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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28. 2022

오십을 다 채우지 못하고 요절한 피아니스트였지만,

결코 다른 작곡가의 곡을 연주만 하는 사람으로 남길 거부하다.

239번째 대가의 이야기.     


1932년 캐나다의 토론토 온타리오 사우스우드가 32번지에서 태어났다. 모피상인 아버지는 아마추어 바이올린 연주자였고, 어머니는 피아노와 성악을 공부하고 가르쳤다. 그의 외가 쪽 친척으로 노르웨이의 작곡가 에드바르 그리그(Edvard Grieg)가 있었지만, 그를 의식한 적은 거의 없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음악을 듣고 자란 그는 글 읽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악보를 읽었을 정도로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 갓 태어난 굴드가 바로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을 보고, 의사가 ‘이 아이는 커서 피아니스트 아니면 의사가 되겠군.’이라고 농담을 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앉아 있을 수 있게 되자마자 피아노를 가르쳤고, 이내 그가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5세 때 그는 단순한 곡들을 연주할 수 있었으며, 즉흥적으로 곡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리고 6세 때 요제프 호프만(Josef Hofmann)의 독주회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아 피아니스트의 꿈을 키웠다.     


1942년 10세 되던 해에 토론토의 왕립 음악원(The Royal Conservatory of Music)에 입학하여 칠레 출신의 알베르토 게레로(Alberto Guerrero)의 가르침을 받았다. 게레로는 그의 피아니즘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스승으로, 낮은 의자에 앉아 건반과 수평이 되도록 손가락을 유지하는 법과 팔의 힘으로 건반을 내려치기보다는 손가락 끝마디의 힘만을 이용해 연주하는 법 등 그만의 피아노 테크닉을 가르쳤다.


정작 나중에 그가 나중에 자신의 연주 방식은 모두 스스로 계발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게레로를 스승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는 것은 웃픈 아이러니였다.     


그는 1946년 학교를 졸업하고도 1952년까지 게레로의 지도를 받았다. 그밖에 오르간은 프레더릭 실베스터(Frederick C. Silvester)에게, 음악 이론은 레오 스미스(Leo Smith)에게 배웠다.

캐나다 출신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바흐에 능통한 거장이며,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역사상 최고의 피아니스트 10명을 선정하는 기사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 피아니스트인 글렌 허버트 굴드(Glenn Herbert Gould)의 이야기이다.     


그는 매우 특이한 연주 스타일과 성격으로 평생 ‘괴짜’라는 칭호를 달고 살았던 연주자이다. 파티장에서도 장갑을 끼는 등 결벽증이 매우 심했다. 실제로 결벽증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정신질환을 갖고 있던 피아니스트였고, 신경과에서 처방받았던 약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슈트케이스에 늘 담고 다닌다는 루머가 있었을 정도였다.     


스타일도 그렇지만 타고난 테크닉도 귀신을 방불케 하는 수준이었다. 레전드 피아니스트들 대부분이 그렇다고는 해도 극한의 셈여림 컨트롤을 기반으로 한 믿을 수 없는 속주는 역사적 피아니스트들 사이에서도 굴드만의 독특한 무기라고 할 수 있었다.

굴드는 어린 시절부터 은둔형 폐인끼가 충만했다. 그의 어린 시절 친구인 로버트 풀포드는 그를 늘 혼자 있기 좋아하는 소년이라고 표현하며 그의 비사교적인 천성을 기억했다.


1944년 12세 때 키와니스 뮤직 페스티벌에서 우승했고, 이듬해인 1945년 이튼 오디토리엄에서 오르간 연주로 최초의 무대를 가졌다. 또 같은 해 음악원 오케스트라와 함께 본격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어 베토벤의 4번 협주곡을 연주했다. 굴드의 10대 시절 그의 유일한 우상은 오스트리아의 피아니스트 아르투어 슈나벨(Artur Schnabel)이었다.


특히 그의 베토벤 연주는 거의 매일 들으면서 슈나벨적인 피아노 어법을 만들어내는 미묘한 음조를 찾고자 애썼다. 그는 1947년 토론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베토벤 협주곡 4번 전 악장을 연주했다. 이로써 그는 고향 무대에서 완전히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1955년 워싱턴 D.C. 와 뉴욕에서 바흐의 골든베르크 변주곡으로 리사이틀을 개최했다. 하지만 캐나다에서의 성공과는 달리 미국 공연은 사실상 참담했다. 음악적 변방에 속하는 캐나다 출신의 젊은 피아니스트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몇 안 되는 청중 가운데 새로운 피아니스트를 찾고 있었던 컬럼비아(CBS) 음반사의 녹음 책임자인 데이비드 오펜하임(David Oppenheim)이 앉아 있었다.


그는 굴드의 연주에 마음을 빼앗겼고, 이튿날 바로 굴드에게 연락해 컬럼비아 음반사와의 녹음 계약을 추진했다. 이 계약은 굴드의 인생을 한방에 바꿔버리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1955년도에 미국 음반회사인 CBS(콜롬비아)에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녹음을 계기로 젊은 나이로 세계적인 거장 반열에 올랐다. 당시 녹음 상황을 기억하는 이들에 증언에 의하면 당시 뉴욕에 나타난 굴드의 모습은 가관이었다고 한다.      


그는 두터운 코트에 머플러를 두르고 베레모에 장갑을 끼고 있었다. 뉴욕의 물은 마실 수 없다면서 식수로 사용할 두 개의 물병을 지니고 5개의 약병과 그 유명한 의자까지 직접 가지고 나타났다. 이 의자는 다리가 모두 고무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연주할 때 몸의 각도에 따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다. 연주에 들어가기 전 굴드는 두 손을 20분간 더운물에 담그고 자신이 가져온 수건으로 손을 닦아 냈다. 녹음이 진행되는 동안 굴드는 도취된 상태에서 입을 벌리고 노래를 불렀으며 몸을 앞뒤로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했다. CBS의 녹음 기술자들은 굴드의 허밍을 녹음하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굴드의 의자 복제품

이 음반은 1955년에 녹음하여 1956년 출시되자마자 곧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이후 한 번도 절판된 적 없이 오늘날까지 잘 팔리고 있다. 이는 엄청난 대히트였다. 굴드는 1956년부터 1957년 미국 순회연주를 가졌고, 1957년에는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독주회를 개최했다. 소련에서의 연주는 굴드에게 유럽 순회연주를 알리는 첫 신호탄이자 세계무대에 자신을 알리는 절호의 기회였다.

https://youtu.be/Cwas_7H5KUs

굴드는 바흐와 베르크, 베토벤으로 꾸며진 첫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이후 베를린으로 건너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두 사람은 이후 서로의 예술에 대해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으며, 이 공연은 굴드의 명성을 한층 더 높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굴드의 주위 사람들은 모두 기뻐했으나 조용하고 고독함을 즐기는 그에게는 힘든 점도 있었다. 그의 인터뷰에서 고백했듯이 갑자기 연주해 달라는 요청이 전 세계에서 쏟아져 들어왔고, 굴드는 점점 더 견디기 힘들어했다.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젊은 피아니스트가 한순간에 세계적 거장 반열에 드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늘 고독함 속에서 혼자 일하는 것을 즐기던 굴드에게 주위의 관심을 받고 세계의 무대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은 힘든 시련이었다. 그 시기에 굴드는 다양한 정신적-신체적 고통과 병에 시달렸다. 그래서인지 그는 30대에 은퇴를 선언했고, 무대 활동보다는 녹음 활동에 더 열중했다.


사실상 30대 이후로 굴드는 그야말로 클래식판 히키코모리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캐나다에 은거하면서 녹음 위주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녹음 활동이 연주자가 최상의 컨디션으로 연주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연주회에서 비롯되는 불확실한 여러 가지 상황을 피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 청중과의 교감을 통해 양산되는 흥분 상태는 진짜 연주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의 음악은 원래부터 개성적이었지만, 30대 이후의 녹음을 들어보면 음악 초보자도 굴드 연주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굴드 표 녹음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불과 쉰의 나이였던 1982년에 요절한 말년의 굴드는 정신상태뿐만이 아니라 육체적 상태도 엉망이었다. 당시 10년 만에 굴드를 방문한 굴드의 친구와 그의 아내는 굴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얼굴은 퉁퉁 붓고 피부는 죽은 사람 같아서 젊었을 적의 미모는 찾아볼 수가 없었고 눈에서는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미 그 당시 그는 음악 작업보다는 방송 작업과 다른 분야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취미로 피아노를 치는 수준이었다. 사실 굴드는 젊었을 적부터 자신이 피아노만 잘 치는 사람보다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모든 분야에 만능적인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했었다.


당시 CBS 스튜디오에서 가끔씩 연주 녹음 작업을 했는데, 죽기 몇 해전부터 굴드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며 자신이 사교성이 없어서 친한 이가 거의 없기에 장례식에는 사람들이 아무도 안 올 것이라며 말했다. 이렇게 매우 비관적으로 삶과 동시에 다시 한번 세계적인 업적을 이루고 싶었는지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난 20년의 세월 동안 과다한 약물 복용으로 인해 그의 몸은 서서히 망가지고 있었고, 그의 말년 연주 동영상을 보면 손가락이 가끔씩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게 약물 부작용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굴드의 일기에는 말년에 손가락의 이상을 호소하는 글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굴드는 재녹음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다시 한번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녹음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굴드는 사망하기 바로 전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또다시 녹음했다. 본래 한 번 녹음했던 것을 다시 녹음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그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1981년에 발표된 두 번째 녹음에는 디지털 음을 포함한 최신 기술을 이용했으며, 그가 평소 선호했던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아닌 야마하 피아노를 사용했다. 1955년 음반이 바흐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신선함과 명쾌함, 질주하듯 빠른 속도감을 보여주었다면, 1981년 음반은 중년에 접어든 피아니스트의 관조와 여유, 고양된 예술정신을 느끼게 해 준다.     

1981년에 녹음된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사실 1982년, 굴드 사후에 발매되었다. 비평가 팀 페이지에 의하면 첫 번째 골드베르크 녹음 중에서 몇몇 부분이 굴드 맘에 들지 않았던 것도 재녹음의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1982년 9월 27일 굴드는 발작을 호소했다. 그의 비서가 의사를 불렀으나, 굴드의 비상 전화에 질린 의사는 그냥 응급실에나 가라고 했고, 병원을 매우 싫어하는 굴드는 계속 버티다가 뒤늦게 병원에 갔다. 병원에서 어찌할 방법은 없었고 증상은 갈수록 악화되어 의식을 잃고 뇌사 상태에 이르자 아버지의 동의하에 호흡기를 떼고 장례식을 치렀다.     

굴드가 나고 자라고 생활하고 죽은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골드베르크의 아리아의 처음 몇 마디가 각인되어 있다.     


당대 최고의 명성을 지닌 바흐 음악 스페셜리스트답게 성부를 나눠 경중에 차등을 준 채로 선적인 흐름을 만드는 식의 바흐 음악에 필수 불가결한 비상한 테크닉을 지녔다. 낭만파 음악을 싫어해서 낭만파 음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피력하기도 했다.     


나는 19세기 전반부에 쓰여진 독주 기악곡들은 다소의 베토벤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보잘것없는 실패작들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일반화는 쇼팽, 리스트, 슈만 등에도 해당된다. 당신도 알다시피 초기 낭만파 작곡가들 중 어느 누구도 피아노곡 쓰는 법을 알지 못했다.

아 참, 그들은 페달 사용이나 극적 효과를 내는 것, 사방팔방으로 음들을 흩뿌려 놓는 것은 알았지만 진정한 곡다운 곡은 쓰여진 것이 별로 없다. 그 시기에 쓰여진 음악은 공허한 극적 제스처와 전시효과로 가득 차 있고, 세속적이며 쾌락주의적인 성향이 나로 하여금 흥미를 잃게 했다. 위대한 음악을 접할 때 내가 바라는 모든 기준이 되는 화성과 리듬의 다양성, 대위법적 창안은 이런 곡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한 마디로 굴드는 바흐와 하이든, 그리고 베토벤의 걸작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명료한 형식미와 탄탄한 구성, 대위법으로 대표되는 다성음악의 미학을 선호한 반면, 쇼팽과 리스트로 대표되는 낭만파 피아니즘에 대해서는 극불호에 가까웠던 피아니스트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레퍼토리에서는 후기 고전주의, 초/중기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레퍼토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대신에 후기 낭만주의의 황혼과 현대음악의 태동을 각각 상징하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아르놀트 쇤베르크 등의 피아노곡들을 레퍼토리에 포함시켰다.      

굴드는 이 두 작곡가를 굉장히 좋아했는데, 그중에서도 슈트라우스의 마지막 오페라인 카프리치오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이외의 낭만파 작곡가 중에는 브루크너를 높게 평가했는데, 보잘것없는 낭만파 음악의 피아노 작품을 연주하는 것보다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피아노로 편곡해 연주하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굴드가 좋아했던 작곡가들은 대부분 피아노 작품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게다가 그의 몇 안 되는 고전, 낭만주의 음반의 해석은 논란이 뜨겁다. 그가 연주한 고전 시대 작곡가 작품의 속도는 대부분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리거나 전혀 말도 안 되는 듯한 해석을 집어넣기 일쑤여서 그 작곡가의 음악에 정통한 전문가들에게 욕을 밥 먹듯이 먹는 건 양반이고, 그를 매장시키려는 음악가 집단이 생겨날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로 굴드의 모차르트 소나타는 어처구니없이 빠른 데다가 모차르트의 피아노 음악에서 중요시하는 음색과 이음줄(슬러)의 표현 대신 정말 드라이하기 짝이 없는 푸석푸석함으로 가득 차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베토벤의 유명한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은 또 그 반대로 1, 2악장이 엄청나게 느려서, 1악장의 경우는 트레몰로를 16분 음표처럼 연주한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반면 피아노 소나타 16번 Op.31-1의 1악장 연주는 외계인이 연주하듯이 말도 안 되는 속도의 아르페지오를 선보여 지금까지도 많은 클래식 팬들을 당혹게 한다.     


클래식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굳이 현대 클래식 연주자를 소개하는 것은 진입장벽을 만드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내가 이 시리즈에 굴드를 소개하는 것은 그의 연주 음반이나 음악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고 함이 아니다.     


1957년의 소련 정부는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캐나다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서방과의 교역을 추진하면서 ‘철의 장막’을 조금은 열어야 하는지를 고민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미국의 피아니스트를 초대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상징적으로 글렌 굴드는 냉전의 침묵을 깨는 최초의 북미인이자 캐나다인의 영광을 차지했다.     

모스크바 주립음악원의 그랜드 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글렌 굴드는 익히 연주해온 프로그램들을 선보였다. 바흐의 <푸가의 기술> 중 몇 작품과 파르티타 6번 마(E) 단조, 베토벤 소나타 30번 작품 109, 그리고 베르크의 소나타였다. 청중들은 굴드의 연주에 얼어붙은 듯했다.     


러시아인들은 그토록 생동감 넘치고 파격적으로 바흐와 베토벤을 연주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베르크의 소나타는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12음 기법 작곡가들의 음악이 퇴폐적인 것으로 규정되어 연주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뭐니 뭐니 해도 그의 연주 가운데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음악은 역시 바흐이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바흐 음반에 대해 말하자면, 그 시대의 현재나 과거, 그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어떤 해석과도 일치하지 않는 독창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해석과, 미켈란젤리 같은 대가들과 비견되는, 굴드만이 낼 수 있는 특이한 피아노 음색으로 많은 평론가들이나 마니아, 전문가들에게 바흐의 음악에 대해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고 극찬받는다.     


그는 모든 것을 빨리 끝냈다. 일찌감치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천재 피아니스트로 인정받았고, 일찍 은퇴하여 노년을 즐기듯 40대를 보냈고, 뭐가 그리 바빴던지 50을 넘기지 못하고 쉰에 인생을 마치고 돌아갔다.     


그는 클래식을 연주했지만, 자신만의 연주 세계를 확고하게 만들어낸 피아니스트로 인정받는다.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그저 기존의 유명한 곡들을 잘 연주하는 것이라고 여겨지던 풍토에서 그를 기점으로 자신만의 곡해석과 연주 방식이 평가의 더 큰 기준으로 되기 시작한 분기점이 바로 굴드였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가 세상과 그리고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던 것이 그의 실패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나는 그것을 대가라고 본다. 그가 본래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하고 그것을 즐기는 사람이라서 그것을 포기하고 음악에 헌신한 것이 아니라 본래 더 좋아하던 음악에 대한 헌신에 자신을 온전히 몰입하는 방식으로 외재적인 사교성에 개선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을 뿐이다. 물론 그것이 당연하다거나 칭찬할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만한 수준의 대가가 되기 위해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버젓이 이것저것 누릴 것 즐길 것 다 하면서 대가의 경지에 오를 수는 없는 법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더 큰 가치가 있기 마련이다. 적절한 밸런스를 유지하는 삶을 지향할 수도 있고, 자신이 더 큰 가치를 두는 것이 올인하고 다른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저마다의 가치관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는 없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자신의 삶을 대가로 오롯이 치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삶을 부유하면서 욕심만 내는 어리석은 자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이 더 많이 갖지 못하고 더 많이 누리지 못한 것을 위를 보며 부러워하고 질시하고 심지어 씹어대기까지 한다. 그것이 얼마나 못난 삶인지에 대해서조차 그들은 인지하지 못한다. 패배자의 삶은 언제나 그렇듯 구차할 뿐이다.    

  

선택하고 노력하는 자는 그나마 할 말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렇지도 못하면서 그저 부유하는 삶을 사는 자는 선택할 자격도 겨를도, 미래에 대한 어떤 희망도 있다 말할 수 없지 않을까? 오늘 당신의 삶을 한번 돌아보는 시간을 아주 짧게라도 가져봄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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