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생의 한 시점에서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었다.
얼마 전 친구와 술을 마시며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친구가 외롭다는 말을 했다. “그거, 방금 내가 하려던 말이었어.” 내가 대답하자 친구가 깔깔대며 웃었다.
외롭다고 생각했다. 열세 살 때도, 열여덟 살 때도, 스물두 살 때도. 그리고 점점 더 외로워지고 있다는 걸, 머리로도 마음으로도 깨닫고 있다. 십 대 때는 좋든 싫든 강제로 한 반에 묶여 있던 아이들, 거기를 벗어나도 어쨌거나 비슷한 환경에 처해 있는 친구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아무나 잡고 고민을 털어놓아도, 대충 다 알아듣고 공감했다. 공부가 힘들고 담임이 싫고 꿈은 없고 놀고 싶고…. 그다지 넓지 않은 삶의 영역 안에 있는, 뭐 그런 얘기들이었으니까.
이십 대 초중반에는 아주 똑같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별나지도 않은 경계에 모두가 걸쳐 있었다. 졸업이나 연애 혹은 취업처럼, 상황은 조금씩 다르지만 설명만 잘하면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문제없는 정도랄까. 전공은 달라도 누구나 시험 기간에 과제가 겹쳐서 팍팍했고, 연애는 늘 개판이었고, 취업 준비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부족하긴 마찬가지였으므로.
하지만 소속된 사회의 경계가 점점 희미해지는 이십 대 중후반 시절을 지나며, 우리는 각자의 사정을 견고히 해 나아갔다. 강제로 주어졌다고 생각했던 가정환경뿐만 아니라, 운과 실수로 주어졌던 수많은 경험들. 우리가 거쳐 갔고 우리를 거쳐 갔던 사랑의 상대들. 그리고 그들이 남긴, 아주 오래갈 흔적들. 타고난 감각과 사소한 이유들로 형성된 취향과 그걸 망가뜨리기도 발전시키기도 했던 경제적 사회적 환경들….
그런 것들이 착실하게 쌓여가며 자기만의 사연과 사정이 있는 사람이 되어간다. 다행히도 가끔은 그 벽을 허물게 되는 일이 생기는데, 그건 주로 연애였다. 타인이었던 사람을 내 삶에 들여놓으려 하고, 나 또한 상대의 삶 속에 들어가려 애쓰는 달콤한 날들. 서로의 취향과 생각에 대해 공유하고, 스킨십을 하고, 함께 시간을 보낼 때, 마치 두 사람이 하나의 존재처럼 느껴져서 외로움을 잊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낭만적 순간들이 연애의 전부는 아니었다. 오래토록 함께 지낼 동반자로서, 서로가 다른 사람임을 인정하는 과정 또한 꼭 필요했다.
그렇게 서른을 넘어서며 깨달았다. 우리는 점점 하나의 섬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아니므로, 누구도 나와 똑같이 살아오지 않았다. 내가 아니므로, 누구도 나와 똑같이 느껴오지 않았다. 내가 아니므로, 누구도 나를 완벽하게 이해해줄 수 없다. 누구도 나의 전부를 받아들일 수 없다. 나도 나를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나이 들수록 점점 더 외로워지고 있다. 언젠가부터 그 사실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가끔 주변을 둘러보며, 그곳에서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의 외로움을 헤아려보기도 했다. 나 또한 그렇게 외로워질 것이다. 같은 또래들과 공유했던 시대감각은 점점 흐려질 것이고, 인간관계든 사회관계든 모든 거미줄들이 느슨해지거나 이익을 따지게 될 것이다.
결혼 후엔 사회가 연애를 허락하지 않을 테고, 설사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더라도 상처주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몸을 사려야 할 것이다. 게다가 각자의 가정은 그 안에서 질서와 이해관계가 생기기 마련이다(그것이 설사 1인이라 하더라도). 그게 때때로 우리를 고립시키리란 예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유 없이 시간을 내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서로가 가진 외로움의 컴컴한 구멍을 같이 들여다봐줄 존재들이. 끝끝내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커질 이 절망적인 어둠을, 낄낄대고 웃으면서 혹은 궁상맞게 투덜대면서 함께 바라볼 수 있는 사람. 가끔은 서로의 눈을 가려주기도 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아니 꼭 그런 이름이 아니라도.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라는 단편집이 있다. 그 중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라는 소설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다. “이십 대 초반에 엄마는 삶의 어느 지점에서든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만난 인연들처럼 솔직하고 정직하게 대할 수 있는 얼굴들이 아직도 엄마의 인생에 많이 남아 있으리라고 막연하게 기대했다. 하지만 어떤 인연도 잃어버린 인연을 대체해줄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의외로 생의 초반에 나타났다. 어느 시점이 되니 어린 시절에는 비교적 쉽게 진입할 수 있었던 관계의 첫 장조차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이 생의 한 시점에서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었다.”
마치 내 이야기 같아서 눈물이 핑 돌았다. 잃어버린 인연들과 잃어가고 있는 것 같은 나의 소중한 사람들이 차례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들의 자리가 영영 채워지지 않은 채로 살아야 한다면 어떨까. 상상하자 외로움이 밀려와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인간과 인간이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 그 ‘함께’가 인생에 있어 얼마나 귀중하고 따스한 것인지.
어쩌면 함께라는 건 사소하고 별 의미 없는 일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 종영한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가 “마흔이 넘어서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친구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자기 자신의 취향에 귀 기울이고 영혼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는 그의 마지막 말에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지만, 그렇게 살 순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친구들과 대화하며, 죽으면 없어져버릴 나란 사람의 역사를 공유하는 순간이 좋다. 거대한 우주의 먼지만도 못 한 존재들이라지만 내 인생에 친구들의 이야기가 스며들어서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게 즐겁다. 고작 그런 걸로 외로움을 영영 피할 순 없단 걸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외로움을 지켜봐주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안다. 나이가 들고 그런 만큼 점점 더 외로워질수록, 그 순간들은 더더욱 귀해질 것이다. 그리고 훗날 내가 있는 공간에서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자 가장 외로운 사람이 되었을 때, 동시에 외로움을 함께 나눌 사람도 가장 많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게 지금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다.
Illustrator 키미앤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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