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피스토 펠레스 - 전편

단편 추리소설

by 발검무적

1


아직도 수사에 도움이 될만한 말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예 입도 뻥끗할 생각이 없나 봐요. 이건 아예, 인형처럼 구는데 미친다니까요. 무슨 생각에서 이러는 건지···원. 아마 정신적으로 충격이 컸나 봅니다. 아니요. 범인을 아는지, 그건 잘 모르겠어요. 아예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니까요. 글쎄요. 직접 죽이는 걸 봤다고 하진 않았지만 느낌이 그래요. 제가 취조하는 방식이 잘못된 건지 저런 수수방관형 증인은 취조를 하는 건지 간청을 하고 있는 건지 도무지 모를 정도라니까요. 전 선배님이 무슨 생각에서 저 여자를 살인 용의자로 지목하시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하다못해 뭐가 아쉬워서 그렇게 잘 나가는 애인을 죽이고 일부러 어려운 처지로 떨어지려구 하겠어요? 아, 예. 알았다구요. 참 이상한 성격이시네. 그렇게 확신하시면서 왜 직접 조사하지 않으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지금 어디세요? 예? 무슨 비밀이 그렇게 많아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이 노무 핸드폰인가 뭔가는 끊어지는 게 뚫리는 것보다 더 많아, 어떻게 된 게···”


전화를 내려놓으며 뒤에서 인기척이 나는 걸 느끼고 뒤돌아보았다가 얼른 자리에 앉았다. 날카로운 눈으로 이리저리 살피는 반장의 눈치가 뭔가 분위기를 간파한 듯 보인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는지, 윤 선배와의 통화내용을 감지했는지, 그것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말할 단계는 아니라고 했다.


최소한 윤 선배의 말을 믿어야만 한다는 묘한 심리가 내 직감을 꿰뚫고 지나갔다. 이런 예감, 늘 엿 같은 편이긴 하지만 대부분 그렇게 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최선’을 윤 선배는 귀신처럼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도 본능은 선배의 말처럼 하는 것이 나을 거라고 벨을 울려주었다. 꽤나 정확하게.


“어떻게···, 잘 돼 가는 거야?”


반장은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너그러운, 예의 그 친근한 상관의 미소를 띠며 물어온다. 저런 능구렁이 같은 고문관. 어떻게 그 자리에 올랐을지 빤히 보인다. 윤선배보다 2기 후배라는 것 외에도, 찾을 수 있다면 어떤 뭔가라도 건져서 윤선배를 완전히 밑으로 떨궈버리고 싶어 하는 심리가 그에게서는 역력했다.


이번 사건만 해도 막상 담당도 아닌 윤선배를 억누르고 싶어 하는 그의 알력은 대단했고, 대단한 집안의 자식이 살해당한 사건인 만큼, 그의 약혼녀가 끌려온 지금의 상황으로는, 위에서 이리저리 압력이 꽤나 심했던 모양이었다.


“아 예. 그냥 그렇죠, 뭐. 비디오로 잡을 필요도 없어요. 여전히 입 다물고 있는데···. 어떻게 겁을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알았으니까 들어가 봐. 잘 달래 보라구. 참! 윤 형사는 어디 갔나?”

“글쎄요. 보충수사 할 게 있다고 나갔는데··· 어딘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그럼 다시 들어가 보겠습니다. 밥이라도 시켜주던가 해야겠어요.”

“그래. 수고하게.”


‘윤 선배는 뭔가 감을 잡고 있는 거야. 아까 전화하는 목소리도 일부러 끊은 게 틀림없을 테고 말이야. 아니면, 이 여자가 어디서 굴러먹던 사람인지 알아보고 있을 테지, 그런데 영 그럴 여자가 아닌데 뭐가 어떻다는 거지? 아직도 형사 짓 제대로 하려면 먼 건가. 참!’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까 맡았던 알싸하고 가느다란 아카시아 향이 취조실 안에 가득했다. 여자는 조용한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사람처럼 조용히 그를 응시하고 있다. 머리칼이 가지런히 모양새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창백해진 얼굴과 취조실에 들어올 때마다 마주 보이는 양면거울에 비친 그녀의 뒷머리가 어쩌면 저렇게 가지런하고 부드럽게 하늘거릴 수 있는지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였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가느다란 손가락사이로 흘러내린 채 들어오는 나를 한 번 보고는 힘겹게 이마로 손을 가져가는 걸 보니 같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처음 만날 때 느껴졌던 연약한 듯 가녀리면서도, 은연중에 느껴지는 그 으리으리한 가문의 며느리가 가질 것만 같은 당당하리만큼 강한 지적 이미지, 사람을 압도하는 듯하면서도 부드럽게 상대를 보다듬을 것 같은 따스함, 하지만 차갑고 딱딱해 보여 선뜻 말을 걸기 어려운 기품이 그녀에게는 자연스레 배어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녀를 그 엄청난 집안의 며느리로 낙점할 수 있게 만들어준 요소들인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연인이 처참히 살해당한 지 일주일이 지난 지금.


그녀의 모습은, 지칠 대로 지쳐 당장이라도 쓰러져버릴 것만 같은 모습으로, 아주 깊고 어두운 곳에서 밝은 쪽을 응시하는, 음산하면서도 싸늘한 우울이 가득한 시선에, 축축한 지하도의 습기가 감싸버릴 듯 묻어났다. 수영같이 규칙적인 운동 같은 것으로 단련된 탄력 있어 보이는 몸매에, 보기에도 가녀려 보이는 느낌이 들게 하는 짙은 흑청색 슈트가 지나치게 그녀를 차분하고 가라앉게 만들어 주었다. 파르르 하고 작은 경련이 그녀의 손에 느껴졌다.


물컵을 들고는 남은 물을 입술에 대기만 하고 다시 컵을 내려놓는 행동을 반복하던 그녀의 얼굴에는, 창백하다 못해 이런 슬픔 속에서 취조실에 앉아있어야만 하는 자신의 입장을 강하게 피력하며 흥분해 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제까지 도움이 될만한 단서는커녕 딱히 얘기랄 것도 제대로 한마디 꺼내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건대, 그녀를 더 이상 효과적으로 취조한다는 것은, 취조하는 사람의 입장을 더욱 곤욕스럽게 몰아가고 있었다.


‘제길, 이런 짓을 왜 꼭 나한테만 시켜. 이건 예감이 빗나간 거야. 무슨 이런 여자가 살인을 하고 멀쩡하게 잘 지내던 빵빵한 집안의 애인을 죽여. 못할 짓이다. 청무야. 넌 사는 게 왜 이 모양이냐.’


자아, 물이라도 더 갔다 줄까요? 왜 그래요, 약이요? 아까두 하나 먹었잖아요. 그러지 말고 우리 빨리 끝내죠. 서로 못할 짓이잖아요. 아니··· 처음에 증언했던 걸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니까요. 그저 왜 주금정씨가 하필 그날 저녁의 일을 틀리게 기억했나 하는 게 궁금할 뿐이에요.


아니에요. 아까두 말했잖아요. 주금정 씨가 어떻게 뭘 어쨌기 때문에 의심해서 취조하려는 게 아니라··· 지금 우리한테는 민 영빈 씨가 왜 살해당했는지 그리고 이유가 뭔지를 알기 위해서, 주 금정 씨의 확실한 증언이 필요한 거라구요. 예. 식사라도 하고 다시 할까요?


생각이 없어두 먹어야 돼요. 지금 너무 힘들어 보여요. 아, 미안합니다. 다른 뜻은 없어요. 기운을 차리고 다시 얘기하려면 식사라고 좀 해야 하지 않겠어요? 어차피 나두 먹어야 하니까···


“김 형사, 여기 해장국, 아, 해장국 괜찮죠? 아니면, 그래, 해장국 하나하구 설렁탕 하나 좀 넣어줘.”


저녁을 주문한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바로 식사가 들어왔다. 식사를 가지고 들어온 김 형사는 얼른 책상 위로 쟁반째 놓아두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언뜻 양면 거울 쪽으로 시선을 던져보지만 그것이 윤 선배가 왔는지 아니면 반장이 그쪽으로 들어가 날 보고 있는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어쨌거나 여자는 전혀 말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일단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주고, 밥이라도 먹이고 나서 다른 얘기들로 입술만이라도 떨어지게 한다면 혹시 얘기가 잘 풀리는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졌다. 어느 정도는 유효할 것 같았다. 물론 내 예상에 불과하긴 했지만.


자자, 먹읍시다. 먹고 나야 뭐든 하죠. 난 아침부터 빵 한 조각 먹고 여태 버틴 거였어요. 주금정 씨 입맛에는 턱없이 안 어울린다는 거 알아요. 그래두 먹어둬요. 얼른요. 자요, 여기 수저 있어요. 천천히 국물이라도 한술 떠요. 음···맛있어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죠. 먹을만해요. 정말 맛있다니까요.


참내. 겨우 그게 다 먹은 거예요? 나 먹는 동안 반도 뜨지 않았군요. 좋아요. 커피 할래요? 해장국 다음에는 커피가 제격이죠. 느끼한 맛이 싹 가시거든요. 어때요? 내가 직접 뽑아오죠. 자아, 이것 좀 내 가구요.


‘뭐가 저렇게 절박한 걸까?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진다는 게 저렇게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나? 요즘에도 저렇게 대단한 열녀가 있었군.’


난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서른을 코 앞에 두고서도 애인이 없다는 게 그렇게 이상하지만은 않았다. 물론 선이다 뭐다 해서 여자를 만나고 다니긴 했지만 밤낮이 따로 있는 직업도 아니고, 비전이 있는 경찰간부와도 거리가 먼, 우락부락한 강력계 말단형사에 불과한 나였으니까 결혼은 고사하고 애인을 생각한다는 건 정말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의 얘기였다.


며칠 동안 밥을 입에도 대지 않고 그렇게까지 슬퍼하며 말문을 잃은 그녀의 행동에 대해 뭔가 의심을 갖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윤 선배 역시 총각인걸 보면서도, 나는 요즘 사랑 때문에 누가 슬퍼하고 정절을 지키고 하는 따위의 이야기는 책에서나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아마도 주위의 사람들이 거의 악랄한 범인들 투성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런 생각을 가졌을 런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 여자에겐, 사랑하는 이가 없는 상류층에 뒤늦게 합류한 저런 여자에겐, 내가 여길 수 없을 소설에나 나올 슬픔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여기 커피 있어요. 어떻게 타는 줄 몰라서 설탕하구 프림 가져왔는데···원래 블랙으로 마시나 보죠? 윤 선배랑 똑같네. 자아, 속이 따뜻해지면서 몸이 좀 풀리는 기분이 들죠. 이런 기분 때문에 커피를 끊지 못한다니까요. 자아, 이제 식사도 했고, 기분도 좀 나아진 것 같으니까 다시 시작합시다. 아아, 그렇게 굳은 표정 짓는 거 딱 질색이에요. 가볍게 있는 그대로 얘기해 주면 됩니다.


자아, 그날 저녁 친구들을 만나고 K호텔을 나와서 그 빌딩 지하에 있는 클럽으로 들어간 게 몇 시라고 했죠? 그래요. 그게 겨우 여덟 시였단 말이죠. 그때까지 민 영빈 씨가 같이 있었을 텐데, 왜 다른 사람들은 그 시간쯤에 주금정 씨가 없어졌다고 하는 거죠?


예? 그래요. 머리가 잠깐 아파서 바람을 쐬러 나갔다고 합시다. 그런데, 왜 다시 들어가지 않았죠? 그리구, 난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따라 나갔던 사람들이 언뜻 보기에 주금정 씨가 민영빈 씨와 함께 스카이라운지로 올라가는 걸 봤다고 하던데 주금정씬 지난번 조사 때 분명히 집으로 일찍 돌아갔다고 했었잖아요.


그게 좀···아아, 물론 혼동이 올 수도 있는 거고, 사람이 이런 상황에서 그런 걸 모두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겠지만, 지난번엔 시간까지 정확히 기억했었잖아요.


그래요. 추궁하는 것처럼 들렸다면 미안합니다. 으음, 이건 좀 다른 얘긴데, 만나던 날 이전에 민영빈 씨한테 이상한 점이랄까,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이상한 전화가 왔다거나 이상한 사람들이 쫓아다닌다거나, 재산이나 원한관계로 해코지 할만한 사람이 있었나요? 아니, 이건 인격을 의심하는 거하곤 거리가 먼 거예요.


내가 뭐 하러 그런 말을 지어내겠어요. 이상한 게 민영빈 씨 정도 거물이면 수행원들도 상당했었을 텐데 그날은 모두 철수한 상태였다고 하구··· 더군다나, 그날은 운전기사까지 집으로 일찍 보냈다고 하던데 그것도 좀 이상해요. 사람이 죽으려면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고, 안 하던 짓도 하고 다른 일이 있기도 하다던데, 그래서 그런 건지 원···. 아, 미안해요. 오해는 하지 말아요. 좀 마음 아픈 기억이 되겠지만 대답해줬으면 합니다.


지금 수사에서 범인을 찾아야 주금정 씨도 마음이 좀 편해질 것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민영빈 씨 본 게 언제였죠? 아니,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해요. 그날 나오기 바로 전이요? 혹시 그날 다른 약속이 있거나 한 건 몰랐나요? 별장까지 간 걸 보면 미리 약속을 했거나, 계획했던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민영빈 씨 친구들 말로는 자주 모이던 모임은 아니었지만 ‘오 상현’이라는 사람이 유학에서 돌아온 것 외에는 친구가 없었다던데요. 그 사람도 그날 이후로 연락이 안 되는데···, 아니, 꼭 알아야 한다니요? 그런 건 아니구요.


좋습니다. 물론 민 영빈 씨의 대학교 동창이라니까 잘 몰랐겠죠. 그 사람이 대학을 졸업하면서 왔다고 하던데··어? 왜 그래요? 머리가 또 아픈 건가요? 이봐! 밖에 아무도 없어? 김 형사! 이봐요. 주금정 씨 정신 차려요. 이봐요.


삐이···전데요. 전화 좀 받으세요. 그 여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어요. 선배님도 들어오시는 대로 연락 좀 주세요. 아니면 이 연락받으시는 대로 나오세요. 뭔가 얘기가 달라질 것 같아요. 윤 선배 예감이 맞을지도 모르겠네요.···삐이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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