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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y 30. 2022

아버지가 감옥에 가고 12살에 생활전선에 떠밀렸지만,

그 상처를 숙성시켜 소설의 자양분으로 삼아 영문학의 대문호로 인정받다.

227번째 대가의 이야기


1812년 영국의 포츠머스 시 교외에서 해군 경리국의 하급 관리였던 아버지의 슬하 여덟 아이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다섯 살 때, 가족은 채텀(Chatham)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그가 열 살 때, 가족은 다시 런던의 캄덴으로 이사했다.


사립학교에서 약간의 교육을 받았지만, 경제관념이 부족했던 아버지가 채무 관계로 투옥되어 감옥에 갇히면서 가세가 점점 기울었다. 그는 공부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으나, 기우는 집안 사정에 부모에게 등을 떠밀리다시피 하여 돈을 벌기 위해 12살 때 런던의 한 구두약 공장에 견습공으로 취직하여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하루 10시간의 노동을 해야 했다.


어릴 적 이러한 경험은 그에게 다양한 심리적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예컨대 어른들을 믿지 못하게 되었고, 지독한 가난으로 인해 돈을 버는 즉시 무조건 은행에 저축하는 자린고비 습관을 갖게 만드는 데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 당시의 경험은 그에게 결과적으로 큰 상처를 남겼는데, 자서전적인 소설인 <David Copperfield>(l849~50)에는 중산층에 속한다고 생각했던 어린 소년이 노동자로 전락하여 느끼는 고통스러운 좌절감이 아주 잘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의 거의 모든 소설에서 빈민이나 어려운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은 그저 양념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는 유년기의 아픈 기억의 결과물인 셈이다. 사실 그러한 경험은 그만의 특별한 상황이었다기보다는 자본주의 발흥기(勃興期)에 접어들던 19세기 전반기의 영국 대도시에서는, 번영의 이면에 무서운 빈곤과 비인도적인 노동(어린 노동자에 대한 혹사 등)의 어두운 면이 있었다.


그는 중학 과정의 학교를 2년 정도 다니다가 15세 때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환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1828년 법원의 속기사를 거쳐서 신문사 속기 기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여러 신문사에 글을 기고하게 되는데, 1834년 <Morning Chronicle>의 의회 담당 기자가 되어 처음으로 ‘boz’라는 필명으로 런던의 삶에 대한 여러 편의 글을 발표했고, 1835년 조지 호가스가 편집인인 <저녁 신문>에 '런던의 풍경' 등 여러 글을 기고했다.

영국을 대표하는, 아니 영문학을 대표한다고 일컬어지며 셰익스피어와 필적하는 대문호로 일컬어지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활동했던 소설가로, 대표작 <올리버 트위스트>, <위대한 유산>을 남긴 우리에게는 찰스 디킨스로 익히 알려진, 본명 찰스 존 허펌 디킨스(Charles John Huffam Dickens)의 이야기이다.


그는 살아있을 때 마치 현대의 할리우드 최고 스타가 누리는 것 같은 대중적 인기를 소설가로서 누렸고, 현대 주요 일간지가 사회 현안에 미치는 영향만큼이나 그의 의견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특히 가난한 사람에 대한 깊은 동정을 보이고, 사회의 악습에 반격을 가하면서, 사회에 대한 실제의 일들의 묘사를 이야기 형식으로 완성했다. 후기 소설에는 초기의 넘치는 풍자는 약해졌으나, 구성의 치밀함과 사회 비평의 심화는 주목할 만하다.


총 14권의 장편소설이 있으며, <크리스마스 캐럴>을 비롯한 다수의 중단편 소설과 여러 산문 작품을 남겼다.

이때부터 각종 정기 간행물에 기고(寄稿)하고, 뒤에 그것을 모은 <보즈의 소묘집(素描集) (Sketches by Boz)>(1836)을 출판했다. 이어서 24살이던 해, 자신이 편집위원으로 있는 잡지에 삽화와 함께 화가 시모어의 만화를 위해 쓰기 시작한 희극 소설 <피크 위크 클럽(The posthumous papers of the Pickwick Club)>(1836~37)을 기고한다.

중년 신사 픽윅이 영국을 여행하며 겪는 모험과 인정 넘치는 사건들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픽윅을 일약 영국 국민이 사랑하는 인물로 만들었다. 이것이 분책(分册)으로 출판되면서, 그는 일약 문학계의 스타로 부각하기 시작한다.


뒤이어 <올리버 트위스트>(1838)로써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작가로서 그의 입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그 후 <니콜라스 니클비(Nicholas Nickleby)>(1838∼1839), <골동품 상점(The Old Curiosity Shop)>(1840∼1841), <크리스마스 캐럴>(1843), <바나비 러지(Barnaby Rudge)>(1841), <돔비와 아들(Dombey and Son)>(1846∼1848) 등의 장편·중편을 발표하여 문명(文名)을 더욱 떨치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몸소 체험하여 알게 된 사회 밑바닥의 생활상과 그들의 애환을 생생히 묘사하는 동시에, 세상의 모순과 부정을 용감하게 지적하면서도 유머를 섞어 비판한 데에 있다.

디킨스는 조지 호가드와 인연을 맺으면서 1836년 그의 딸인 캐서린과 결혼하게 되었고, 처제인 메리를 데리고 첼시에 정착하는데, 메리가 1837년에 갑작스러운 병으로 죽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순수했던 메리에 대한 그리움은 이후 <골동품 가게 이야기>(1840∼1841)에서 어린 넬로 재현되어 묘사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1836년 캐서린과 결혼하고, 10명이나 자식을 낳으며 대중적으로 모범적인 가정을 이룬 사람으로 여겨졌으나 그즈음 여배우와 불륜을 저지르면서 작품의 분위기가 어두워진 것에서도 영향을 끼쳤다. 결국 1858년 이혼을 하는 그는 미국(1842)ㆍ프랑스ㆍ이탈리아(1844)ㆍ스위스(1846)를 여행하고, 잡지 <Household Words>(1849~59) 및 <All the Year Round>(1859~70)를 간행, 1858년부터는 자작(自作)의 공개 낭독을 시작하여 호평을 받았다.


1860년부터 켄트주의 개즈힐(Gad's Hill)에 정주, 1867~68년 다시 미국에 여행하고, 이때를 전후하여, 자전적 요소가 농후한 걸작 <David Copperfield>(l849~50)를 발표했다.

이 자서전적인 작품, <David Copperfield>를 쓸 무렵부터 그의 작품의 경향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여, 이른바 '디킨스 작품 후기적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다음 작품 발표된 <황폐한 집(Bleak House)>(1853)가 그 좋은 예이다.

드라마로 제작된 <황폐한 집>

이 작품에서는, 그의 전기 작품(前期作品)에 보이는 것처럼 한 사람의 주인공의 성장과 체험을 중심으로 쓴 것이 아니라, 상당히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켜 사회의 여러 계층을 폭넓게 바라보는 이른바 파노라마적인 사회소설로 접근해 가기 시작했다는 변화를 확실하게 실감할 수 있다. 개인의 힘으로써는 어찌할 수 없는 사회의 벽에 직면하여, 그의 자랑거리인 유머도 그 빛을 잃고 무력감과 좌절감이 전편(全篇)을 흐르게 되었다.


그러나, 2년에 한편씩 장편소설을 발표했던 그의 창작력은 조금도 쇠퇴되지 않아, 공장직공의 스트라이크를 다룬 <고된 시기(Hard Times)>(1854), 프랑스혁명을 무대로 한 역사소설 <두 도시 이야기(A Tales of Two Cities)>(1859), 그리고 다소 자서전적이며 환멸적인 이야기라 평가받는 <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s)>(1860∼1861) 등의 작품 이외에도, 대단히 많은 단편과 수필을 썼으며, 한편 잡지사의 경영, 자선사업에의 참여, 소인연극(素人演劇)의 상연, 자작의 공개 낭독회, 각 지방의 여행 등, 참으로 쉴사이 없는 정력적인 활동을 계속하였으므로, 그의 건강상태는 나빠졌지만 쉬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특히 빈자에 대한 깊은 동정을 보이고 사회의 악폐에 통격을 가하면서, 부한 인간과 사회의 여실한 묘사를 이야기 형식으로 완성했다. 후기의 소설에서는 초기의 넘치는 풍자는 약해졌으나, 구성의 치밀함과 사회 비평의 심화(深化)는 주목할 만하다.


소설의 인기로 많은 돈을 벌게 된 디킨스는 가정적으로는 별로 행복하지 못했다. 결국 거듭된 과로로 인해 <에드윈 드루드의 비밀>을 완성하지 못하고, 1870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디킨스는 집 주변을 걷다가 쓰러졌는데, 어떤 사람에게 땅바닥에 누워달라는 말을 듣자 "'On the ground?! (땅바닥이라니?!)'"라는 말을 크게 외치고는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이후 디킨스는 성공회 교회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시인들의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그가 잠들어 있는 웨스트 민스터 사원
He was a sympathiser to the poor, the suffering, and the oppressed; and by his death, one of England's greatest writers is lost to the world.

그는 가난하고 고통받고 박해받는 자들의 동정자였으며 그의 죽음으로 인해 세상은 영국의 가장 훌륭한 작가 중 하나를 잃었다.


디킨스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노동자들은 술집에서 “우리의 친구가 죽었다.”라고 울부짖었다 한다. 디킨스의 사망 소식에 당시 신문과 잡지들은 며칠 동안 그의 일대기로 지면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한 신문의 부고는 디킨스의 소설이 갖는 시대적 의미를 보여준다.


디킨스가 써서 출간한 소설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그날의 토픽 그 자체였다. 그의 소설은 정치나 뉴스와 거의 흡사하게 보였다. 마치 그게 문학에 속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사건인 것처럼 사람들에게는 인식되었다고 한다.

찰스 디킨스는 빅토리아 시대 최고의 인기 작가였으며 당대 최고의 유명인사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영국 최고의 소설가 중 한 명이자 ‘천재 중의 천재’로 평가받고 있다.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문학 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26명의 서양 문학 정전(Western Canon)에 그를 포함시켰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가 존경하는 작가로도 이름이 언급되기도 했다.


말 그대로 그는 시대를 타고난 풍운아였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는 영국 문학 제2의 전성기였다. 유럽 전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당대 유럽 대륙의 부르주아들에게도 영국 소설이 필수 교양 중 하나였을 정도로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때 카를 마르크스, 루카치 죄르지 등 여러 사람들이 자기의 저작에 19세기 유럽 소설에 대해 주요한 언급을 남겼는데 그들의 저작에 디킨스의 책들은 빠지지 않고 등장할 정도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물론 시기만 잘 타고난 것으로 ‘대문호’라는 칭호를 받을 수는 없다. 문학적 실력 못지않게 마케팅에도 천부적이어서 디킨스는 연재소설이라는 분야를 본격 개척했다고 해도 될 정도로, 결정적 순간에 이야기를 끊어 독자들이 다음번 연재를 간절하게 기다리게 하는 클리프행어 기법을 사용한 작가로도 유명하다.

생전에 엄청 잘 나갔기 때문에 신대륙에서도 디킨스의 작품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며, 디킨스의 작품을 실은 배가 부두에 닿으면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들었고 디킨스의 얼굴을 보겠다는 사람들이 항구에 줄을 서는 등, 세계 최고의 문학 ‘셀레브’로 볼 수 있었다. 그는 소설의 역사를 통틀어 대중 독자와 가장 가깝게 지냈던 작가들 중 하나로 꼽힌다. 문학사의 관점에서 보면, 작가와 독자가 일치되었다는 점에서 (중산계급의 예술 장르로서) 소설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이다.


디킨스의 작품 스타일은 현란하고 시적이다. 영국 귀족주의의 속물근성에 대한 그의 풍자는 사악할 정도로 익살맞다. 디킨스의 탁월성은 대중성과 사회 현안에 대한 성찰에 있다. 디킨스의 인생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대중과의 연애였다. 그는 평생 대중과 연애하듯이 그들에게 충심을 다했고 그의 모든 일이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그는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소설 낭독을 위해 영국 곳곳과 미국을 여행했다. 가는 곳마다 대대적인 성공이었고 대중들의 눈물 어린 환대와 지역 유지의 영접을 받았다.


그의 낭송 여행은 개인적 이벤트로 생각되지 않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공적이며 국제적인 행사로 받아들여졌다. 디킨스에 대한 대중의 사랑은 평생 변함이 없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여 경탄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사랑을 받았고 친구로 여겨졌다.

디킨스는 마치 현대의 최고 할리우드 스타가 누리는 만큼의 대중적 인기를 소설가로서 누렸고, 현대 주요 일간지가 사회 현안에 미치는 영향만큼이나 그의 의견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늘은, 당신이 어릴 적 책을 통해 스크루지를 만나고 올리버 트위스트를 만나며 이 대문호에 대해 제법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부분을 제대로 알려주기 위해 찰스 디킨스의 삶을 소개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버지와 가정에 무관심한 어머니 아래 구두약 공장에서 노동하며 어렵게 성장한 탓에 그는 이미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심리적 기저들이 평범한 형태로 안착하지 못했다. 실제로 찰스 디킨스를 연구했던 과학자들은 그가 평생 동안 심한 우울증, 아마도 양극성 장애를 앓았다고 제법 오래전부터 분석해왔다.


예컨대, 디킨스는 편집광적으로 저금을 했다. 돈을 번 뒤에도 어린 시절처럼 가난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편집광과 같은 모습을 보이며 가난을 두려워했다. 이 때문에 방문하는 곳에 있는 은행마다 계좌를 만들고 예금을 해두었는데, 디킨스가 죽은 뒤에도 몇 개나 있는지 다 알지도 못할 만큼 계좌가 많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스크루지처럼 살진 않았다. 그는 런던에 있는 ‘Foundling’이라는 자선병원의 후원자였으며 심지어 본인이 스스로 모금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또한 평소 친분이 있던 쿠츠 여사의 요청으로 그녀와 함께 ‘Urania cottage’라는 여성 쉼터 설립에 참여해 시설 내부 인테리어 계획까지 짜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위험에 노출된 매춘부들이 보호받을 수 있게끔 사회적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참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유년기 시절 어려운 고난과 경험들은 그가 작가로서 성공하는 데 있어 자전적인 요소들이 소설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 그만의 작품이 갖는 시그니처가 되어버렸다. 그가 새로운 양식과 새로운 방식을 소설에 선보인 것은 그가 여행을 다녀오거나 그가 새로운 경험을 통해(심지어 이혼을 포함해서) 얻은 그 모든 것들이 자양분이 되었다.


디킨스는 삽화가들에게 전체적 스토리를 먼저 제공하여 등장인물 및 설정을 그가 생각한 대로 정확히 그려 낼 수 있게 했다. 삽화가에게 1달분의 삽화 계획을 미리 준 후 디킨스는 글을 썼다.


그만큼 그가 만나고 경험했던 살아 숨 쉬는 인물들에 대한 연구는 그의 추억과 경험에 모두 녹아들어 있던, 준비된 상태였다, <Our Mutual Friend>의 삽화가인 마커스 스톤은 디킨스를 회상하며 그가 ‘한 등장인물의 아주 작은 특징과 내가 창작해 낸 인물의 생애를 세세하게 묘사할 준비’를 강조했던 것을 기억한다.


사람들은 흔히들 ‘내 이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 몇 권이나 나올 거야’라고 떠들어대곤 한다. 글을, 특히 소설을 한 번도 제대로 써보지 않은 이들의 허풍이고 넋두리이다. 글 중에서도 소설은, 특히 디킨스식의 캐릭터가 살아 숨 쉬는 소설을 쓰려면 그런 어설픈 넋두리로는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그저 막연히 스토리를 구상하고 적당히 그려낸 캐릭터는 살아 숨쉬기 어렵다. 그렇다고 현실에 있는 인물을 그대로 그리기만 하는 것은 다큐일 뿐 소설이라고 할 수 없다. 그 습작의 과정과 완성의 단계를 디킨스는 죽기 직전까지도 꾸준히 2년에 한 편꼴로 장편소설을 완성하는 일상으로 보여주었다.


그의 인물들이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은 대개 그가 겪은 고난과 아픈 기억들에서 살아 나온 것들이 대부분임을 알 수 있다. 앞서 말했던 바와 같이 그가 겪었을 우울증의 정도는 연구자들에 의하면 상당히 중증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본다. 그렇기에 그는 살기 위해 글을 썼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혼자서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사람들을 끊임없이 만나는 그 기운 빠지는 낭독회를 통해 죽기 두 달 전까지도 즐겁게 매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자신의 토해내는 아픈 기억의 형상화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웃기는 이야기로 화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치유하려고 평생을 노력했던 것이다. 그 가설을 입증하는 가장 객관적인 근거가 그의 삶이 변화할 때마다 크게 변모한 그의 작품세계와 분위기, 그리고 작중 인물들을 들 수 있다.

그저 일기 같은 자기 신변잡기를 쓰는 것만으로 힐링이 된다고 느끼는 이들도 브런치에 수없이 많다. 하지만,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전문적인 글을 쓰는 프로페셔널의 그것과 아마추어의 글쓰기를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고, 언어도단이다.


당신이 읽는 사이 빠져들어 함께 호흡하고 어느 사이엔가 그 안에 빠져들어가 등장인물이 된 듯 만드는 글이란, 글쓴이에게 있어서는 또 다른 그의 삶과 고난과 피와 땀이 녹아들어 가 만들어낸 결정체인 것이고, 그의 아픔이고 그의 힘겨움이며, 그에게 있어서는 우울한 현실을 살게 만드는 희망이자 원동력과 같은 것이다.


당신이 쉽게 여기는 글도 글이고 그의 작품도 글이라고 한다면 더 이상 당신에게 해줄 말은 없다. 당신이 한참 공부하고 싶고 학교에 가고 싶은데 부모에게 등 떠밀려 12살에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공장에서 일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당신이 고난들을 꿋꿋이 극복하고 그 모든 아픔들을 글로 승화시킬 수 있었을 것인가?

‘대문호’라는 칭호는 그저 글을 쓰는 과정에서 툭 하고 떨어지는 감이 아니다.


현실에서의 삶이란, 그 어느 하나 우연히 아무렇지도 않게 보상처럼 떨어지는 것이란 없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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