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May 14. 2022

스승의 날이 뭣이 중헌디!

스승이라고 불릴 자들을 찾아 헤매다 지쳐 쓰러지다.

                          1.


중간고사가 끝나고 성적에 목숨 거는, 자기가 똑똑하다고 착각하는 여학생이 따지듯 물었다.


“왜 교수님이 가르쳐주지 않으신 부분에서 문제를 내신 거죠?”


당차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상대를 잘못 골랐다. 내가 물었다.


“정말로?”


여학생은 눈도 깜짝이지 않고 누가 보면 대드는 것이라고 오해할 정도로 파란 눈을 반짝이며 자신이 승기라도 잡은 줄 착각하며 다시 말했다.


“네. 가르치지 않으신 부분을 문제로 내셨으니 이건 점수에서 인정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녀는 두 학기째 내 강의를 들으면서도 아직 나를 파악하지 못한 듯했다. 딱했다. 그녀는 내가 물어본 것이 자신에게 준 배려와 기회라는 것을 몰랐고, 마지막 벼랑에서 질문을 다시 받아야만 했다.


“잘 생각하고 대답해라. 정말로 배우지 않은 걸 내가 문제로 냈니?”


“네!”


그녀는 노타임으로 대답했다. 어차피 그 정도 머리에 그 정도 눈치이니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노타임은 너무 성급했다. 그녀는 내 질문의 행간은 고사하고 미소 짓는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는 것이라도 잘 봤어야만 했다.


가만히 곁에 두었던 스마트폰을 들며 말했다.


“나는 강의의 질을 높이기 위해 강의를 다시 체크하려고 모든 내 강의를 녹취한다.”


그제서야 그녀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그래. 나는 증거가 있단 말이지. 그 문제에 대해 설명하면서 내가 강조한 내용까지 해서 함께 들어볼까?”


“어어, 그게...”


그녀에게 죄송하다는 사과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최소한 그저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쪽팔림을 넘기고 그냥 앉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의 무지함은 언제나 아우토반을 달렸다.


“왜 강의를 녹취하세요? 그거 불법 아닌가요?”


나는 웃는 얼굴로 들고 있던 매직을 부러뜨렸다. 그 지경이 되어서야 그녀와 모두는 상황 파악을 한 듯했다.


후회는 아무리 빨리 해도 늦다.


                           2.


내 강의에 다섯 번 이상 결석을 하면, 한 달 이상 수업을 빠지는 것이기에 시험을 볼 자격이 없고, 더 이상 강의에 들어올 필요가 없다고 첫 시간에 오리엔테이션 수업에서 고지했다.


기본적인 강의 내용조차 못 알아듣는 학생이 4번을 결석하고 4번이나 지각하고서 불성실한 수업태도에 지적당하자 가만히 있지 못하고 또 나댔다.


“다섯 번 결석하면 낙제니까 아직 한번 더 남은 거죠?”


내가 어이가 없어서 웃으며 대꾸했다.


“결석이 연가냐? 휴가야? 다 채워서 쓰겠다고?”


녀석들은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말의 의미를 다 알고 있는 리더 여학생이 지 친구 편을 들겠다며 나선 것이 화근이었다.


“교수님이 다섯 번 결석하면 낙제라고 하셨으니까 4번까지는 결석을 써도(?) 되는 거 아닌가요?”


심지어 그는 더 나가선 안될 지뢰밭까지 내달렸다.


“저는 이 강의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내가 가만히 말했다.


“너희 다른 강의 듣는 친구들에게 혹시 못 들은 것 같아서 알려준다. 나는 강의의 질을 높이기 위해 강의를 다 녹음한다. 지금 너희들이 하는 얘기 다 녹음 중인데, 괜찮겠어?”


학생들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거기서 멈췄어야만 했는데, 그들은 앞서 강의에서 나댔던 그녀와 더도덜도 아닌 딱 같은 레벨이었다. 또 아우토반을 나섰다.


“우리들에게 동의를 받지 않고 강의를 녹취하는 것은 불법, 아닌가요?”


싸늘하게 식어있는 웃음기를 가면처럼 굳혀가며 내가 말했다.


“전 세계 대학에 다 강의를 해봤지만, 교수가 자신의 강의를 녹취 심지어 녹화하는데 학생들에게 동의를 받는다는 말은 들어본 일이 없다. 특히나 그게 인터넷에 공개하거나 타인들에게 공개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내 강의의 질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면 더더욱. 물론 지금처럼 거짓말을 못하는 꼼짝없는 증거로도 사용될 수 있기는 하겠다.”


그들은 그제서야 한 명 한 명 마지못한 깍듯한 인사를 스마트폰에다 대고 하며 강의실을 나갔다.


그래서(?) 나는 한 달 반 후에 이곳을 떠난다.


한국의 학생이라고 불리는 아이들이 이들과 다를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3.


경찰이 시민을 지키는 사명 따위 없다며 지 목숨이 젤 귀하다며 사람이 죽을 위기에 빠졌는데 도망쳐놓고서, 돈 벌기 위한 직업으로 택한 것이지 목숨을 걸고 사명 따위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또 그 말옹호하겠다고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정신 나간 경찰들과 함께 살고 있다.


지금은 바뀌었지만, 버젓이 스승의 날이라고 카네이션에 촌지에, 명품까지 버젓이 챙기던 자들이 아직도 죽지 않고 어딘가에서 부장교사, 혹은 교감, 교장, 혹은 교육청의 한 자리를 하며 살고 있다. 그들은 전인교육의 이름으로 학생들에게 올바름을 강조하고, 자기 자식에게 혹은 자기 손주들에게 자신이 교육자라며 올바르게 살라고 설교 따위를 그 세치 혀에 담을 것이다.


왕따를 당하는 학생에게 ‘너에게 뭔가 문제가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닐까? 너도 잘 생각해봐.’라고 버젓이 아이를 두 번 죽이는 말을 내뱉는 자나, 평상시에 너무도 인격적이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다가 화장실 구석에서 집단 폭행당하는 학생과 눈이 마주치고서도 아무렇지 않게 자기 갈 길을 가는 자나, 선생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아동학대에 대해 함께 실천하자고, 별 것 아닌 인맥이라도 동원해서 공론화를 하자고 했더니, 자기 자식도 잘 못 챙기는데 무슨 남의 자식을 챙기겠느냐고 외면하고 비리경찰과 별다를 것 없는 행태를 보이는 것들이 ‘직업으로서’ 교사랍시고 ‘선생님’이라고 불려야만 하는 근거에 대해 나는 잘 알지 못하겠다.




내일이, 스승의 날이란다.


평생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아왔으나 나는 내가 스승이라고 부를만한 이를 단 한 명도 얻지 못하였다.


아울러, 내가 스승이라고 불릴 자격을 갖췄는가에 대해서도 여전히 의문이다.


함께 침대 쓰는 분의 물색없는 말에 못내 속상했다.


“도대체 몇십 년째 그 일을 하면서도 20대 애들 하나 맘대로 조절하지 못해서 그렇게 매번 스트레스를 받아요?”


하지만 나는 그 의문을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내 배움과 실천이 일치하고자 노력하고 내게 배우는 자들이 그것을 함께 깨닫고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내 사명이라 여긴다.


하루하루가 더 힘겨운 일들 투성이이고, 행복하고 뿌듯한 일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2주에 한번 교체하는 침대 시트를, 지난번 호텔 스텝을 다잡고(?) 나서 깔끔하게 교체하고서 뽀송뽀송 포드득거리는 면 시트에 누워, 그 작은 행복감으로라도 수많은 갑갑함을 잠시나마 잊으려고 노력하는 게 고작이다.

https://brunch.co.kr/@ahura/1093


매거진의 이전글 해킹 피해 환불 원정대 후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