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신을 병신으로 따돌렸다고 항의하면서 다신 이런 모임에 끼지 않겠다고 다짐하곤 우등반 그룹독서실까지 나가버렸다. 독서실을 짓는데 꽤 많은 돈을 투자했던 녀석의 어머니 입장에서 보면 가슴이 아플만한 일이기는 했다. 그리고 바로 녀석은 날라리파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녀석에게 내게 복수할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오늘 마지막 시간은 수학선생한테 자습하겠다고 승낙받았다.”
반장 녀석이 교탁에서 내려오며 묘한 차가운 미소로 내 시선을 응수했다. 그리고 다시 녀석들이 앞뒤로 붙어 문을 닫고 망을 보러 갔다. 틈만 나면 수업을 하지 않으려고 했던 수학선생에게 대강 자습을 하고 싶다는 반장의 제의는 달콤했을 것이다. 1학년 2학기, 내가 반장을 했던 때에도 수학선생의 그런 마음은 절실한 듯했다.
이사장이나 교장의 눈치만 보이지 않는다면 대강대강, 쉬고 놀았으면 하고 바라던 그였다. 그런 그에게 반장 녀석의 제의는, 오직 릴랙스 한 상태를 유지하고 싶은 자신에게 즉석에서 웃으며 고개를 바로 주억거려주지 못한 것이 가슴 아팠을 것이다. 그즈음 유유자적 아이들에게 빼앗은 음란서적을 뒤적이고 있을 수학선생의 표정이 떠올랐다.
“너희들 어제 말했던 거 가져왔어?”
앞으로 나선 설레바리는 거들먹거리는 듯한 어눌한 특유의 말투로 아이들에게 인상을 지어 보였다.
“삼중이 형이 학교로 석 달만에 돌아왔는데 같은 반으로써 환영식 같은 건 해줘야 할 거 아냐? 엉?”
- 어제 말했던 거?
어제 수학경시대회로 수업을 빠졌던 나는 녀석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확실히는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돈이니 환영식이니 하는 말로 볼 때, 이 상황이 지금 어떤 분위기인가는 대강 읽고도 남음이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모른 척 넘어갈 일이었다.
그러나 그 직전에 있었던 우격다짐 때문이었는지, 약간은 흥분된 상태의 아드레날린이 진정되지 못한 채 안에서 요동을 쳤다. 순간 무의식 중이랄 만치 반사적으로 내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만둬! 유치하게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별로 큰 목소리가 아니었던 것도 같은데, 아이들이 조용한 상태로 정적이 흘렀던 상황이라 내 목소리는 더 도드라져 버렸다. 그런 내 뒤통수로 뭔가 찡한 느낌이 들었다. 삼중이었다. 녀석이 철제 필통을 던지듯이 몸을 날리며 내 머리에 찍은 것이었다.
전혀 의식하지 못한 것이었지만 난 이미 이성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이미 그들이 기다리고 의도했던 것이었으며, 재석이 뒤에서 말리려는 품에서 벌떡 일어났다. 설레바리가 뒤에서 달려드는 것이 보였던 싶은 순간 낮은 교실의 복도로 담임이 다른 반의 수업을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 짧은 순간이 왜 그리도 길게 느껴졌는지, 그리고 그런 모든 상황을 본 담임의 표정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한꺼번에 수많은 감정을 담은 사람처럼 교차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미처 망을 보는 녀석은 알릴 틈도 없이 담임은 고개를 돌려 교실을 봤고, 분명히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내가 전에도 봤던, 제비의 그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난처할 때 짓는 표정으론 교실을 지나쳐버렸다.
잠시 담임의 등장으로 흐름은 끊겼다. 아이들이 주먹질과 발길질을 멈췄고, 어차피 적군(나)이 한 명이었던 그 전투는 내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며 어줍지 않게 끝나버렸다. 어제 확실한 협박 덕분인지 아니면 내가 본보기가 되었던지 천천히 돈을 꺼내는 녀석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반장 녀석의 그 득의만만한 미소는, 나에게 자신이 나보다 뭔가 우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 달라는 듯했다.
- 나는 니가 속해 있는 스터디 그룹보다 더 나은 그룹에 속해 있어.
당시, 그런 상황을 20여 년이 지난 지금 설명하거나 묘사하는 어구나 수식보다는 그날 내가 내가 망을 보는 녀석을 밀치고 다른 반의 수업을 마치며 교무실로 들어가는 담임에게 했던 말과 그가 받았던 말이 모든 것을 명쾌하게 보여주는 답안이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아마도 꽤나 흥분했던 것 같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흥분을 하면 버릇처럼 평소의 사무적인 말투가 훨씬 더 딱딱하고 문어체적인 것으로 바뀌어 버린다. 마치 드라이아이스의 같다는 재석의 표현처럼, 난 아주 경직된 사무적인 말투로 얘기를 꺼냈다.
“선생님. 삼중이가 가출에서 돌아온 다음···, 아이들한테서 돈을 갈취하고 수업을 자습으로 때우고···, 아이들에게 또 다른 식으로 공부를 방해하는 것까지···”
흥분해서 딱딱 끊어지는 모음의 발음을 섞어 이어 나가는 말을 그가 묘하게 틀어막았다.
“이것 봐라···. 동민아.”
“···예?”
“난 분명히 선생이고 담임이긴 하다만, 그런 학생들 사적인 문제에까지 들어갈 수 있지 못하고 그럴 만큼 시간적 여유나 심적인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난 그런 너희들의 아주 작은 디테일한 부분에까지 관여할 수도 없고, 관여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불만이 있으면 반장을 통해서 나한테 상의를 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인데, 너희들의 문제라면 너희들이 해결해야 하지 않겠나···?”
할 말이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담임은 때도 아닌 학기 중에 육성회장을 맡아 주십사 하는 뻔뻔스러운 제의를 담은 통신문을 어머니에게 전하라고 온 거였다. 아들이 독서실에도 들어가지 못한다면 돈을 낼 필요가 없다고 여긴 반장 녀석의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육성회장을 못 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탓이었다.
나는 결사코 반대했고, 아예 어머니에게 담임의 어떤 제의든 간에 받아들이신다면 학교를 포기하겠다고 으름장까지 놓았다. 이제 구(九) 단인 내 수 읽기에 근거하면, 당시 담임은 아마도 내가 어머니에게 어떻게 할 것이라는 것을 수 없는 경험상 직감으로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교실을 지나던 순간, 잠시 고민을 했을 것이고, 내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란 계산 하에 그에 맞는 행동을 보인 것뿐이었다.
말문이 턱 하니 막혀 무슨 말을 할 수도 이어나갈 수도 없었다. 그저 그뿐인 것이었다.
글쟁이와 강사생활을 하는 지금도 그렇지만 말을 하기 전에 마음속으로 말을 정리하거나 어떤 말을 할까 생각하는 것 이외의 이유로 말문이 막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때 난 말문이 막혔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교과서와 체벌봉을 들고서는 다른 교실에 들어가며 머리 위로 손을 내저었다.
말문이 막혀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질 것 같은데 느닷없이 생목이 올라오는 느낌에 입을 막고 수돗가로 달렸다. 안경을 쓴 채 머리에 물을 쏟아부으며 정신을 차리려고 했지만, 그 뭔가 역겨운 것이 가슴 저 안쪽에서부터 스물 거리며 올라오는 기분 나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날 초여름의 폭염은 그렇게 나오지도 않는 구토로 시작되었고, 이후에도 20여 년을 살아오는 동안 내게는 그런 일이 꽤나 자주 벌어졌다. 이젠 더 이상 구토가 나오지 않을만치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것만도 같은데, 난 아직도 그렇지 못하다.
우연히 서재를 정리하다가 알베르 카뮈의 책을 꺼내 들었고, 그것과 연관된 파일첩에 데카르트의 <구토>와 관련된 메모, 그리고 플로피 디스크 안에 담겨 있던 아이디어 단편을 쓴 원고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오래되어 이제 종이가 푸석거리며 바스러질 정도가 되었지만, 그대로 두기보다는 이 공간에 담아두면 조금은 더 오래 남겨둘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옮기게 되었습니다.
잊고 지냈던 그 옛날 순수한 글을 쓰던 시절, 오래된 시집 안에서 발견한 노란 은행잎을 발견한 마음으로 다시 그 은행잎을 요즘 읽는 문집으로 옮겨 꽂아두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