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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y 27. 2022

말을 삼가는 것만으로 어떻게 훌륭한지 알 수 있는가?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것은 그 하나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南容三復白圭, 孔子以其兄之子妻之.
南容이 白圭를 읊은 詩를 〈하루에〉 세 번 반복해서 외우니, 孔子께서 그 형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셨다.

이 장에서는 남용이라는 인물에 대해 언급하는데, 역시 구체적인 칭찬의 말은 없고, 그의 행실을 보고 공자가 형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는 사실관계를 서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먼저, 남용이 누군지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남용은 노나라 사람으로 성은 남궁(南宮)이고 이름은 괄(括)이다. 자는 자용(子容)이고, 다른 이름으로 ‘남용’ 또는 ‘남궁도’라고 불렸다고 전한다. 이 장에 나온 대로 결과적으로 공자의 조카딸에게 장가를 들어 공자의 조카사위이자 공자 문하 72명의 수제자(七十二賢) 중 한 명이다.


평소 공자가 그에 대해 ‘군자’ 또는 ‘덕을 숭상하는 사람’으로 평가할 정도로 신망을 얻었는데, 앞서 공부했던 ‘공야장(公冶長) 편’ 2장에서도 같은 의미로 언급된 바 있는데, 뒤에 공부하게 될 ‘헌문(憲問) 편’의 6장에 또 등장하여 공자에게 무려 ‘군자’라는 칭찬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당 현종 개원(開元) 27년인 79년에 담백(郯伯)에 추봉 되었고, 송 진종 대중 상부(大中祥符) 2년인 1009년에 공구후(龔丘侯)에 추봉 되었다. 이어 1116년에 여양후(汝陽侯)로 추봉 되었다가 명 세종 가정(嘉靖) 9년인 1530년에 ‘선현남궁자(先賢南宮子)’로 추봉 되었다.


이 장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실마리는 크게 세 가지이다. 왜 칭찬의 말이 없는데 그를 평가했다고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고 원문을 분석하되, 그가 어떤 행동을 했길래 스승 공자의 허여함을 받았는지, 가장 먼저 언급되고 있는 세 번이나 반복하여 읽었다는 그 시의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첫 번째이고, 그것을 읽은 것만으로 조카의 배필로 삼을 정도로 단순히 여기지 않았을 텐데, 도대체 그 내용과 부합하여 그가 어떤 몸가짐을 가졌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 장을 언급하였는지 가르침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두 번째이고, 궁극적으로 이 장에서 평가하는 것이 단순히 남용이라는 인물에 대해 평가하기 위함이 아니라 남용에게 가르침을 준 스승 공자의 핵심 메시지가 무엇이었는가를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 찾아 파악하는 것이 그 마지막이다.


먼저 남용이 읽은 시에 대해 해설을 직접 달아놓은 주자의 주석을 참고하기로 하자.


《詩經(시경)》 〈大雅 抑(대아 억)〉에 “白圭(백규, 백옥으로 만든 규)의 흠은 오히려 갈아 없앨 수 있지만 이 말의 흠은 다스릴 수 없다.” 하였는데, 남용이 하루에 세 번 이 내용을 반복해서 외웠다. 이 일이 《孔子家語(공자가어)》에 보이니, 이는 말을 삼가는 데에 깊이 뜻을 둔 것이다. 이는 나라에 도가 있을 적에는 버려지지 않고, 나라에 도가 없을 적에는 화를 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형의 딸자식을 그에게 시집보내신 것이다.


본래 이 ‘백규(白圭)’라는 시는, 위(衛) 나라의 무공(武公)이 몸소 지어 신하로 하여금 무공의 곁에서 날마다 외우게 함으로써 방만하게 나라를 다스리려는 자신을 다잡고자 했다는 유래가 담긴 시이다.


주자가 주석에서 인용한 ‘이는 나라에 도가 있을 적에는 버려지지 않고, 나라에 도가 없을 적에는 화를 면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것은 앞서 ‘공야장(公冶長) 편’ 2장에서 남용에 대해서 공자가 직접 언급했던 부분을 재인용한 것이다. 주자의 해석 의도를 파악하건대, 공자가 앞에서 남용을 그렇게 평가했던 것의 근거를 바로 이 장에서 찾을 수 있다고 배우는 자들에게 넌지시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 남용이 이 시를 반복하여 외운 의도는 처음 이 시를 지은 무공의 의도와 함께 말을 삼가는 것이 가장 기본이자 가장 핵심이 된다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그 행간의 의미를 파악한 범 씨(范祖禹(범조도))는 배우는 이들을 위해 조금 더 명확하게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해설을 해주고 있다.


“말은 행실의 표면이요 행실은 말의 실제이니, 그 말을 쉽게(함부로) 하고서 행실을 능히 삼가는 자는 있지 않다. 남용이 그 말을 삼가고자 함이 이와 같았다면 반드시 그 행실을 삼갔을 것이다.”


범 씨의 주석에서는 주자의 주석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이 장의 가르침이 보여주고자 했던 핵심 용어를 끄집어내준다. 맞다. 바로 ‘행실’이라고 적고, ‘실천’이라고 새기는 의미인 것이다. 행함은 실천을 의미하기 때문에 당연히 행하는 것이 맞다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이 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백규 시의 ‘말을 삼가라’라는 메시지와 연결되면서 표리의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은 범 씨의 공부와 생각이 그만큼 깊어 공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가르침의 행간을 깊숙이 길어낸 것이라 볼 수 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간다면, 단계적으로 하나씩 살펴보면 된다. 원문에는 백규의 시만을 언급한다. 주자는 주석을 통해 백규의 시가 갖는 의미를 단순히 말의 삼감에 방점을 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생활에서 남용이 실천하여 처세(處世)에 적용하였다는 공자가 말하고자 했던 행간의 의미를 길어 올린다.


즉, 군자가 취해야 할 출처(出處)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기에 그 의미를 잊지 않으려고 반복하여 매일같이 읽었고, 그렇게 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실천으로 옮겼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에 대한 의미를 주자는 공자가 남용을 언급했던 공야장편에서 다시 가져와서 이해를 돕기 위해 직접 재인용하였고, 범 씨는 그 연결고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갈 수 있는 초심자들을 위해 다시 말과 행함의 표리 관계가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임을 설명해줌으로써 남용의 행동이 대단한 것은 물론이되, 그 가르침과 깨달음이 본래 공자가 가르쳤던 것에서 나왔음을 다시 일러주며 보여준다.


공자는 자신이 가르쳐주었던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 것을 넘어 배움의 완성인 실천을 하기 위해 그 글귀를 반복하여 외우며 실천하고자 했던 남용을 허여(인정)하여 조카 사윗감으로 형에게 추천한 것이다.



지금은 어느 한 시대를 지나 그렇지 않지만, 그 어느 한 시대에는 대통령이 자기 자식들을 굳이 재벌의 자식들과 혼인을 맺어 사돈으로 엮이는 일이 많았다. 대통령의 자식들이 재벌의 자식들과 결혼하는 것은 100% 서로 간의 이익을 위함이다. 한쪽에서는 부(富)를, 또 한쪽에서는 권력을 가지고 그것을 통해 서로 간의 부족한 점을 채우고 서로 시너지(이것을 시너지라고 표현하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효과를 최대한으로 누리겠다고 한 것이다.


어느 한 시대라고는 했지만, 결국 권력자들이나 재부(財富)를 가진 자들끼리 자식들의 혼사를 통해 사돈관계를 맺는 것은 그 역사가 아주 오래되고 깊은 것이다. 고려시대 지방 호족들을 옭아매기 위해 그들의 딸과 결혼하여 호족들을 잠재웠던 고려시대의 그것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손치더라도 조선시대 사대부라는 것들의 결혼은 자신들의 눈높이를 맞춘다는 미명하게 저마다 권력에 끈을 대는 것으로 사용된 것이 사실이었다.


물론 그것이 조선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봉건제도를 누렸던 서양과 동양에서도 보인다는 점을 살펴보면 아마도 인간의 권력과 재부를 공고히 다지기 위한 방식으로는 피가 섞이지 않은 이들이 혈연에 준하는 가족으로 엮이기 위한 방편으로는 자식의 혼인만한 것이 없었을 것이라는 참으로 딱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공자는 이 장에서 보는 것과 같이 대단한 집안의 자식이어서라던가 싹수가 보여 엄청난 벼슬자리에 올라 출세할 자를 조카사위로 천거하지 않는다. 공야장편 1장에서 공자가 자신의 딸을 공야장에게 시집을 보낸 것만 보더라도 역시 같은 이유이다. 남용에게 조카를 시집보낸 것은 이미 공야장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어 마침 아직 미혼이던 조카를 그와 같은 좋은 인재에게 짝지어준 것이다.


앞서 살펴본 것이 자신의 자식을 사욕을 위해 영향력 있는 사돈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삼았던 것과 정말로 괜찮은 인재라고 허여하여 그에게 자기 딸이나 조카를 시집보낼만하다고 하는 것은 차이가 커도 너무 큰 차이를 보인다.


자식의 짝을 부모가 지어주는 이유는, 부모의 사욕으로 자식을 활용하는데 입을 다물고 따르는 것이 효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식에게 가장 좋은 배필을 구해주려는 부모의 안목을 믿고 따르라는 의미임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욕을 차리기 위해 자식들을 맺어주면서 어차피 눈높이가 맞는 사람들끼리이니 맞는 짝을 맺어주었다고 자위한다.


작금의 현실을 보면 알겠지만, 그들은 대부분 이혼하고 파탄을 맞았다. 그 시작부터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그 당사자들은 이미 하고 있을 것이며 자신의 사욕을 위해 그런 결혼을 시켰기는 했지만, 자식이 행복하지 못한 결혼을 유지하다 파탄을 맞고 갈라서는 것을 보고 마음이 좋을 부모는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누군가 정말로 무엇을 위해 그런 결혼을 시켰는지에 대해 묻는 시점은 반드시 자식이 결혼생활이 파탄이 나고 그들이 부나 권력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지옥에 가기 전에 묻는 것이 가장 정확한 타이밍이라 여겨진다.

한편, 언행(言行)을 신중하게 삼가기 때문에 치세(治世)엔 등용되고 난세(亂世)엔 화를 면할 수 있다고 한 내용 역시 이 장에서는 놓쳐서는 안 되는 공자의 오리지널 가르침이다. 앞에서 공부한 공야장편 2장에서는 그저 남용을 평가하면서, ‘나라에 도가 있을 적에는 버려지지 않고, 나라에 도가 없을 적에는 화를 면할 것이다’라고 했던 평가에 대한 근거가 바로 이 장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군자의 출처(出處)를 논하는데 굳이 왜 언행을 삼가는 것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남용이 이해했던 스승 공자의 가르침을 따라가는 방법이다. 앞서 내가 설명했던 것과 같이 본래 백규를 지어 결코 잊지 않겠다며 외우도록 했던 무공의 의도가 그대로 남용에게는 이해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해석의 실마리는 앞서 살펴본 범 씨의 주석에 나오는 ‘그 말을 쉽게(함부로) 하고서 행실을 능히 삼가는 자는 있지 않다.’에 있다. 즉, 여기서의 말은 ‘약속’이다. 약속은 의미가 광범위한 정치적인 용어로까지 확장되는 개념이다.


단순히 사람과 사람 간의 만날 약속에서부터 국민들에게 약속하는 ‘공약’도 약속이며, 신하가 간언(諫言)한 것을 지키겠다고 대답하는 것, 역시 약속이다. 군주의 입장에서뿐만 아니라 신하가 명령을 받고 그것을 따르겠다고 답하는 것도 약속이며,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한 것 자체도 명백한 약속이다. 나라를 세울 때 백성을 위해 대의명분을 가지고 출발하겠다고 한 그 모든 것은 약속이고 그것은 말에서 비롯된다.

물론 남용의 경우에 평가한 것은 신하로서의 입장을 두고 말한 것이기에 나라에 도가 있어 제대로 그의 말이 위정자에게 받아들여진다면 그는 버려질 이유가 없을 것이고, 나라의 도가 없다면 그가 함부로 입을 열어 무언가 말조차 하지 않을 것이니 형벌을 면할 수 있다고 공자는 평가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작게 설명하여 자신의 몸 하나를 건사하는 것으로 구체적인 설명을 대신하는 듯 하지만, 공자는 이 작은 자신의 몸을 건사하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당시의 풍토와 그런 자들에 대해 눈에 보이지 않는 10톤짜리 철퇴를 가차 없이 내려치고 있는 것이다.


정작 찍어야 하는 국민들은 아무 관심이 없고, 사욕에만 눈이 먼 입후보자들만 관심이 지대한 지방선거가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선거의 가장 큰 핵심은 공약이다. 공약은 자신이 당선되면 하겠다는 공식적인 약속이다. 지방선거든, 총선이든, 대선이든 공약이 모두 지켜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이 대한민국에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 때마다 모든 입후보자들은 아무말대잔치를 하듯이 공약이라는 것을 쏟아낸다.

이 장에서 배운 대로라면 그렇게 공약을 아무말대잔치처럼 뱉어내기만 하고 지키지도 않으면 분명히 잘못되어야만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아무 문제없다면서 오히려 큰소리를 친다. 선거 때마다 정당이라는 이름으로 공천이라는 것을 하면서 그들은 기준을 세웠다며 늘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예컨대, 음주운전에 철퇴를 가할 수 있는 윤창호 법이 생겼을 당시 음주운전으로 형사처벌을 받은 자들들에게는 공천을 주지 않겠다고 빨간당이든 파란당이든 약속을 했었다. 그런데, 얼마 전 공천받아 입후보한 자들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파란당은 규율을 지키기는 했으나 말 그대로 그 커트라인만을 지켰을 뿐 음주운전 전력이 있어 문제가 될만한 사람임에도 윤창호 법 이전이라는 이유로 그냥 넘어갔고, 빨간당은 아예 그런 약속이 있었느냐는 식으로 음주운전 전력을 화려한 훈장처럼 달고 있는 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공천했다.


왜 국민들에게 했던 약속을 어겼느냐는 질문에, 빨간당 관계자는 지방까지 중앙당의 영향력이 닿지도 않아서 그들에게 지침을 보냈으나 그들이 제대로 지키기 못해서 그런 것이고, 정작 이미 공천을 해버렸는데 이제 와서 그것을 취소할 수도 없지 않겠느냐는 답변을 공식적으로 버젓이 떠들어댔다.

그들에게 말은 그저 말뿐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당신은 그들에게 표를 던져준다. 그래서 그들이 그러는 것인지 정말 모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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