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부지런히 걷는 이유
빵을 사와야 해서 가벼운 에코백을 들고 집을 나섰다. 큰 길 횡단보도만 건너면 빵집이지만 빵집을 지나쳐 도서관이 있는 길로 들어섰다. 이 길은 벚꽃길인데 한창 시즌에 벚꽃이 가득피어 어디 대단한 명소에 가지 않아도 이곳에서 꽃을 보면, 아 올해 벚꽃 다 봤으니 되었다, 싶은 마음이 들 정도이다. 지금은 꽃이 모두 지고 푸른 잎이 났는데 이제 곧 열매를 맺을테고, 푸른 잎이 가득한 길 역시 근사하다. 이 길의 하이트는 길 끝 무렵에 어떤 분이 조성해 놓은 화단인데, 다양한 꽂과 화분이 가득해서 계절마다 보는 재미가 있다. 이 많은 꽃을 어떻게 이렇게 잘 관리하시는지... 지금은 문을 닫은 수영장에 다닐 때 항상 이 길을 지나쳤는데, 수영 끝나고 돌아오는 길이면 항상 두건을 쓴 아저씨가 꽃밭을 가꾸고 계셨다. 그 분 덕분에 오늘도 꽃을 잔뜩 보고 왔다.
걷는 것이 부담이 전혀 없는 계절. 바로 지금이다. 그래서 더 부지런히 걸어야 한다. 바깥에 나가서 꽃을 보고 햇살을 느끼고 무심결에 훅 들어오는 꽃 향기에 걷던 걸음을 멈춰야 한다. 라일락이 곳곳에 피었고, 황매화, 죽단화, 모란, 금낭화...정말 셀 수 없이 다채로운 꽃들이 거리에 널렸다. 이웃집 담장 너머에 핀 모란을 볼 수 있고, 담장 바깥으로 내다놓은 상추가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숲에 가면 여름 철새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되지빠귀 울음소리를 얼마 전에 들었다. 두두두두 딱따구리의 드러밍 소리도 자주 들을 수 있다. 숲을 한창 걷고 빠져나오는 길에 무심코 고개를 들었는데 처음보는 파란 빛깔의 새가 있어서 보니 큰유리새였다. 물가가 있는 곳에 가면 아마 해오라기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정말이지 두근거림의 연속이다.
한겨울에 누군가의 유튜브를 보고 한양도성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면 나도 저 곳을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한참을 잊고 지내다가 지난 주에 갑자기 떠올랐다. 코스를 살펴보고 혼자서 가기 편한 곳부터 시작했다. 혜화에서 시작해서 흥인지문에서 끝이 나는 낙산코스였는데 아무 정보 없이 갔는데 걷는 내내 너무나 좋았다. 바람이 몹시 세차게 불었지만 오르막인 곳에서는 땀이 나서 외투를 벗고 걸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은 벅찬 느낌이 들 정도로 멋졌다.
구름없이 깨끗한 하늘, 맑은 공기, 적당히 선선한 날씨, 그늘 많은 경로. 와...서울에 이렇게 걷기 좋은 길이 있는데 나는 여태 몰랐네. 성곽길을 걸어본 것이 처음이었는데, 그 길에서 정말 많은 외국인을 만났다. 이들은 서울을 제대로 걷는구나 싶었다. 나는 지금껏 몰랐던 서울 말이다.
'폭싹 속았수다' 드라마에서 금명이의 자취집 동네를 찾아가던 영범이 금명에게 '너는 서울을 잘 모른다'라고 했더니 금명이 그에게 다시 '서울을 모르는 건 너지'라고 얘기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평생을 서울에 산 나, N십년을 서울에서 지냈는데 나는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구나 싶었다.
이 계절은 큰 준비물이 필요하지 않아서 더 좋다. 나는 손수건과 물 한병이면 된다. 햇살이 강렬하지 않으니 모자를 쓸 필요도, 선크림을 덧바를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벌레나 날파리가 거의 없는 (정말 짧은) 계절이라 벌레퇴치에 필요한 어떤 것도 필요 없었다. 그저 편안한 옷차림에 신발과 배낭, 물과 손수건, 그리고 맘이 내킬 때 앉아서 읽을 수 있는 책 한 권이면 충분했다.
작년에는 봄도 너무 빨리 오고 여름도 너무 빨리 온 것 같아서 조급했는데, 올해는 봄이 조금 긴 것 같아 다행이다. 물론 여전히 부지런히 즐기고 싶어서 마음이 조급하지만 여전히 외투를 입을 수 있는 날씨가 이어지니 어쩐지 든든한 마음이 든다. 더워서 바깥에 나가기 싫은 마음이 들기 전에 더 많이 걷고 움직여야지. 이 계절을 200% 즐겨야지. 햇살을 잔뜩 받고 밤에 잠도 잘 자야지. 내일도 걸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