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에게, 토닥토닥하는 마음의 손길을 보내는 법
내게는 무언가에 지쳐있을 때 가장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엄마집이다.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7살 무렵 이사한 후, 기억할 수 있는 대부분의 날들을 보낸 인천의 어느 작은 동네. 이제는 아빠가 돌아가셔서 엄마 혼자 살고 있는 그 곳의 이름은 언젠가부터 ‘엄마집’이 되었다. 벌써 몇주째 엄마집에 못 갔네. 아, 엄마집 가고싶다. 그렇게 말하다보면 그 단어는 ‘엄마의 집’이라는 뜻이라기 보다는 ‘엄마=집’이라는 의미로 들린다. 언제든 내가 돌아가고 싶은 두 단어를 합쳐둔, 세상 제일 그리운 말.
사람 사이에서 상처를 받았거나 무엇 하나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같아 무기력해질 때, 나는 엄마집을 찾는다. 나와 내 가족의 모든 것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그 공간 안에서,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깨서 또 엄마가 준비해둔 간식을 먹는다. 집에서는 켜지도 않는 티비를 종일 틀어놓고 가만히 누워있으면 어느새 엄마가 곁에 와서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러면 스르륵 졸음이 밀려오고, 그런 단순한 일상 속에서 어느새 마음이 말랑말랑 따뜻해져가는 것이다.
그날도 그런 날들 중 하나였다. 엄마와 늘어지는 주말 오후를 보내며 함께 볼 영화를 골랐다. 우리가 선택한 건 <리틀 포레스트>. 20대가 되면서 시골에서 홀로 서울로 상경한 혜원(김태리)이 취업도 연애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고단한 삶에 지쳐서, 엄마도 떠난 시골의 고향집에 조용히 돌아오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오랫동안 방치된 집이지만 구들장에 불을 때고 부엌의 먼지를 털어내면서 사람의 손길이 닿기 시작한 공간에는 온기가 돈다. 그래, 집은 저래서 집이지.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는 특별한 사건이나 반전 없이, 묵묵히 지속되는 혜원의 일상이 비춰진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직접 키운 작물들로 손수 만드는 단정한 음식들이 있다. 배추전, 밤조림, 감자빵….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화면의 아름다움도 영화의 내용도 아니였다. 어떤 장면에서 내뱉은 엄마의 말이었다. 집에 도착한 다음날, 혜원은 곳곳에 쌓인 눈을 치우기 위해 나선다. 그 전에 찬장에 남겨진 밀가루에 물을 붓고 반죽을 한다. 수제비를 만들려 하는 것이다. “날이 추우면 수제비가 먹고 싶어진다. 반죽을 해서 두시간 정도 재워놔야 하기 때문에, 눈을 치울 때 딱 알맞다.” 동그란 수제비 반죽에 면보를 덮어 숙성을 시킨 후, 비장한 표정으로 눈을 치우기 시작하는 혜원. 춥고, 힘에 부치고, 해도해도 끝이 없는 눈 치우기 속에 빨개진 코를 한 혜원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빨간 국물에 수제비를 끓인다. “몸이 꽁꽁 얼었을 때 수제비를 한 입 먹으면” 하고 후루룩 후후룩 먹어치우는 혜원의 얼굴에 웃음기가 돈다.
그 장면을 보며 엄마는 “저거 참 좋지” 했다. 추운 날에 수제비를 먹는 게 좋다는 말인 줄 알고 “우리도 수제비 해먹을까?” 했는데 돌아온 답은 엉뚱했다. “아니, 그거 말고. 저렇게 힘든 일 뒤에 뭔가를 준비해두는 거 말야. 내가 기분 좋아질 수 있는 걸로.” 아…. 그제야 생각나는 것들이 있었다. 아빠와 많은 대화를 했던 엄마는,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부터 자기 자신의 마음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했다. 열심히 일을 하고 퇴근을 한 후에도 엄마에게는 너무 많은 시간이 남았다. 그러자 엄마는 이제까지 배우고 싶었던 것들을 배우기 시작했다. 첫번째는 합창이였다. 박치 음치라고 가족들에게 놀림(?)받았지만 매주 합창 연습에 빠지지 않고 참석한 엄마의 실력 향상은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아침에 일어나보면 엄마가 혼자 반주곡을 틀어놓고 연습한 합창 녹음 파일이 가족 단톡방에 올라와있곤 했다.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에 답답했던 날에도 합창을 하고 오면 머릿속이 환기가 되어 한결 가벼워진다고 했다. 퇴근 후에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을 준비해둔 것이다.
그 다음은 사진이었다. 두 딸이 번갈아가면서 엄마의 주말을 챙기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그래도 백퍼센트 일 수는 없었다. 엄마는 말했다. 혼자 주말을 보내고 나면 이틀 내내 입 밖으로 아무 말도 꺼내지 않을 때도 생기곤 해. 그러더니 어느 날 근처 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사진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어떤 주말에는 출사를 가느라 우리와의 약속을 미루기도 했다. 힘든 평일 뒤에 즐거움을, 두 딸에게 좌지우지되는 즐거움이 아니라 ‘스스로 가질 수 있는 즐거움’을 찾아낸 것이다.
함께 영화를 보고 몇 주 후, 엄마는 혼자 병원에 다녀왔다. 무릎 연골이 걱정되어 ‘연골 주사’를 맞고 왔다고 했다. 그 주사를 맞고 온 날이면 엄마의 무릎이 퉁퉁 부어서 통증이 심하고 움직이기 힘드시다는 것을, 엄마도 나와 내 동생도 일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걱정하는 우리의 메시지가 카톡창으로 후두둑 쏟아지자 엄마가 답했다. [오늘 그리고 지금 난 내가 맘에 들어. 후후. 무릎은 구부릴 수 없을 정도로 퉁퉁 부어 있는데도- 나가기 전에 커피 기계 물도 채워두고 알커피도 높이를 맞춰 두었지. 다론이가 사준 수제 초콜렛도 꺼내놓고 꽃 핀 화분도 침대 가까이 두었어. 내 행복은 내가 챙겨야지.]
커피(엄마는 항상 커피 캡슐을 알커피라고 부른다), 초콜렛, 꽃... 좋아하는 것들을 병원 가기 전 미리 준비해뒀을 엄마의 모습을 생각하니 어쩔 수 없이 눈물이 났다. 평소와 다르게 메시지가 장문이라는 것도 엄마가 스스로를 열심히 토닥토닥 하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했다. 울먹울먹 하면서도 나는 언제 엄마처럼 될 수 있을까, 될 수는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생에 힘들고 지치는 순간들을 모두 피할 순 없고, 마주해야할 때가 분명 온다. 그럴 때 ‘미래의 나’를 위해 지금의 내가 작은 즐거움을 준비해둘 수 있다면, 그렇게 스스로에게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다가오는 캄캄한 날들이 조금은 덜 무섭게 느껴질 것 같다. 아직은 서툴지만 오늘부터 연습해봐야겠다. 내가 나에게, 토닥토닥하는 마음의 손길을 보내는 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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