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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y 23. 2022

촌스러워도 상관없다며 당당할 수 있는 자는 어디 있는가

본질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면서 화려한 껍데기에만 혹하는 당신들에게.

子曰: “先進於禮樂, 野人也; 後進於禮樂, 君子也. 如用之, 則吾從先進.”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지금 사람들이 이르기를〉 선배들이 禮樂에 대하여 한 것은 野人(촌스러운 사람)이고, 후배들이 禮樂에 대하여 한 것은 君子라고 한다. 〈내가〉 만일 禮樂을 쓴다면 나는 선배들을 따르겠다.”

이 장은 ‘선진(先進) 편’의 첫 장으로 겉으로는 예악을 말하는 듯 하지만, 결국 학문의 본질, 그 나아갈 바에 대해 공자의 생각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가르침이 담긴 문장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아주 명료하고 간단한 듯 하지만 그 행간의 의미가 이제까지 배웠던 내용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렵고, 깊이 생각하지 않고서는 자칫 착각할 수 있는 내용이다.


원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공자가 이 가르침을 주는 당시를 기준으로 전 세대의 선배들이 보였던 예악은 촌스러운 것이라고 평가하고, 후배, 즉 공자 당시 시대의 사람들이 보이는 예악은 군자다웠다고 평가한다. 얼핏 보면, 군자가 지향하는 바이니 촌스러운 것보다 군자에 가치를 두고 있는 말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장에서 군자답다는 말은 <논어>에서는 이례적으로 중의적이며 완곡한 풍자의 뜻을 담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 힌트는 당연히 마지막 문장에 방점을 박듯이 새겨주었다. 공자가 따른다면 선배를 따르고 싶다는 강한 소망을 담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내용이다. 주자는 이 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설로 가볍게(?) 시작한다.


‘先進 · 後進(선진 · 후진)’은 前輩(전배, 선배) · 後輩(후배)라는 말과 같다. ‘野人(야인)’은 교외의 백성을 이르고, ‘君子(군자)’는 어진 사대부를 이른다.


내가 굳이 ‘가볍게’라는 설명을 한 것은, 문장의 의미나 행간의 의미를 전혀 풀어주지 않고 표면적인 단어의 의미만을 풀었기 때문이다. 촌스러운 사람이라고 내가 번역한 야인에 대해서 교외의 백성이라 설명하고, 군자를 그저 신분으로 설명한 것은 주자가 해석을 통해 배우는 자들이 그 행간의 깊은 의미를 깨달으라는 주자 나름의 공자 따라 하기였다고 나는 짐작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넌지시 설명하니 나름 <논어>로 자신의 이름 석자를 날린 갈라진 목소리의 빡빡이 전 철학과 교수라는 이가 이 장의 선진(선배)과 후진(후배)을 공자의 제자들 중에서 앞선 자와 뒤에 합류한 신진 후배들로 해석하는 헛발질을 해대는 실수를 했기 때문이다.


하긴 그 역시 다른 선배 학자들의 몇 가지 주석을 근거로 내민 의도적인 새로운 시도였으니 실수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내 표현대로 ‘헛발질’이 가장 적확한 표현일 것이라고 본다.


TV에 나와 떠들던 그의 명성만 보고 <논어> ‘선진 편’의 첫 장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딱한 초심자들이 있을까 싶어 그게 왜 헛발질인지 학술적인 검증으로 통해 하나하나 뽀개 주도록 한다.

가장 기본이 되는 근거는 원문의 마지막 문장이다. 공자가 자신의 제자들 앞선 제자들과 신진 제자들을 구분하여 이야기한 것이라면 마지막 문장에 ‘從(따르겠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본 중의 기본이다. 문자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착실하게 새기는 것. 아마도 몇몇 학자들과 그것을 알량하게 인용하며 자신의 새로운 의견인 듯 내밀고자 했던 자의 생각에는 이 선진 편에 공자가 제자들에 대해 평가하고 그들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 전반에 깔리기 때문에 그 흐름과 일맥상통하다고 파악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이나, 그것 역시 내공이 부족한 헛발질이다.


첫 장이기에 앞으로 이어지게 될 각론의 평가를 어떤 기준으로 하는가에 대한 총론 격인 내용이 바로 이 첫 장의 기능이고 역할이다. 그것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논어>의 절반을 넘어왔다면 다시 첫 장으로 가서 복습을 통해 <논어>의 독법을 처음부터 다시 익히고 돌아와야 할 단계인 것조차도 스스로 가늠하지 못하는 것이라 딱할 뿐이다.


그다음 근거로, 위 주자의 주석이 열어준 힌트가 부족하다고 여겨 배우는 자들이 삽질을 할지도 모른다고 부연설명에 나선 정자(伊川(이천))의 주석을 든다.


“선진은 예악에 있어 文(문, 문채)과 質(질, 바탕)이 마땅함을 얻었는데 이제 도리어 그것을 질박하다고 말하여 ‘야인’이라 하고, 후진은 예악에 있어 문이 그 질을 넘는데 이제 도리어 彬彬(빈빈; 적절히 배합됨)하다고 말하여 ‘군자’라고 한다. 이는 주나라 말기에 文(문)이 質(질)을 이겼으므로 당시 사람들의 말이 이와 같아서 文(문)에 지나침을 스스로 알지 못한 것이다.”


이 주석은 이른바 공인된(정자를 유학에서 공인하지 않으면 누굴 공인하랴?) 심판의 깔끔한 판정과도 같은 주석이다. 여기서 행간을 읽는데 핵심 키워드에 해당하는 문(文)과 질(質)을 언급해줌으로써 배우는 자들이 자연스럽게 앞에서 배운 옹야(雍也) 편의 16장을 떠올리게 된다.

물론 지금 당신은 이렇게 일러줘도 도대체 옹야(雍也) 편의 16장에 무슨 내용이 있었는지 전혀 아무런 생각이 없겠지만 당시 배우는 자들은 그나마 당신보다는 조금 더 나았기에 이 정도 구체적인 키워트 힌트까지 주게 되면 무릎을 탁 치며 이 장의 행간에 담긴 뜻을 조금씩이라도 길어 올릴 채비를 한다.


당신이 굳이 다시 찾아봐야 그 개념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위 정자의 주석에서 마지막에 구체적으로 주나라 ‘말기’를 언급하며 ‘文(문)이 質(질)을 이겼다’라는 것을 비판하는 내용이 나오는 것을 제대로 읽는다면, 원문에서 말하는 선진(선배)이 공자의 세대를 기준으로 선배를 의미하는 것임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예악에 있어서 선진은 야인(촌스러운 사람)으로 ‘質(질; 내용, 본질)’에 해당하고, 후진은 군자와도 같으니 바로 ‘문(文; 형식)’에 해당한다는 설명이다. 정자의 주석에 의하면 주나라가 세워졌을 때만 해도 그 개념이 충실하게 이행되었는데, 주나라 말기가 되면서 사람들이 文(문)에 지나침을 스스로 알지 못하는 우를 범했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진은 요(堯), 순(舜), 문(文), 무(武), 주공(周公)까지의 시대를 대표하는 선배를 말하는 것이고, 후진이라 표현한 것은 공자와 같은 시대에 사는 이들을 지칭한 것임이 명징해지는 것이다.


앞서 누차 공부했던 바와 같이 공자는 도통(道統)의 맥을 중시하며 선배 세대를 동경하고 그 시대의 도(道)를 되찾아야 한다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 그 흔적들은 앞서 공부한 위정(爲政) 편 11장과 23장, 팔일(八佾) 편의 14장, 이인(里仁) 편의 22장, 술이(述而) 편의 1장과 5장, 태백 편의 18장부터 21장에 이르기까지 여러 부분에서 증명된다. 물론 앞으로 배울 내용에도 그러한 언급과 증거들은 여전히 발견된다.


그래서 자신이 禮樂을 쓴다면 반드시 그 시대의 선배들을 따르겠다고 선언하듯 말함으로 당시의 잘못된 인식과 행태를 아주 매섭게 후려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은 해석을 달아 행간의 의미를 놓치지 말라고 넌지시 강조한다.


‘用之(용지)’는 예악을 사용함을 이른다. 공자께서 이미 당시 사람들의 말을 기술하고, 또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이 하셨으니, 이는 지나침을 덜어 中道(중도; 알맞음)에 나아가게 하려고 하신 것이다.


주자는 주석에서 완곡하게 알맞게 나아간다는 ‘중도(中道)’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실제로 원문에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文)에만 신경을 쓰고 그 바탕이 되는 본질(質)에 힘쓰지 않음을 호되게 후려치고 있다.


일찍이 선인들은 벼슬이나 명리(名利; 명성과 이익)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자기 수양에 힘썼는데 공자 당시의 행태는 내실을 기하기는커녕, 그저 빨리 입신출세하기만을 바라고 그것을 위해 학문하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그래서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장에서 등장한 ‘군자(君子)’는 이제까지 <논어>에서 사용되었던 배우는 자들이 지향해야 할 바로 사용된 용어가 아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이 장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주자가 설명한 중도(中道)는 도리어 그것을 제대로 파악하라고 던진 간접조명용 ‘밑밥’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 본질적인 바탕에도 신경을 쓰면서 형식도 갖춰야 하는 중도(中道)가 가장 좋은 것이기는 하나, 굳이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껍데기에 치중한 당시 잘못된 이들의 행태보다는 겉보기만 꾸미기에 신경 쓰지 않고 성실하게 수행하는 자, 벼슬 따위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덕을 쌓는 자, 세석족인 명리(名利)에 초탈한 야인(野人)을 따르겠다는 극단적인 비유를 통해 배우는 자들을 일깨우자 한 것을 돋보기에 하려고 붙인 설명인 것이다.


앞서 빡빡이 전 철학과 교수가 헛발질을 하는데 일조한 해석은 사실 청나라 시기 학자였던 유보남(劉寶南)이 내놓은 견해이다. 그런데 그의 해설마저도 빡빡이 교수가 어설프게 오독하고 잘못 적용한 내용과는 거리가 멀다.

정나라 자산

유보남의 해석은 <춘추좌전(春秋左傳)>에 나오는 정(鄭) 나라 자피(子皮)와 자산(子産)의 이야기에 언급되는 이른바 ‘예와 악을 배운 뒤에 정치에 입문하는 것이지 정치로 정치를 배우지 않는다’는 내용과 연결된다.


다시 말해, 아예 ‘선진’을 출사(出仕)에 앞서 예악에 관련된 공부를 익힌 사람으로, ‘후진’은 귀족들의 경우 대부분 자리부터 차지한 후 업무를 배우고 있는 이들이라 통칭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예악(禮樂)이란 본래의 예법과 음악에 한정된 개념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배우고 익히고 있어야 할 소양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사용된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해석하게 되면, 제대로 본질에 대해 배우지도 않고 실천할 줄도 모르는 이들이 그저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니 그 모습을 보고 공자가 한탄한 것이라는 해석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인데, 얼핏 그럴싸해 보이는 그 해석을 급히 가져오다 보니 그런 식으로 헛발질을 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치판에 오래 있었던 것으로 정치를 오래 했다고 자부하는 썩은 고인물들이 나라를 말아먹고 있는 빨강 파랑에 두루 깔려 있는 이들과는 별개로, 어려서부터 어쩌다 반짝 일회용으로 발탁되었다가 그 권력과 스포트라이트의 맛에 빠져 국민의 선택 한번 받지 못하고 빨간당의 당대표를 위시로 한 파란당의 꼭두각시 스피커 노릇을 하는 젊은 피라는 이들의 어리석지 그지없는 헛발질을 보고 있노라니 과연 이 나라의 미래라는 것이 있는가 싶은 생각이 든다.

가장 이상적인 정치는 제대로 예와 악을 제대로 배우고 익힌 선배들이 있고, 그들의 모습을 보고 익히며 다시 야인의 모습으로 예와 악을 익혀 진정한 군자로의 길을 향하는 후배들이 있어 이끌어주고 밀어주는 모습일 것이다. 그것이 이상적이라는 것을 저들이 모를 리가 없다.


머리로는 충분히 잘 안다. 그들의 역량이 턱없이 부족하면서도 그들의 욕망과 사심이 그 역량을 모두 뒤덮고 뒤엎을 정도로 강렬하고 차고 흘러넘치기 때문에 이 악순환과 난장판은 벌어지고 이어지며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정계은퇴’라는 말을 손바닥 뒤집기보다 훨씬 더 쉽게 식언하고 대통령 하겠다고 나온 이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초선이나 재선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국회의원 3선이라 하면, 무려 12년이나 국회의원직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버젓이 자신의 정치경력이 12년이나 되는 것을 자랑할 뿐, 그가 세상을 바르게 바꾸겠다고 만들고 10년이 넘도록 이 모양 이 꼴인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홍보자료를 만들고 이걸 했네 저걸 했네 떠들어대지만, 판별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그가 정치판에 나오고 나서 그가 바꾼 것이 있는지를 살피면 그뿐이다. 잘못된 것을 바꾸기는커녕 공부 못하는 자기 자식 법비 만들겠다고, 의사 만들겠다고 없는 스펙까지 권력 동원해서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라고 가슴에 배지를 만들어 준 것이 아니란 말이다.


중앙공무원의 신분으로 나라의 일을 제대로 하라고 했더니, 그 자리에서 해먹을 짓 못해먹을 짓 다하다가 심지어 나랏돈으로 유학 다녀와서 학벌 탑까지 쌓고 법비들이 어찌나 부러웠던지 마피아라는 이름과 붙어 당당하게(?) 전관 행세를 하며 부와 명예를 닦아놓는 짓을 하질 않나 대놓고 그 여세를 몰아 정계에 나가겠다고 여의도에 뛰어드는 부나방 같은 것들은 지금도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있다.

늘 말하는 것이지만, 대의 민주정치는 국민이 뽑아주지 않으면 그들의 권력을 누릴 수가 없기 마련이다. 즉, 그들이 지금 그렇게 나라 말아먹은 경력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히 정치 경력이 풍부하다고 입만 살아 떠들어대게 만들어준 것이 바로 당신들이라는 말이다. 당신들은 말한다.


어차피 파란당 아니면 빨간당인데, 그나마 뽑을 사람이 없어서 어쩔 수 없다고. 새롭게 세력을 만들어 사회를 바꿔나가라고 말하는 그나마 조금 제정신이 있는 이들이 정치를 하고 싶다는 이들에게 조언을 하면 그들을 또 말한다.


어차피 빨간당과 파란당의 이름으로 나가지 않으면 정계에 발도 담글 수 없는 상황이라고. 도대체 무엇이 먼저이길래 그들은 자기네가 그렇게 일체 단결하여 그 악순환을 더 옹고히 만들어나간단 말인가?


수천 년 전 중국에서 당시의 썩어 빠져들어가 제대로 된 기본을 갖추지도 못한 채 껍데기 꾸미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것들을 보며 공자는 한탄하며 본래 선배들이 보여줬던 본질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친다.

하지만, 그 외침은 수천 년이 지난 오늘의 대한민국에도 공허한 울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이유를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는 결코 깨어있는 한 사람의 외침만으로는 결코 바꿀 수없다는 바로 그 뼈아픈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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