이라 입을 다물었다. 그 다음엔? 그런 말들이 반복되자 점점 ‘나는 저런 말을 듣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강해져야 한다고, 상처받으면 안 된다고, 지치지 않아야 하고 단단해져야 한다고. 그걸 위해 내 안의 어떤 면을 무디게 만들려고 발버둥치는 날들이 있었다. 그때는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약하고, 여리고, 쉽게 상처받고, 흔들리는 건 내 잘못이라고 믿었으니까.


“가장 건강한 마음이란 쉽게 상처받는 마음이다. 세상의 기쁨과 고통에 민감할 때, 우리는 가장 건강하다. 때로는 즐거운 마음으로 조간신문을 펼쳤다가도 우리는 슬픔을 느낀다. 물론 마음이 약해졌을 때다. 하지만 그 약한 마음을 통해 우리는 서로 하나가 된다. 자신은 지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약한 것들은 서로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여리고, 쉽게 상처 받고, 금방 지치는 사람이다. 다행히도 원래 우리는 모두 그렇게 태어났다.” 


김연수 작가의 에세이집 <지지않는다는 말> 중 한 구절이다. 회사를 나오고 반 년쯤 지난 뒤에야 당시 내 마음이 건강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억지로 강해지려 하는 마음’, ‘상처받지 않은 척 하는 태도’들로 뒤틀린 나는 똑같은 방식으로 스스로와 타인을 상처입힐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갔다. 김연수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자신은 지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기 위해 마음의 문을 열었을 때 쏟아져들어올 것들이 두려워서, 그 문을 꽁꽁 잠궈두는 쪽을 택하는 사람. 누구나 주변에 그런 사람 한두명쯤은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자기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상처받지 않으려고, 순간적으로 방어적이 될 수 있다. 그건 일종의 보호 본능이니까. 하지만 그것이 습관이 되고 태도로 굳어지면서 조금씩 망가져간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그만두게 되고, 타인의 아픔을 약함으로 치부해버리고, 지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마음까지 못본 척 하게 된다. 자기 자신의 강함을 지키기 위해 제대로 듣지도 대화하지도 않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김연수 작가의 말대로 원래 우리는 모두 ‘여리고, 쉽게 상처 받고, 금방 지치는 사람’으로 태어났는데도.


회사 일에 한참 몰두할 때는 가급적 슬픈 이야기들을 듣지 않으려 했었다. 뉴스 속의 가슴 아픈 이야기들, 후배들의 지치고 힘들어하는 목소리들, 심할 때는 마음을 일렁이게 하는 다양성 영화도 보지 않았다. 그런 것들에 무너지면 일할 때 집중도 안되고, 일상 생활이 버거워진다는 변명을 해가면서. 하지만 그렇게 살아갔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누군가 사회적으로 피해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꺼내면 “그런 얘기는 뭐하러 하냐”고 핀잔을 주고, 일상에 지쳐 자신의 마음을 터놓는 사람에게 “그런 약한 소리 하지 말라”며 “원래 다 그렇게 사는 거”라고 충고하는 어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지난 날의 나를 반면교사 삼아, 나는 더이상 ‘억지로 나의 강함을 지키려는 사람’이 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자기 방어를 방패삼아 다른 사람을 밀치고 넘어트려서 상처입히지 않도록 노력하기로 했다. 쉬운 일이 아닐지 몰라도, 끝까지 쉽게 상처받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고. 그런 요상한(?) 바람을 가지게 되었다. 언제나 일상은 예상보다 더 거칠고, 언젠가 또 맹수인 척 어금니를 드러내야 하는 날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든 내가 가진 가장 여린 자리로 금세 돌아올 수 있을 만큼만, 딱 그만큼만 건강하게 단단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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