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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주운전이 살인행위인 이유는 예에 벗어난 행동이라서다?

공자의 예는 숨 쉬는 것에서도 피어난다.

by 발검무적
升車, 必正立, 執綏. 車中不內顧, 不疾言, 不親指.
수레에 오르셔서는 반드시 바르게 서서 끈을 잡으셨다. 수레 속에서 안(안쪽)을 돌아보지 않으시며, 말씀을 빨리 하지 않으시며, 손가락으로 친히 가리키지 않으셨다.

이 장에서는 공자가 수레에 올랐을 때의 모습을 기록한 내용이다. 수레를 탔을 때의 예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별것 아닐 수 있는 수레를 타는 일상적인 모습에서도 복잡하게 예법을 따지지 않아도 예의 본질을 공자가 어떻게 몸소 보여주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는 가르침이다.


두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첫 번째 사례에 대한 부분은, 수레에 올라서 반드시 바른 자세로 서서 끈을 잡았다는 다소 평범한 내용이다. 이 부분에 대해 주자도 수레를 오를 때 잡고 오르는 끈인 ‘綏(수)’에 대해서만 설명하고 만다. 이 부분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배우는 이들을 위해 범씨(范祖禹(범조우))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바르게 서서 끈을 잡으면 마음과 몸이 바르지 않음이 없어 마음이 성실하며 모양이 엄숙하고 공손해진다. 군자의 莊敬(장경)이 있지 않은 데가 없으니, 수레에 오르면 여기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 장에서 몇 번인가 설명한 바 있지만, 공자가 했다는 평범한 행동에 대한 묘사는 당시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변별된 의미로 묘사한 것이다. 즉, 마차에 올라 끈을 잡지 않고 제멋대로 나대는 이들이 많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그저 마차를 탈 때도 모범생처럼 바른 자세를 유지하였다는 것이 핵심일까?

물론 아니다. 평상시의 모습과 달리 수레는 말이 끌고 움직임이 심한 곳이다. 즉, 자신이 엄숙하고 공손하게 굴려고 하여도 그것이 쉽지 않은 자리인 셈이다. 그리고 이 장에서 뒤에 이어질 내용과 함께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당시에 수레는 아무나 탈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으로 치면, 고급 관용차를 타고 출퇴근을 하는 셈인데, 그렇게 수레를 타고 저자를 왔다 갔다 하게 되면 거드름을 피우기 마련이다. 그러자면 얌전히 끈을 잡고 엄숙한 모습을 보이는 이들을 찾아보기가 어려웠기에 그런 모습을 보이는 공자의 평범한(?) 모습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 행간의 의미는 후반부의 언급을 모두 살펴보고 나서 해설하기로 한다.


두 번째의 사례에 대한 부분은, 수레에 타서 안(안쪽)을 돌아보지 않았았고, 말을 빨리하지 않으시며, 손가락으로 직접 무언가를 가리키지 않았다는 내용인데, 이 부분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內顧(내고)’는 돌아보는 것이니, 《禮記(예기)》〈曲禮上(곡례상)〉에 “돌아봄이 수레바퀴를 벗어나지 않는다.” 하였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용모를 잃고 또 남을 의혹하게 한다.


세 가지 행위를 묘사하고 있는데, 막 달리고 있는 수레에서 뒤를 돌아보는 것은 당연히 위험천만한 일이다. 주석에서 돌아보는 것의 범위를 설정한 예를 든 것도 그러한 의미에서 언제든지 사고를 유발할 수 있는 행동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리고 주석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달리는 수레에서 뭔가 빠르게 말하는 것은 시끄러운 소음 때문에 당연히 소리가 잘 들리지 않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듣기 위해 수레를 끄는 사람은 다시 묻거나 그것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또 부주의로 이어져 사고를 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순간이 벌어지고 만다. 마지막으로 뭔가 손가락으로 직접 가리키는 것은 당연히 좁은 수레에서 수레를 끌고 있는 마부의 시선을 가릴 수도 있고, 주의를 산만하게 만들어 다시 사고를 낼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한 세세한 해설을 하는 대신 주자는 ‘이 세 가지 행동이 모두 용모를 잃고 또 남을 의혹하게 한다.’고 점잖게 설명하였다. 이 점잖게 적어서 무슨 의미인지 애매모호한 말을 알아듣기 쉽게 바꾸면, ‘이 세 가지 행동은 위험천만한 꼴사나운 행동이며, 다른 사람에게까지 신경을 쓰게 하여 피해가 가고 사고를 유발하는 행동이다.’라는 말로 환치된다.


여기에 무슨 예법이 있고 예가 있는가 싶을 것이다. 맞다. 기본적으로 예의는 존숭 해야 할 상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니 그렇게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단편적인 초심자의 눈높이로만 본 것이고, 실제로 현대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차에 올라 운전대를 잡는 순간, 운전자는 더 이상 자신만의 생명을 담보로 운전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딱 맞는 예의의 범주에 들어간다. 운전의 예의는 생명과 직결된 안전의 문제이다.


굳이 공자가 수레를 타는 모습까지 논어의 한 장을 빌어 이렇게 상세하게 묘사하며 찬양(?)할 필요가 있느냐고 유학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폄하하는 자들의 무식함을 종종 듣곤 한다. 자아, 당신이 직접 읽어보니 어떠한가?


이것이 공자를 찬양하기 위해서 쓴 내용이라고 보이는가? 관리의 입장에서 수레를 타는 모습에서도 당시에 얼마나 참람되이 안전을 무시하며 거들먹거리며 나대는 이들이 많았으면 이런 지적까지 나왔겠는가 하는 한탄은 새어 나오지 않는가?


이 장에서는, 예법이라는 것이 어디 멀리 곰팡이 냄새나는 책에서나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중요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돋보이게 한다거나 있어 보이고 싶어 하는 행위는 언제나 자신이 중심이 된다. 자신이 중심이 되는 것은 예의의 본질은 고사하고 기본에서조차 어긋난다.


앞서 공부에서 정리한 바와 마찬가지로 예의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그의 마음을 미루어 헤아리는 것이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상대를 배려하는 사람이 자신이 돋보이기 위해서 나댈 이유가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주목받기 위해 해서는 안될 위험한 짓을 그것도 달리는 수레에서 할 이유가 없다는 당연하고도 기본적인 진리를 보여줌으로써 공자는 그것이 복잡한 설명이 필요한 예가 아님을 역설한다.


달리는 마차에서 빠르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말을 모는 마부가 모셔야 할 관리에게 빠른 말을 할 리는 만무하다. 결국 수레에 오른 관리가 무언가를 마부에게 요구하기 떠드는 말일 확률이 높다. 그런데, 지금처럼 정숙한 자동차 안에서 이야기를 나눌 만큼의 상황이 아니다.


길을 울퉁불퉁하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끈을 제대로 잡지 않으면 몸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흔들거릴 지경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 무슨 말을 할 것이며, 게다가 손가락질을 한다는 것은 마부에게 있어서는 정말 거슬리는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자신이 타고 있는 수레를 위험하게 하는 행동들의 대부분이 자신의 과시를 위한 행동과 연관되어 있음을 이 장에서는 완곡하게 묘사하고 있다. 자신의 목숨은 물론이고 말을 모는 마부까지 위험하게 만드는 일이 자신을 드러내고 거드름 피우는 행동에서 말미암는다는 것은 역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울러 길을 가던 어린 아이나 노약자는 물론이고, 다른 수레와의 사고까지 충분히 일으킬 수 있는 일인 셈이다.


새삼스럽게 현대의 자동차 운전과 비유하지 않더라도 꼴불견인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비싼 외제 스포츠카를 타고 다닌다면서 여기저기 칼로 째듯이 속도를 올리고 거리를 질주하는 차들은 위험천만하기 그지없다.


그들에게는 급한 일이 있어 앰뷸런스나 패트롤카처럼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그렇게 달리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그들이 그런 곡예운전을 하는 이유는 한 가지이다. 잘 나가는 스포츠카를 가지고 정속 주행을 하며 차분히 있는 것으로는 자신이 그 차를 운전하고 있다는 거드름을 피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철없는 인간들은 ‘이렇게 밟지 않을 거라면 뭐하러 스포츠카를 타고 다녀?’라며 자신의 목숨은 물론이고 동승자와 길에 나와 있는 차량은 물론 아무런 상관없는 보행자들의 목숨까지 담보로 곡예운전을 하는 셈이다.

운전만 그러한가?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벌어지는 천태만상은 그야말로 가관도 아니다. 이미 오래된 쩍벌남은 애교에 속하고, 자기 집 안방에서 전화를 거는 것처럼 큰 소리로 전화통화를 하는 중년의 아줌마, 아저씨는 나잇값을 못한다고 하기에는 이미 넘어야 할 선을 한참 넘어가며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음식 냄새를 풍기며 모두가 함께 타는 차 안에서 버젓이 식사를 하는 이들 또한 공중도덕이란 생각은 애초부터 집에다가 묻어두고 나온 사람처럼 행동한다.


예의 본질을 파악해내는 것은 그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자신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분이 먼저이고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을 하고자 하는 욕망이 먼저이며, 그것들을 하는 데 있어 다른 사람이 싫어할지 좋아할지 따위에 대해 배려는 고사하고 생각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행태들이다.

도쿄 지하철 캠페인, <집에 가서 해라>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이 하나 있다. 그들이 보이는 그 꼴불견의 행태를 그들의 앞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이면 그들이 그 꼴을 결코 묵과하며 지나치지 않고 못 견뎌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변명이나 그들의 본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그들이 다른 이들이 똑같이 구는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어느 누구보다 자신들이 보인 꼴불견 행위에 대해서 다른 이들이 하는 것은 끔찍하게 싫어한다.


그것이 그들이 가진 한계이고, 바닥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인간 취급을 못 받고 비난받는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예의 본질은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입장이라면 어떤 기분인지에 대해서 미루어 그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내가 끔찍하게 싫은 상황을 내가 만들지 않는 것이 바로 공자가 누누이 강조한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도 하게 해서는 안 된다)’의 원칙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의 예는 상호보완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내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실제로 내가 불편한 행동인데 참고서 해주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 마음이 편하려고 하는 행위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에게 있어 사회는 나와 타인이 아니라 나와 또 다른 나의 연속으로 이해된다.


대개 보이는 것으로 자신을 부풀리고 싶어 하는 이들은 내면이 부실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비싼 외제차, 명품, 화려한 액세서리들을 해야만 자신이 빛나 보이고 대접받는다고 생각하고 점점 더 그것들에 집착하게 되고, 행여 그것들이 없어지거나 잃게 되는 순간 자신의 존재가치가 떨어져 버린다고 생각하며 불안해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 갖는 가치는 보이는 것이 갖는 가치보다 한결 작고 가볍고 미미하며 의미가 없는 것들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의가 그들에는 그러하다. 그들에게 있어 예의는 자신보다 힘 있고 돈 많은 이에 대한 굴종이다. 자신보다 돈이 없어 보이거나 신분이 낮거나 위치가 낮아 보이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전형적인 강자의 모습을 보인다.

그들에게 정의는 힘 있는 자의 절대권력과도 같은 것이고 세상이 모두 그러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먹이사슬의 가장 아래에 놓여있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그래서 그들은 동물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나이가 든 이들을 공경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진 존재가 사람이고, 늙고 힘이 없어진 것을 공격하는 것들은 동물이다. 이 지극히 당연한 진리를 알고서도 짐승 같은 짓으로 세상이 그러하고 현실이 그러하다며 개똥철학을 역설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아니다.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짐승들이 많아지면서 그렇게 쇠락한 것일 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자신들이 얼마 가지지도 않은 것을 거들먹거리고 나대며 큰소리치면서, 그들보다 약하거나 혹은 그들이 멋대로 전횡을 하다가 결정적인 한 방을 맞고서 깨갱거리는 꼴을 참 많이 보았다.


그런데 과거에는 그런 이들이 개별적인 어리석음을 보였던 것이라면 시대가 거듭하면서 정말로 동물처럼 그 비슷한 이들이 공존공생을 하면서 무리를 이루어 비슷한 짓을 용인하고 그것을 참람되게 ‘상부상조’ 혹은 ‘다들 그러고 사는데’라는 표현으로 정당화하는 것을 보게 된다.

짐승이 아닌 사람의 가장 큰 변별점은 부끄러움을 알고, 그 부끄러움을 일깨워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배움을 통해 깨닫고 다시 반성을 통해 발전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작금의 당신들이 그러한가를 살펴보면 그다지 그렇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당신들의 정의랍시고 입에 무언가를 올릴 때를 보자. 당신들은 국정농단을 하며 군바리 딸을 등에 업고 버젓이 청와대를 들락거렸던 여자와 그녀의 여식을 보면서, 그것이 정의에 위배되었다고 비난한 것이 아니었다. 당신들이 그녀처럼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배아픔의 또 다른 형식의 포장이었을 뿐이다.


경성제대를 나온 부모가 모두 버젓이 교수님 소리를 들으며 잘 나갔지만, 자식이 공부를 못해서 부모가 나온 대학 근처에도 가지 못한 것을 만회하고자 그 자식들을 어떻게 해서든 법비나 의사로 만들겠다고 하면서 벌인 해프닝을 보며 당신들이 분노하며 흥분했던 것은 결코 당신이 사회정의구현에 불타오르는 사람이어서가 아니었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누리는 그들이 배아팠고, 결코 당신이 죽었다 깨어나도 얻지 못할 것들을 향유하는 이들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것이 싫고, 그들이 마치 당신이 누려야 할 것을 빼앗아간 것처럼 으르렁거렸을 뿐이다. 지나친 비약이라고 따지고 싶은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은가?

그럼 묻자. 당신이 그들처럼 돈과 권력을 갖추고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 당신의 자식을 보며 말할 수 있는가? 대답이 쉬이 나오지 않는다면, 다시 묻는다.


도대체 어느 쪽이 짐승인지 당신은 구분이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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