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이건 듣는 순간 뭔가 좀 달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거슬렸다. 뭐라고 딱히 정의 내릴 수 있을만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글을 쓰기 시작한 이래로 내가 나에 대해서 혹은 나를 글 속에 담아낸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니는 광화문 한복판에서 속옷바람으로 마라톤을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나를 아무런 여과 없이 보여줘야 한다는 의미에서 내게 있어 ‘자서전(自敍傳)’이라는 단어는 그닥 좋은 느낌도 아닐뿐더러, 게다가 그 단어를 문학전공자도 아닌 여자의 입을 통해, 그것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과제로 받는 것은 더더군다나 여간 마뜩잖은 일이 아니었다.
“자신이 살아왔던 생애, 길다면 길 것이고 짧다면 짧을 수도 있죠. 이제까지의 자기 삶을 다큐멘터리처럼 정리해본다고 생각하세요. 매스컴의 역할이 어떤 한 개인을 비추는 느낌을 읽을 수도 있을 겁니다. 특히 뭔가 액티브한 시기를 확대해서 한 사건을 주목하는 방식을 추천해 드릴게요. 어떤 사건을 기점으로 자신의 인생관이나 가치관이 바뀌게 되었다거나 하는 거라면 더더욱 좋겠네요.”
가만 생각해보면 써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을 뿐 몰래 그것도 워드를 이용하지도 않고 직접 한 땀 한 땀 어머니의 삯바느질처럼 비밀일기처럼 자서전 아닌 자서전을 썼던 일도 습작시기에는 있기도 하였다. 하지만 지금 난 명백히 전문적으로 글을 쓰고 돈을 받는 글쟁이이며 정식으로 등단씩이나 한 지 이미 수년이나 지난 지금, 새삼 나에 대해 뭘 적으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렇게 여기 아줌마들 틈에서 평생대학원의 강의를 듣는 나는 또 뭐 하는 짓인가? 자신의 지적 허영심 내지는 문학소녀의 못다 이룬 날개를 펼쳐내기 위해 강단에서 떠드는 강사에게 감탄하며 내내 뭔가 적어 내려가는 이 아줌마들 사이에서 나 역시 강사라는 이름으로 출강하며 이렇게 버젓이 학생인 양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의미 없는 짓인가는 지금 내 노트의 한 켠에 그려놓은 낙서가 더 잘 알고 있다. 남의 수업에 참관하는 것 따윈 참으로 의미 없고 소모적인 일이라고 수 천 번이나 혼자서 뇌까려봤지만 이번엔 뭔가 다를 거라고 힘 있게 말하는 대학원장의 말장난에 나는 넘어가 주기로 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다른지 봐야 한다는 그의 말이 뭔가 새로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기억한다. 어려서 살던 그 동네어귀를 아주 오랜만에 우연치 않게 걸어 들어갔을 때 느꼈던 그 당혹감을. 그것은 내가 어떤 견지에 있느냐에 따라 사물이, 사람이, 마음이 달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여지없이 증명해 보이는 무시무시한 경험이었다. 남의 강의를 이렇게 당당히 듣는 게 아마도 내게 뭔가 새로운 자극을 줄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우리 집 반찬만 먹어서는 훌륭한 요리사가 되지 못할 테니까,라는 자기 합리화에 성공한 것이다.
막상 수업에 들어와서 몇몇 장안의 지가를 높였던 내 작품을 기억하는 아줌마들의 이상한 시선을 견디는 것이 어렵긴 했지만, 서른을 훌쩍 넘기고 미혼인 그녀의 강의는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그녀에 대해 내가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것이라고는, 글쎄, 없었다. 서로 눈인사를 어색하게 하는 사이라는 것 빼곤 나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했다. 겨우 한 다리 건너 듣게 된 것이라고는, 운동권으로 빵에도 들어갔다가 나왔고, 운동권 출신임을 느끼게 하는 중성적인 매력을 가진 신방과 출신의 유일한 여자 강사라는 것이었다.
내가 아줌마들 사이에서 뻘쭘하게 느끼는 것을 알아차린 탓인지 그녀는 내가 누구인지 이름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동요하는 아줌마들에게 내가 표적이 되게 하는 사건 따위는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녀의 수업을 빠지지 않게 되었다. 남의 강의에 대한 평가를 내리라는 대학원장의 스파이식 평가계획에 따르자면 내 출석도 어차피 보고가 될 테니까.
그런데 신방과 수업의 레포트에 글쓰기라니, 그것도 자서전을.
글쓰기라기보다는 괜스레 나를 표적삼은 것 같은 느낌에 ‘매스컴과 현대사회’라는 강의명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난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그 ‘극적인 사건’이랄지, ‘액티브한 기억에 남을’이라는 단어가 나를 어느 사이엔가 또 그 십여 년 전의 그때로 끌어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연필의 뒤를 물고 창 밖 초록으로 시선을 돌렸다. 역함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구토. 사르트르의 그 작품을 읽으면서도 연상했던 것은 그때의 일이었다. 사르트르의 ‘구토’는 내게 있어 그 기억과 정확히 일치하는 코드였다.
- 이럴 때 담배라도 한 모금 빨면 괜찮을 텐데.
나는 갑작스러운 이끌림에 쓴 입맛을 다셨다. 그 엉뚱하게 떠오른 오래 전의, 기억하기 싫었던, 한구석에 처박아 둔, 쓰다 내던진 비문투성이 습작원고가 내 앞에 다시 펼쳐지고 있었다.
“야, 너! 꼰대가 오래.”
퉁명스럽게 어깨를 툭 치며 말하는 소리에 또 신경이 거슬렸다. 시큰둥한 80년대 중반을 한 턱 넘어가던 그 여름의 시작은 6월임에도 불구하고 성큼 교실 안까지 다가서 있었다.
“부르… 셨어요…?”
일종의 주종관계. 선생 앞에 서면 늘 그런 느낌을 받았다. 교도소를 연상케 하는(물론 교도소를 가 보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말하는데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던 걸 보면 교도소는 그랬을 게다, 아마도.) 교무실의 싸늘한 시멘트 냉기가 짧은 소매 안으로 파고들었다. 누구나 그렇지는 않을지 몰라도, 담임은 분명히 교도관의 냄새를 풍기며 뭔가 강압적인 분위기를 강요하는, 그런 것으로 자신의 우위를 갖는 그런 사람임에는 분명했다. 머리를 빡빡 깎고 교복을 입고 경례를 하던 시기가 바로 윗선배들의 시기였던 것을 감안하면 그도 그리 어색할 것은 아니었다. ‘학생부’랍시고 아이스하키 스틱이나 죽도가 언제나 사용할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는 작은 고문실이 있었던 것을 보면 더더군다나.
“어! 동민이 왔나? 그래. 요즘 어떻냐? 아무 일 없고···?”
교무실 문 앞에서 들어가기 전에 옷매무새를 다시 한번 살핀다고 살폈는데도 왠지 그가 바라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다. 그리고 특유의 곁눈질로 다른 일을 하는 척하는 그의 모습을 보건대 분명히 또 뭔가 딴소리를 할 것이다.
- 특별히 부를 일도 없는데. 또 다른 얘기로 뭘 또 종용하고 싶은 건가? 그에게 넘어가서는 안된다. 그에게 허술한 면이나 의존적인 태도를 보여선 안된다.
내 마음의 단도리를 다시 한번 하고 표정을 굳히고 정중한 태도로 계속 밀고 나갔다.
잠시 시선을 돌리는데 부동자세로 서 있던 내 시선과 교련선생의 시선이 묘하게 뒤엉켰다. 이제 새로 온 그 교련선생은 교무실에서 유일하게 마음이 통하는 선생 중 하나였다. ‘사립’이라는 곳이 늘 그렇기는 하지만, 나이 먹은 선생들이 자리에서 결코 밀려나지 않으려고 자기 밥그릇을 움켜쥐고 으르렁거리고 있기가 일쑤였으니 새로운 신임교사를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명만 뽑는 생물선생 자리에 괜찮다는 대학을 그럴싸하게 졸업한 인간들이 100여 명이나 몰려 결국엔 이사장 사돈의 큰 이모의 아들이 그 자리를 꿰찬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 와중에 새로 온 부임한 교련선생은 그런 부류들과는 달랐다. 아니,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최소한 내 직감이 그렇게 말했다. ‘ROTC 교관’ 출신이라는 아이들의 뒷소문 말고도 그는 나에게 새로운 교련과 선생의 이미지를 심어준 사람이었다. 그건 서슬 퍼렇던 정국과 무관하지 않았다.
쿠데타 정부가 옹립된 이래로 대개의 교련선생이나 체육선생의 전형적인 모습은 그것과 닮아 있었다. 학교 내 아이들의 군기를 잡고 문제아들을 훈육한다는 미명하에 아이들의 부모에게 촌지나 좀 뜯어내고 술을 누구보다 즐기고 음담패설에 강하다는 여러모로 학생들의 눈에는 그닥 좋아 보일 리 없는 인간상이었다. 그런데 그는 술을 마시지도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다. 늘 깔끔하고 공정과 정확을 강조했다. 풀어져 있는 모습을 학생들에게 보이려고 하지 않았고, 마치 고 또래의 아이들이 동경하는 육사출신의 장교다운 모습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게 있어서는 전임 교련과의 악연에 치를 떨었던 나에게는 특별히 더 그러했었을 것이다.
그 악연은 바로 이전 2학기 기말고사에서 확인되었다.
교련(이 호칭에서는 늘 ‘선생’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생략되곤 한다)은 아이들에게 있어 공포와 강압의 대상이었다. 그런 그가 시험 감독으로 들어오는 날에는, 늘 있어왔고 어느 정도 눈감아줄 수도 있는, 그래서 과감히 실행되던 커닝이나 여타의 부정행위들은 전부 다 무효화되기 일쑤였다. 그런 그가 시험감독으로 들어서자 아이들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오히려 나는 안심했지만, 사건을 그날 그렇게 터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그날, 1학년이었던 나는 학교 측에서 늘 하던 방식대로 2학년 교실로 가서 시험을 봐야만 했다. 이유는 다른 학년이 옆에 있으면 커닝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교감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아이디어가 선생들을 더 안도하게 했을지도 몰랐다. 언젠가 벌어질 일이 아닌, 좀 더 솔직히 표현하자면 그것은 필연이었을지도 몰랐다. 언젠가는 터져야 할 일이라고 말하는, 그런 일 말이다.
그날 내 옆자리는 좋은 선배 하고는 거리가 먼 녀석이었다. 나는 학교에서조차 포기한 녀석을 파트너로 만난 게 편했다. 어차피 이런 부류는 그냥 자거나 빨리 나가니까. 그런데 갑작스레 녀석이 내 옆구리를 찌르며 교련이 시험지를 뜯는 짧은 순간, 지껄이듯 말했다.
“넌 지금부터 시키는 대로만 해.”
- 뭐…?
그렇게 나에게만 갑작스러운 부조리극은 우스꽝스레 시작되었다. 환상의 배치였다. 입학 때부터 교무실과 학생부의 문턱이 닳도록 왔다 갔다 하는 그 반 문제아들의 우두머리, 그리고, 그들에게 답안지를 제공할 연약하기 그지없는 그 반의 1등생, 그리고 모든 선생들이 의심 같은 거라곤 하지 않는 범생이과의 나. 그렇게 우리는 비빔밥처럼 섞여 있었다. 매콤 달콤하게.
원래대로라면 계획은 포기해야만 했다. 왜? 교련이 시험감독으로 들어왔는데 어쩌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잠시 주춤하는 듯했으나 결연한 표정으로 그들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그 계획은 마침 전달한 커닝 페이퍼가 내 손에 있을 때 여유롭게 계획을 간파한 교련에 의해서 막을 내려야만 했다. 난처해진 것은 오직 그 교실에서 나 하나뿐이었다. 물론, 나는 엄밀히 말해 잘못한 것이라고는 없었다고 말하면 그뿐이었다. 하지만, ‘범죄동조’에 ‘범죄은닉’, 그리고 ‘미필적 고의’라는 죄명을 받고 나는 그들과 함께 시험자격을 박탈당한 채 학생부로 끌려가야만 했다. 물론 그 정확한 죄명들은 내가 법학을 전공하게 된 후 붙은 것들이긴 했지만, 분명히 현행범에게는 재론의 여지가 없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지금 생각하면 별 것도 아닌 것을 왜 그리 가슴이 두 방망이질을 했었는지 까닭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교실에서 끌려 나와 학생부로 걸어가는 동안 나는 마치 화냥년이라고 손가락질당하며 조리돌림 당하는 죄인의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옆에서 걸린 나를 원망하는 녀석들의 얼굴은 보이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