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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24. 2022

진정한 신하가 갖춰야 할 덕목은 무엇인가?

그저 자리보전하겠다고 생존하는 이들에게 고함

季子然問: “仲由·冉求可謂大臣與?” 子曰: “吾以子爲異之問, 曾由與求之問. 所謂大臣者, 以道事君, 不可則止. 今由與求也, 可謂具臣矣.” 曰: “然則從之者與?” 子曰: “弑父與君, 亦不從也.”
季子然이 물었다. “仲由와 冉求는 大臣이라고 이를 만합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그대가 특이한 질문을 하리라고 생각했었는데, 마침내 由와 求를 묻는구나. 이른바 大臣이란 道로써 군주를 섬기다가 불가하면 그만두는 것이다. 지금 由와 求는 숫자만 채우는 신하라고 이를 만하다.”〈季子然이 물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따르는 자들입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와 군주를 시해하는 것은 또한 따르지 않을 것이다.”

이 장은 이제까지의 무난하고 간략하게 진행되었던 대화 내용과는 조금 다르게 다소 등장인물들과 대화의 난이도가 조금 복잡하여 누가 누구의 이야기를 왜 하는지에 대해 잘 파악하는 것부터가 관건이다.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이 대화는 계자연(季子然)이 공자에게 자신의 가문에서 가신으로 일하는 자로와 염구에 대해 묻고 그것에 대해 공자가 답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왜 누가 누구를 이야기하는 것이 복잡하다고 했는지 주자의 주석을 통해 그 행간의 의미까지 파악해보기로 하자.


먼저 계자연(季子然)이, 중유(仲由;자로)와 염구(冉求;염유)를 大臣이라고 이를 만하냐고 묻는데, 이 질문부터가 공자의 심기를 건드리는 형태이다. 이 부분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계자연에 대해 설명한다.


자연(子然)은 계씨의 자제이다. 그의 집안에서 두 사람을 신하로 삼은 것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겼으므로 물은 것이다.


계자연은 공자가, 대부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군주보다 더한 부와 권력을 누렸다고 하여 마뜩잖아하던 노나라 대부인 계환자(季桓子)의 동생이자, 계평자(季平子)의 아들이니 계강자의 숙부였던 인물로 그 역시 대부의 신분이었다.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게 된 결정적인 이유도 계환자의 견제와 제나라의 획책 때문이었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뒤에 공부할 ‘미자편(微子篇)’ 4장에 언급이 나오니 후술 하기로 한다.


염유가 계씨의 가신이 된 지 몇 년이 지나 공자는 계강자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노나라로 돌아온다. 이 장은 공자가 그렇게 천하 주유를 마치고 염유의 노력에 의해 고국으로 돌아온 공자가 계자연을 만난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니 계자연은 공자의 제자 중에서도 뛰어나다고 하는 제자를 두 명이나 가신으로 두었으니 득의양양하여 공자에게 이 질문을 던진 것이다.


왜 공자의 심기가 불편했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원문에서 공자가 그 거슬림에 대해서는 ‘그대가 특이한 질문을 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고작 그런 것을 묻는구나’라며 반응하는 것에서 충분히 읽고도 남음이 있다.


‘異(이)’는 보통이 아닌 것이다. ‘曾(증)’은 乃(내, 마침내)와 같다. 두 사람을 경시하여 계자연을 꺾으신 것이다.

주자의 설명과 같이 공자는 자신의 제자 두 명을 별것 아닌 것처럼 경시하는 듯한 말투로 고작 그런 거 물어보는 수준밖에 안되느냐고 그의 오만함에 대해 경고한 것이라 설명한다. 그런데 이 주석에도 정작 공자가 왜 그의 말이 건방지다고 여겼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당시의 공부하는 이들이라면 당연히 알 것이라고 여긴 수준이어서 빼먹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당신을 포함한 현대인들은 도무지 계자연이 무슨 오만방자한 태도를 보인 것인지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러면 원문을 계속 읽으면 뜻을 곱씹으면 된다. 원문에 그가 무엇이라 물었던가? 계속 읽다 보면 당신이 이해는 못하지만 어떤 단어가 문제일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짐작이 갈 것이다.


맞다. 대신(大臣)이라는 표현이 바로 문제의 발단이다. 원문에 내가 그 용어를 풀어 해석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 것은 그 대신이라는 단어가 고문에서는 당연히 ‘조정 대신(朝庭大臣)’을 의미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했지만 계씨 가문은 대부이지, 군주가 아니다. 때문에 자로와 염유는 대부 집안을 위해 일하니 대신이라 칭하는 것은 그야말로 참람된 호칭이 아닐 수 없다. 대부의 집안을 위해 일하는 가신(家臣)이니 제대로 된 호칭을 하지 못한 것을 넘어 참람되게 자신들이 마치 군주인 양 말한 것이다. 


그런데 자신들을 올려서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 일하는 이들을 가신(家臣)이 아닌 대신(大臣)이라 올려 불러 덩달아 군주 인척을 했으니, 공자가 그것이 실수인지 건방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똑같은 방식으로 제멋대로 대신으로 올려버린 자신의 두 제자를 홀대하고 경시하듯 낮춰버린 것이다. 즉, 제자들이 별것 아닌 자들이 된다면 그들이 받들고 있는 대부도 별 것이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계자연이 그 심오함을 알아들었는지 그렇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공자의 논법은 알아듣는 이들인 치명상으로 이미 얼굴이 달아올라 뭐라 대꾸도 못하겠으나 계자연은 자신이 던진 질문의 답을 원하고 눈만 껌벅이고 있으니 공자는 그가 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다시 한번 그에게 1톤이 넘는 철퇴를 내던져 제대로 알아먹으라고 호통을 친다.


계자연이 언급한 ‘대신(大臣)’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그대로 원용하여 본래 그 단어의 의미가 지금 네가 말한 그런 가벼운 의미의 가신(家臣)에게 사용할 수 없는 것임을 ‘道로써 군주를 섬기다가 불가하면 그만두는 것’이라는 묵직한 철퇴로 일침을 가한다.


이 공자의 답변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은 해설을 주석으로 달고 있다.


‘道(도)로써 군주를 섬긴다.’는 것은 군주의 욕망을 따르지 않는 것이요, ‘불가하면 그만둔다.’는 것은 반드시 자신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다.


원문만으로는 그것이 철퇴인지 일침을 가한 것인지 모호할지라도 주자의 이 주석을 읽게 되면 공자가 말하려는 정확한 의도가 얼마나 섬뜩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염유

다시 말해, 지금 자로와 염유는 가신으로 있으니 너희 대부 집안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지만, 네가 함부로 사용했던 대신의 용법에 맞는 수준이었다면 너희처럼 참람한 가문이 대부가 아니라 군주였다면 당연히 그 사욕에 따라 일을 하지 않을 것임은 물론이고, 그 도에 따라 일하는 것이 막히면 주저할 것도 없이 그만둘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하게 논법의 활용을 위해 자로와 염유를 ‘숫자만 채우는 신하(具臣)’정도로 폄하하듯 설명한다. 숫자만 채운다는 의미에 대해 주자는 그것이 말 그대로 신하의 머릿수만 채우는 수준이라고 설명한다.


이 정도까지 신랄한 일침을 가했더니 아무리 눈치가 없는 계자연이라고 하더라도 그 흐름을 알아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계자연은 그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 정도로 자신의 제자를 평가절하하는 공자에게 그렇다면 두 제자가 ‘그저 명령을 하면 따르기만 하는 자일뿐이냐’며 공자를 도발한다. 

계자연의 이 반문 속에는 시비 거는 듯한 묘한 거슬림이 느껴진다. ‘그저 따르기만 하는 자들입니까?’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조금 바꾸면 ‘그렇다면 공자의 대단한 제자들일 테니 그저 따르는 척만 하는 것에 불과하단 말입니까?’라고 시비를 거는 말투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주자는 계자연의 생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두 사람이 이미 대신이 아니라면 계씨가 하는 바를 따를 뿐이라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공자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라면 성인의 경지에 올라 아무렇지도 않은 독설을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그렇게 쏟아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공자는 더 강한 보이지 않는 펀치를 마지막으로 계자연의 급소에 정확하게 가격한다.


“아버지와 군주를 시해하는 것은 또한 따르지 않을 것이다.”


아! 여기서 이 장이 끝난 것은, 계자연이 도저히 그 말에 대꾸를 할 수 없을 지경으로 귓불까지 달아오를 정도의 창피함과 모멸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배우는 자들은 상상한다. 공자의 이 대답에 대해 주자는 주석을 통해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이 두 사람(자로, 염유)이 비록 대신의 도에는 부족하나 군신 간의 의리는 익히 들었으니, 시해하고 반역하는 큰 잘못은 반드시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한 것이다. 이는 두 사람을 난에 죽어도 빼앗을 수 없는 절개로써 깊이 許與(허여) 하시고, 또 계씨의 신하 노릇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은근히 꺾으신 것이다.


처음 자기 가문에 공자의 제자 두 명이 가신으로 왔으니 그렇게 대단한 성인의 제자들이니 대신급이냐고 묻는 것에서부터 공자는 그의 오만함과 그 가문이 대대로 보여왔던 참람함을 똑같은 방식으로 꾸짖었다. 


그런데 자신의 참람된 실수에 대해서 고치는 것은 고사하고 공자의 지적에 발끈하여 똑같이 시비를 걸어보겠다고 하는 계자연에게 공자는 자신의 논리에 입각하여 비록 두 제자가 대신급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기본은 배운 자들이기에 군주와 부모를 배신하는 짓에는 결코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못을 막는다.

이것은 위 주석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 하나는 당신의 집안이 아무리 참람된 짓을 하더라도 선을 넘게 되면 내 제자들은 결코 의리와 절개가 있으니 그것을 따르지 않을 것임을 강조하여, 그런 참람된 언행을 하는 계자연을 비롯한 대부 집안에 대한 엄중한 경고의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이미 그런 상황을 벌여놓은 가문이기에 지금 가신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두 제자 모두가 진심으로 너희 집안을 따르고 부유하게 만들어주려는 것은 아니라고 따끔하게 꼬집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당시의 상황과 이 장의 의미에 대해 윤 씨(尹焞(윤돈))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계씨가 권력을 독단하고 참람하였는데 두 사람이 그 집에서 벼슬하면서 이것을 바로잡지 못하였고, 不可(불가, 바로잡을 수 없음)함을 알면서도 벼슬을 그만두지 못했으니, 숫자만 채운 신하라고 이를 만하다. 이때에 계씨가 이미 군주를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으므로 인재를 얻음을 스스로 자랑하였고, 자기를 따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아버지와 군주를 시해하는 것은 또한 따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니, 이 두 사람은 거의 이것을 면할 수 있었다.”


이 주석에서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자신의 제자가 두 명이나 계씨의 집안에서 가신 노릇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을 바로잡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박차고 나오지도 못한 것에 대한 스승 공자의 아쉬움은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 


실제로 염유는 季子가 泰山(태산)에 旅祭(여제)를 지내는 데도 막지 못했고 苛斂誅求(가렴주구)를 그만두도록 諫(간) 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제자들을 아끼고 그들이 가지고 있었을 그 고민과 갈등을 모르는 바 아니었기에 그 원인이 되는 계자연에게 돌직구를 던지는 것으로 자신이 신뢰하는 제자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이들이 아님을 강조하였고, 무엇보다 그 기회를 통해 계씨 가문의 무도함에 대해 명확하게 밝힌 것이다.


당대 최고의 권력을 자랑하던 가문의 대부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대놓고 ‘당신들이 군주를 업신여기다 못해 설마 군주를 밀어내고 권력을 차지하겠다는 짓거리까지는 하지 않겠지?’라고 말할 수 있는 배포 있는 사람이 공자 말고 누가 또 있단 말인가?



새 정부가 인사를 과장된 말로만 포장하던 진짜 ‘검찰공화국’으로 떡칠을 하고 있다. 이른바 그의 논리는 ‘내가 같이 일해봐서 아는데, 검사들이 진짜 똑똑하고 모든 일을 잘 처리한다니까.’이다. 


동의할 수도 없는 논리이지만, 아무리 자신이 속해 있던 집단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감안해주더라도 실제 지명되어 이제까지 뒷말이 나왔던 이들만 보더라도 그들의 면면은 만만치 않았다.


공안검사의 이름으로 멀쩡한 탈북민을 간첩으로 몰고도 아무런 법적 추궁을 받지 않은 것은 애교이고, 기자들을 만나 버젓이 지저분한 물밑 정치를 벌이고서도 절대 풀 수 없다는 아이폰의 비밀번호를 절대 풀어주지 않는다고 버티면 법적으로 어쩔 수 없다는 현장에서 익힌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무혐의를 받은 이가 법무부의 수장이 된 지경 정국이다.

이 장의 가르침에 의하면, 군주가 된 자가 제대로 된 신하의 말을 듣지 않는 경우에 신하 된 자는 바르게 간언 하되 시정되지 않는 것을 보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그를 떠나야 한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에는 이것이 도가 아니라며 기득권을 놓고 떠나는 자는 고사하고 제대로 간언 하며 바로잡겠다는 목소리를 내는 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당신은 정치인이 아니니 상관없다고 생각하나? 당신이 속한 곳에서 당신은 무엇이 달라, 정치인들을 욕할 자격이 있느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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