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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y 20. 2022

잘못을 어떻게 깨닫게 하는지 보여주마.

가르침이 담긴 꾸짖음에는 감정이 담기지 않는다.

色斯擧矣, 翔而後集. 曰: “山梁雌雉, 時哉時哉!” 子路共之, 三嗅而作.
〈새가〉 사람의 얼굴빛이 나쁨을 보고 날아가 빙빙 돌며 살펴본 뒤에 내려앉는다.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산 橋梁의 암꿩이 때에 맞는구나! 때에 맞는구나!” 하셨다. 子路가 그 꿩을 잡아 올리니, 세 번 냄새를 맡고 일어나셨다.

이 장은 '향당편'마지막 장으로, 이제까지의 행실에 대한 묘사와는 조금 결이 다른 방식의 글이라서 여러 논란이 있는 장이기도 하다. 과연 이 내용이 ‘향당편’에 실리는 것이 맞는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학자에서부터 뭔가 착오로 잘못 실렸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착간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아마도 내용이 향당편에서 계속해서 보였던 동일한 형식이 아니고 공자의 행실이 아닌 일화를 소개하는 것이어서 그럴 수도 있다.


한편 그것과는 별개로 이 장의 의미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도 논란이 적지 않다. 내용이 뭔가 감춰져 있는 것이 많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쉽게 읽어낼 수 없는 일상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으로 어떤 가치판단도 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이런 다양한 논란들이 나왔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공자가 제자들을 이끌고 자연의 풍취가 그윽한 밖으로 나온 상황부터 약간 상상할 필요가 있겠다. 야외로 제자들과 함께 나온 공자가 멀찍이 자연을 만끽하는데, 꿩이 사람들이 오는 것을 보고 인기척에 놀라 자리에서 푸드덕거리며 날아 근처를 배회하다가 다시 사람들이 자신들을 해치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서는 가만히 자신들이 있던 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이 모습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새가 사람의 안색이 좋지 못한 것을 보면 날아가 빙빙 돌면서 살펴본 뒤에 내려앉으니, 사람이 기미(낌새)를 보고 일어나(떠나가) 거처할 곳을 살펴 선택함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함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의 위와 아래에 반드시 빠진 글이 있을 것이다.


주자가 주석에서 이 글의 위와 아래에 반드시 빠진 글이 있을 것이라고 해설한 것은, 갑작스러운 이 상황이 아무런 설명 없이 너무 뜬금없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어서 나온 것인지 그렇게 나온 상황에 왜 갑자기 새들이 푸드덕거리며 날아 사람을 피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하지만 역시 주자는 주자다. 그 새들이 사람의 인기척에 놀라 공중을 배회하다가 다시 자신이 거처할 곳을 살피는 모습을 보고 사람도 자연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거처를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해석을 내놓은 것이다. 


물론 뒤에 이어지는 공자가 이것을 때에 맞는다고 한다는 표현에서 그것이 단순히 따뜻한 제 계절을 맞이해서 새들의 자유로움을 아름답게 보아 노래하듯 시구를 빌어와 언급한 것일 수도 있겠으나 공자가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자연을 노래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이제까지 공자가 보여왔던 가르침의 기준에 맞춰 설명을 내놓은 것이다.


나중에 이 장을 읽은 다산(茶山; 정약용) 역시 이 구절을 ‘군자는 물러남은 쉽게 하고 나아감은 어렵게 해야 함을 비유하고 있다.’라고 해설하였으니 의미는 주자의 해석과 같은 맥락이다.


실제로 공자는 그렇게 꿩이 공중을 배회하다가 다시 자리를 택하여 돌아와 앉는 평화로운 모습을 보며 “산 橋梁의 암꿩이 때에 맞는구나! 때에 맞는구나!”라는 인용된 시구인지 자작시인지 모를 감탄을 꺼내놓는다. 


공기도 좋고, 날씨도 청명하여 딱 좋아 새들이 그렇게 노니는 모습까지 보며 새들에게도 그리고 아울러 모든 자연에게도 좋은 시기임을 흥겹게 노래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저 한가롭게 자연으로 산책 나온 스승과 그 뒤를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이려니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에 터진다. 스승의 노래와도 같은 감탄을 뒤따르던 자로(子路)가 또다시 그 급한 단무지 같은 성격으로 스승의 노래를 잘못 해석한 것이다. 자로는 스승의 노래를 제 시절에 아름답게 노니는 새들의 자연스러움으로 듣지 못하고, ‘꿩이 제철을 만났구나! 지금 먹기 참 좋을 때구나!’로 해석하고 스승에게 바치기 위해 그 꿩을 사냥해버린 것이다.

신이 꿩을 먹고 싶다는 의미로 해석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공자는 식사 때가 되어 상위에 올라온 꿩고기를 보고 그제서야 자로(子路)가 어떤 착각을 했는지, 그리고 그 착각 때문에 애먼 암꿩은 졸지에 횡액을 맞고 그날로 죽음을 맞이하여 상에 반찬으로 오르고야 만 것이다. 


화는 났겠으나 제자들 중에서 가장 연장자이자 자신을 위해 언제나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자로를 탓하기에는 이미 벌어진 일이니 대놓고 그를 꾸짖는 것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 자리에서 냄새만 맡고 일어나 그것을 먹지 않는 것으로 자로와 제자들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생각할 거리를 남기고 일어나 버린다.


이 부분에 대해 형씨(邢昺(형병))가 조금 더 상세하게 그 상황을 배우는 자들을 위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梁(량)’은 다리이다. ‘時哉(시재)’는 꿩이 물을 마시고 모이를 쪼아 먹는 것이 제때를 얻었음을 말씀한 것이다. 자로가 이것을 알지 못하고 時物(시물; 제철에 알맞은 음식)이라 생각하여 장만해서 올리니, 공자께서 먹지 않으시고 세 번 냄새를 맡고 일어나셨다.”


내용과는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지만, 이 장의 착간을 의심하는 학자들이 나오는 단초가 되었던 주석들이 몇 가지 있는데 조씨(晁說之(조설지))는 <석경(石經)>에 ‘嗅(후)’ 자가 ‘戞(알)’ 자로 되어 있다고 고증하며 그 의미가 ‘꿩이 우는 것’이라고 설명하였고, 유빙군(劉勉之(유면지))은 다음과 같은 주석을 남겼다.


“‘嗅(후)’ 자는 마땅히 狊(격) 자가 되어야 하니, 음이 古闃反(고격반)이니 두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것이다. 《爾雅(이아)》에 보인다.”


조금 엉뚱하게 볼 수도 있겠으나 마지막 두 구절을, 자로(子路)가 꿩에게 먹이를 주자 꿩이 세 번 냄새 맡고 날아갔다고 풀이하는 학자도 있다. 꿩이 욕심내지 않는 모습을 묘사하여 공자가 利祿(이록)에 淡白(담백)함을 은유했다고 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자는 다음과 같이 주석을 남겨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이 장이 정확하게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설명할 수 없다고 솔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남긴다.


내가 살펴보건대 뒤의 두 해설과 같다면 ‘共(공)’자는 마땅히 붙잡는다는 뜻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빠진 글이 있으니, 억지로 해설할 수 없다. 우선 들은 바를 기록하여 아는 자를 기다리노라.


물론 깔끔하게 해석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내용이라는 주자의 설명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나 나는 개인적으로 이 장이 향당편에 속해있는 것도 그렇고 그 내용이 의미하는 바도 충분히 이 자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특히 맨 마지막에 변격으로 기존의 형식과 똑같은 형식으로 마무리하는 것은 굳이 향당편만 그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 해설서의 대부분은 그저 수박 겉핥기로 이 장을 얼버무려 끝내고 그나마 조금 의미를 부여하는 중급자 이상의 전공자들이 해설할 경우, 이 장의 시적 묘사와 이야기를 통해 ‘時中의 德’을 말한 것이라 풀이하는 경우도 있다. 즉, 앞서 주자가 무게를 두었던 꿩의 순리에 따른 움직임을 군자의 그것으로 보아, 세상에 나가 이상을 실천함과 숨어 살며 덕을 수양함이 모두 自由自在하다는 식으로 해석한 것이다.

나는 별로 그 해석이 맘에 들지 않는다. 너무 견강부회(牽强附會)하는 감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오히려 뒤에 보인 자로(子路)의 과다한 스승에 대한 공경과 그것에 대해 반응한 공자의 모습에서 의미를 찾고자 한다. 


왜냐하면 향당편은 내내 그런 독법으로 일이관지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 의미하는 것 역시 향당편의 전반에 흐르고 있는 예의 본질에 대해서 충분히 일상을 통해 공자가 보여주었던 실천의 단면을 여실히 증명해내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먼저, 자로(子路)가 부족한 내공으로 스승의 의도를 잘못 이해하기는 하였으나 공자는 자로가 보인 최선이 결국 스승을 공경하고자 하는 진심에서 우러나왔음을 헤아렸다. 다른 장에 보면, 넌지시 돌려치기로 자로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를 꾸짖기 위함이 아니라 그의 발전을 위해 가르침을 주는 방식이다. 


그런데 여기서 보인 자로의 실수는 뭔가 가르쳐서 수습할만한 꺼리가 아니다. 그리고 앞서 설명한 것처럼 꿩은 이미 사냥되어 죽고 말았다. 물론 꿩을 사냥하여 먹는 것이 잘못은 아니기에 그것을 탓할 것까지는 없지만, 공자는 자연과 어우러지는 흥취가 깨졌음을 냄새만 세 번 맡고 그 자리를 뜨는 것으로 자로와 제자들에게 무언의 가르침을 준다.

잘못 알고 있거나 그릇되어 나아갈 기미를 보일 때는 바로 그것을 꾸짖고 바로잡아주는 것이 스승으로서의 의무이고 제대로 된 스승의 가르치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미 실수를 해버린 제자에게 꾸짖는다고 해서 그것을 바로 깨닫거나 그 잘못을 수습할 수 없다면 그의 온전한 예의 어린 마음을 꾸짖는 것으로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모습 또한 예의 본질인 셈이다. 


예의라는 것이 단순히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만 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줌과 동시에 꾸짖는 방식에도 예가 있음을 보여준다. 제대로 된 스승의 꾸짖는 방식은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대의 전제가 있어야 할 뿐, 결코 감정이 가미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른바, 알고서 잘못을 행한 자에게는 혹독한 비판과 꾸짖음이 이어져야 하지만, 그것을 알지 못해서 그런 자에게 단순히 꾸짖다는 행위는 그 순간의 감정만 드러내고 감정만 상하게 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경우를 조절하고 안배하는 것 또한 예의 한 방식임을 공자는 이렇게 사소해 보이는 일상에서 실천으로 보여주고 있다.


조금 더 깊이 있게 고급자의 수준으로 들어가 보면, 앞에서 말했던 새들이 인기척의 기미를 읽은 것도 뒤에 이어지는 내용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 듯 하지만, 역시 그렇지 않다는 점을 찾아낼 수 있다. 새들이 인기척을 느끼고 그 기미에 자리를 뜨는 것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그래서 앞서 주자와 다산은 그 이치를 군자의 거처에 대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 뒤에 공자가 보였던 냄새만 세 번 맡고 먹지 않고 그 자리를 뜨는 가르침의 방식과 연관시킨다면 어떠한가? 스승의 그 가르침만 보고서 그 기미를 읽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깨닫고 스승이 일러주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닫는다면 그 실수도 결국 하나의 공부인 것이고, 스승은 제자의 진심 어린 공경은 받아주었지만, 그 행동이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음을 바로 지적한 것으로 마무리가 되는 셈이다. 

이것을 고급자의 수준이라고 명명한 것은 내 해석이 대단하다고 자랑하고자 함이 아니라, 한 장의 내용이 앞과 뒤가 결코 아무런 맥락 없이 관계없는 장이 없다는 <논어>의 편집 방식에 독법을 얹은 것뿐이다. 


만약 주자나 다산의 의견처럼 앞에서 공자가 새들의 움직임을 본 것만을 이야기한 것에 비중을 둔다면 굳이 자로(子路)가 꿩을 잡은 것이나 그것을 냄새만 맡고 먹지 않고 자리를 뜬 이야기는 이 장에 붙어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어제 속보로 대통령이 된 이의 장모가 벌인 수많은 범죄 중에 하나였던 이른바 ‘납골당 주식 횡령’ 혐의에 대해 기어코 검찰에서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미 불법 요양병원을 운영하며 요양급여를 부정 수급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었던 그의 장모는 2심에서 지난 1월 ‘기적적으로’ 무죄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것과는 별건으로 통장 잔고증명서를 위조한 혐의로도 재판에 넘겨져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굳이 이 소중한 공간에 그녀의 혐의가 무엇이었는지 왜 말도 안 되는지를 구구절절이 설명하고 싶지 않다. 다만 재미있는 그 과정은 간략하게 설명해준다.


피해자가 억울하다고 고소를 했으니 수사는 당연히 경찰이 시작했다. 경찰은 이미 2년 전인 2020년 12월에 검찰에 불기소 의견으로 송치한다. 이후 검찰에서는 두 차례나 보완수사를 요구하게 된다. 보완수사라는 것은 경찰의 수사 결론인 불기소 의견이 잘못되었다고 보았기에 면밀하게 제대로 증거를 수사하라고 다시 내려보내는 것이다. 


두 번이나 내려보낸 사건에 대해 경찰은 꾸준히 혐의가 없다며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한다. 그리고 그 사이 그녀의 사위는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검찰은 불기소하는 것으로 그녀에게 면죄부를 준다. 


경찰은 처음부터 알아서 기었고, 잘못되었으니 제대로 수사하라던 검찰은 그녀의 사위가 대통령이 되자마자 모든 것을 없던 일로 되돌린다. 더 상세한 설명은 의미가 없으니 생략하기로 한다.


대통령의 오른팔이자 책사라고 불리는 이가 법무무장관자리에 오르자마자 통칭 ‘여의도 저승사자’로 불렸던 ‘증권범죄 합동수사단(이하 ‘합수단’)이 부활했다. 그런데 합수단의 전공은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증권 관련 범죄로 이익을 본 자들을 단죄하기 위한 것이 주목적이다. 

대통령의 부인은 내내 도이치 모터스 증권 건으로 수사를 받아야 한다는 지탄을 받았다. 새로운 대통령의 입버릇은 ‘상식과 공정, 모든 것은 법대로!’였다. 

그런데 왜 그의 아내는 의미심장하게 웃는 걸까?




공자의 일상적인 부분들을 묘사하는 것으로만 치중하여 고문을 전공하는 이들에게마저도 다소 따분하다고 알려진 ‘향당편(鄕黨篇)’이 오늘로 드디어 끝이 났습니다. 아침마다 한 장씩 읽어왔던 이 <논어>가 분량으로는 드디어 절반을 넘어섰고, 장으로는 20편 중에서 딱 절반인 10편이 끝난 셈입니다.


고문이 익숙하지 않은 현대인이 아무리 인문학에 관심이 있다 하더라도 한자 하나하나를 바로 새기고 공부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여, 주석까지는 원문을 넣지 않지만 그래도 원문만큼은 한 번쯤은 눈으로라도 읽고 새기라 가장 앞에 두는데, 읽는 분들이 거의 없어 보이긴 합니다.


편하게 읽고, 술술 읽히는 글이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저 술술 읽히기만 하는 글은 내 머리에, 가슴에 뭔가 남았던 기억이 없었던 듯합니다. 조금 어려워도 생각해가며 곱씹어 읽고 탐구했던 글귀들이 결국 내 삶의 자양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침마다 대단치 않은 글을 함께 읽으며 공부해주신 여러분들이 있어 10편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노력해보고자 합니다.


다음 주 월요일 아침, 다시 11편을 펼치고 아침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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