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괜찮아요? 여기요? 숙직실인데 일단 여기로 모셔왔어요. 미안해요. 그동안 긴장한 탓이라니까 너무 놀랄 필요 없어요. 좀 안정하면 나아진데요. 그런데 무슨 두통약을 그렇게 찾아요? 이렇게 막 먹어도 되나? 웬만하면 참아보구 병원에 나중에 한번 가보지 그래요?”
남자는 꽤나 차분하면서 말이 많아졌다. 뭔가 내게 숨기고 있는 게 있는 걸까? 영빈 씨가 죽은 것하고 그 사람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걸까. 속이 메슥거리고 올라올 것만 같다. 다시 날 부를 만한 이유가 뭐였을까. 어떻게 날 의심할 수가 있는 거지? 난 정말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해보질 않았다. 내가 신데렐라가 된다면 그건 말 그래로 신데렐라인 거다. 설사 내가 다시 눈을 뜨고 난다고 해도 이 모든 것들이 호박으로 변하고 쥐들로 변하더라도, 내가 어떻게 영빈 씨를 죽일 수 있겠어? 왜 형사들은 내가 그이를 죽였다고 의심하는 걸까.
“자요? 그래요. 좀 쉬어요. 한숨 자고 나서 다시 합시다. 자아, 김 형사 나도 나가서 눈 좀 붙일 테니까 여기 필요한 것 있으면 갖다 드려. 그래 부탁할게.”
남자가 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영빈 씨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밀려들어온다. 처음 옷을 사러 온 부잣집 도련님의 말쑥하고 티 없이 깨끗한 산들바람처럼.
“이 정도면 디자인이 차분하면서도 정숙해 보일까요?”
“예?”
난 잠시 그 남자에게 시선을 두고 있다는 것을 잊을 정도로 멍해있었다. 손에 있던 옷을 떨어뜨렸다는 것도 잊은 채 그가 웃으며 내 앞에 떨어진 옷을 주어줄 때까지도, 내가 그의 사랑을 받게 될 수 있으리라고는 감히 생각하지 못했다.
“미안합니다. 내가 일을 방해했다면 미안해요. 이러려구 하던 게 아닌데···”
오히려 미안해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다시 옷을 걸어놓을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니 서 있었다. 특별히 잘생기지도 특별히 키가 큰 것도 아니었지만 그에겐 내게 없는 모든 것이 있는 것 같았다. 겨우 부띠끄에 몸매와 얼굴이 반반하다는 것을 밑천으로 들어온 내게, 이곳의 고급스러운 여자옷을 사러 온 부유한 집안의 아들은 내게 전혀 다른 별세계의 사람을 접한다는 느낌을 갖게 하기 충분했다. 스카프 하나가 내 월급과 맘먹는 이곳의 사정처럼. 내 앞에서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에게서 뭔가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전부터 내가 꿈꿔오던 것. 내가 신데렐라가 될 수도 있다는 그 꿈을 찾고 있었다. 난 왕자를 찾은 셈이었고 그때부터는 모든 것이 이뤄져야만 했다.
“이 정도면 어떠실까요? 애인이 체형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세요?”
“아니에요. 여동생 생일선물인데 좀 특별한 걸 해주고 싶어서요. 아가씨 정도인건 같은데··· 그 가운데 것 좋은데요. 괜찮다면 입어줄 수 있나요? 그래줬으면 좋겠는데··· 옷은 직접 입은 걸 봐야 안다고 하더군요.”
남자와 날 보고 있던 지배인의 눈치를 살폈다. 지배인은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탈의실을 쳐다봤다. 처음 보는 얼굴로 봐서는, 우리 부띠끄엔 처음 온 사람이 분명했는데 지배인은 이미 그에 대한 판단을 마친 것 같았다. 그는 눈치로 그 사람의 경제수위를 알아보는 데는 귀신이었다. 내가 봤던 것을 그 역시 보았고 나는 지배인의 눈을 통해 내 예감을 검증할 수 있었다. 그의 눈에도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으로 그가 비쳤을 것이라는 생각에 난 즐거운 기분으로, 약간은 떨리는 묘한 감정을 억누르며 옷을 갈아입고 남자의 앞에 섰다.
“동생이 키가 조금 작을지도 모르는데 체형은 똑같은 것 같은데요. 좋아요. 그걸로 포장해 주겠어요?”
그에게서 느껴지던 상큼한 플로랄 향 같으면서도 전혀 처음 맡는 그 향수의 어렴풋함을 느끼면서 난 왠지 모르게 내 가슴이 뛰는 소리가 그에게 전달될 정도로 크게 소리 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카시아 향이 참 좋은데요. 아가씨한테 어울리는 것 같아요. 오늘 호의는 잊지 않고 기억해 두죠. 언제 한 번 기회가 되면 그럴 기회를 줄 수 있겠죠?”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연락처와 이름을 남겼다.
의대를 다니고 있던 신경정신과 레지던트.
그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부띠끄 근처로 지나다 들렀다는 그의 전화가 왔고, 나는 나도 모르게 스물여섯 해 동안, 내 삶 속에서 찾을 수 없던 사춘기시절에 느꼈음직한 가슴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그와의 만남이 계속될수록 나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너무도 진지했고, 나는 편안하고 행복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가 잠시 국내로 들르기 위해 나왔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난 너무도 행복한 한 마리 파랑새였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그의 집안에 비해서 나는 너무도 턱없는 자격미달의 며느리감이었다. 아니, 그들에게 있어 나는 단지 그들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격을 떨어뜨리는 존재였다. 그런 느낌은 흔하게, 드라마나 소설에서 보았던 것처럼 그들의 강요나 떼어놓으려는 압력에서 든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가족들과 그는, 내게 더없이 가깝고 격 없이 대해주었고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가 없는 것과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자연스럽게 말하고 행동했다. 그랬다. 그것이 내게 있어 가장 커다란 벽이고 숨 쉬지 못할 공간이었다. 마치 내가 없어야 어울릴 듯한 풍경.
내가 아무리 그들 틈에서 같이 숨 쉬고 얘기를 나누고 있다는 생각을 하더라도, 그것은 툭 불거진 언밸러스에 불과했다. 그게 바로 그들 사이의 나였다. 어떤 식으로든 난 경계선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것이 참을 수 없어졌다고 느꼈을 때, 다시 미국으로 들어갔던 그가 마지막 학위논문을 남기고 잠깐 들렀다며 귀국해서 나를 찾았다. 그러나, 그는 이전의 깔끔하고 매너 있고, 나에게 앙망의 대상이던 사람이 아니었다. 내 몸을 탐닉하면서도, 나를 극으로 달리게 해서 지치게 하고 날 그저 육체적 갈망을 해소하는 물건정도로 쳐다보는 것 같은 그 눈빛과 아무 감정이 배어있지 않은 말투에서조차도.
‘이것을 모두 어떻게 그들에게 말하지? 난 도저히 그럴 엄두가 나질 않아. 그가 과연 영빈 씨를 죽였을까?’
날 강간하듯 범하고 내팽개친 채 용돈이라며 돈을 두고 나가는, 그에게서 떠나기로 결심을 하는 것은 처음 그에게 자연스레 이끌린 것처럼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그게 당연한 듯했고, 그는 이미 마약과 자신의 논문이 표절이라는 것이 밝혀진 사건으로 인해, 점점 처음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괴물로 변해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만난 영빈 씨와의 만남은 오히려 힘겨워, 살아가기 버거워하던 내게 새로운 삶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 마지막 기회였다. 이미 한번 있는 계층의 사람에게 실망했던 나였지만, 환경과는 달리, 순수함으로 가득한 그의 눈을 보며 나는 허름한 옷차림의 수수한 그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이렇게 일기에 남길 수 있었던 것처럼, 그는 있는 줄도 모르게 왔고, 사랑하고 난 다음, 그가 부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도, 내게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오직 나만을 위해 줄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고,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미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벗어난 사람이었고, 그의 부모님도 그런 그의 결정을 철저한 신뢰를 보였다. 그는 그만큼 사람을 믿게 하는 매력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죽이다니. 오 상현 그 악마가 저질렀을 일을 어떻게 내 입으로 그들에게 말하라는 거지.
악몽 속에서 헤어진 지 2년 만에, 그 악마가, 그의 대학동창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버젓이 학위를 받고 의사가 되어 돌아와 있었다. 그건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건 말 그대로 악몽이었다. 아직도 그 끔찍한 순간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나를 보며 태연히 웃을 수 있는 그의 얼굴을 기억하면 아직도 몸서리가 쳐진다.
그런 끔찍한 인간을 어떻게 글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그렇게 나는 증언을 한다면서 영빈 씨와 마지막 본 그 시간과 표면적인 일들에 관해서만 말했을 뿐, 그 악마, 오상현에 대해서는 도저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저 이렇게 일기에만 남길뿐.
3
“강력계 윤 혁 형사라고 합니다. 이번 사건에 대해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오상현 씨라고 아시지요? 이번 사건을 지면을 통해 접하셨을 겁니다. 약혼녀 주금정 씨도 잘 아시겠지요?”
“···예. 그렇습니다만···, 그렇습니까? 아, 예. 그렇다면 제가 가지고 있는 자료들과 증언이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도 있을지 모르겠군요. 직접 만나서 얘기하는 편이 나을 것 같군요. 그렇다면, 병원으로 직접 오시지요.”
“좋습니다. 그럼, 제가 그쪽으로 가지요. 예. 흰색 소나타입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아마 1시간이면 도착할 겁니다.”
“···그럼, 기다리지요.”
남자의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의사라는 직업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 뿐인가.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원래 성격이 이렇게 차갑고 냉철하게 이성적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속을 보기가 어렵다. 아까 전화에선 분명히 그녀가 입을 열었다고 했는데 이 일기장에 쓴 것들을 이제야 실토하기 시작했다는 걸까?
“그녀는 환잡니다. 정신질환자···.”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정신질환이요?”
나로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의외의 대답이었다. 처음 그가 그런 말을 전화로 했을 때까지만 해도 그가 어딘가에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신기했었다. 아니 난 단순히 그의 말만으로 어쩌면 순수하고 그저 상처받아 힘겨워할 가녀린 한 여자를 살인 용의자로 몰아세우는 몹쓸 짓을 하고 있던 것이지도 몰랐다. 그는 그녀의 증언까지 모두 마치고, 막 수사가 마무리되어 살인자를 찾지 못한 채 미결이거나, 자살처리 될 그 사건에 다시 불을 붙였다. 그녀가 다중인격을 가진 정신질환자라니···
“···그래요. 내가 힘겨울 때, 논문이 표절이라고 오해받고 상당히 어려웠죠. 그때, 국내에 들어와 정신과 상담을 받으면서 우연히 병원에서 알게 됐어요. 난 마약에 찌들고 갈 때까지 갔던 인생이었죠. 지금은 다른 사람들을 상담하는 입장이긴 하지만요. 내가 이렇게 전화로밖에 말할 수 없는 건 나 역시 그녀에게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라는 점을 이해해 주십시오. 어떻게 몇 번 보지도 못한 여자를 판단할 수 있을까 하시겠지만, 난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정신과 담당의였던 사람을 찾아가 보면 아마 기록이 남아 있을 겁니다. 그녀는 정신적 문제 때문이었는지 다른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다른 사람들과 만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날도 우리와 자리를 함께 하는 걸 원치 않았다고 영빈이가 말해주더군요. 영빈이와는 그리 친한 편이 아니었지만 그날 웬일로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나와서는 만나자고 하더군요. 그리곤 나중에 온 그녀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게 되면서 느끼게 된 거죠. 그녀가 그러더군요. 영빈인 갑자기 죽을지도 모르는데 사랑을 너무 깊게 하는 건 무서운 일이라구요. 그런 얘길 꺼내는 그녀가 그날 영빈이와 스카이라운지로 올라간 거고 우린 그저 둘만의 시간을 원하나 보다 하곤 그날 자리를 파했던 겁니다. 그런데 차가 주차한 곳에 없어서, 파킹맨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한참 헤매며 이리저리 주차장을 걸어 나가는데 그녀와 영빈이가 차를 타고서 나가는 걸 봤습니다. 아마 별장까지 함께 갔을 겁니다. 계속 뒤를 따라간 게 아니라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더라도 난 그녀가 어떤 심리상태였는가 정도는 알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철저하게 준비를 한 겁니다. 이미 약혼을 해서 그녀에게 재산이 상속되도록 예정보다 서둘러 법적절차를 매듭지은 것도 확인해 보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
그토록 차분하게, 마치 자신이 본 영화의 장면장면을 설명해 주듯 말하는 그의 전화 통화를 들으면서 어쩌면 이 사람도 긴장해서 자신이 죽음에 몰려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구나 하는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그게 아마도, 그가 내게, 아니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기는 목소리 때문이었다면 너무 결과론적인 생각일까?
난 그의 휴식처이자 유일한 은닉처였던 청평의 별장에 들어서면서 그 비릿한 핏내음을 들이마셔야 했다. 그 한 시간 사이에 그녀가 그를 죽였던 걸까? 아니면···그녀의 일기대로 그는 미친 살인마에 불과한 철저한 완벽주의자라서 자살이라도 한 걸까? 그의 사체를 인수하면서 바로 그녀를 다시 수사하도록 한 것이 내 실수였을까? 그가 보여주고 싶다던 것이 뭐였을까? 전화로도 말할 수 없던 그것. 얼마 보지도 않고 그저 그녀의 정신 상담기록과 그것들을 알 수 있었다면···. 별의별 생각들이 모두 동시에 일어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막상 그녀의 담당의였다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지금도 그가 가지고 있던 자료나 그녀의 정신상담 조언을 참고하기 위해 나는 그 범인이 죽은 오상현인지, 아니면 그녀인지를 빨리 결정해야만 했다. 최소한 반장은 돈을 먹었든 아니든 간에 이 사건을 대강 마무리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이 분명했으니까. 내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제한되어 있었다.
시간, 자료, 증인, 그리고, 확신.
그럼 뭡니까? 사실, 문제가 있던 것은 주금정 씨 보다가 아니라 오상현 씨였다는 겁니까? 그렇게 정신질환 정도가 심한 사람이 다시 논문을 통과받고 박사학위를 받아 병원을 개업할 수 있습니까? 예. 자료를 직접 보여주신다면 참고가 되겠습니다. 오상현 씨는 정 박사님이 주금정 씨의 치료를 하면서 자료를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 그것도 참고로 가져갈 수 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예. 아니, 뭐 직접 증언을 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잘못된 사건을 이렇게 바로잡는 건 중요하지요. 사람이 둘이나 죽었는데 그 둘을 죽인 범인이 어딘가에 버젓이 살아있다면, 또, 괜한 사람이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쓴다면 그건 반드시 바로잡아야지요. 어쨌든 감사합니다.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예. 그럼 이만. 혹시 다른 말씀하실 게 있다면 언제든, 이리로 연락 주십시오. 호출이 왔네요. 일이 바빠서 이만 가봐야 하겠습니다. 전화 좀 쓸 수 있을까요?
“여보세요. 그래. 무슨 일이야. 아니야. 증거가 될만한 것들을 찾았어. 그리고, 내 책상 두 번째 서랍에 그 여자 아파트에서 가져왔던 일기장이 있어. 반장이 자꾸 갈구면 그거라도 보여주고 범인은 오상현이었다고 말해. 자세한 건 가서 말하지. 그래 곧 갈게.”
4
좋아요. 우리 이런 일을 더 이상 길게 끌 필요가 없게 됐소. 당신을 무고했던 오 상현 씨가 범인이라는 게 밝혀졌어요. 그런데 자신도 할복자살을 했답니다. 별로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당신이 결백하다는 점을 확실히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자살을 한 동기나 여타의 것은 수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아마도 당신의 이 일기장에 쓰인 것처럼 그 사람이 완전히 돌아버려서 그런 일을 벌였는지도 모르겠소. 그런데 왜 당신이 그런 과거를 우리 수사에 말하지 않고 이런 고생을 사서 했었는지 아직도 난 모르겠어요. 아, 미안해요. 어쨌든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우린 혹시라도 당신이···, 아니. 그만둡시다. 지금 와서 그런 걸 따진다는 것 자체가 무슨 소용이 있겠소.
자아, 자질구레한 서류처리들을 우리가 알아서 할 테고 좀 들어가 쉬시지요. 몸이 말이 아니겠어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더 못할 짓을 한 셈이지요. 주금정 씨가 미안할 건 없어요. 혹시라도 주금정 씨가 우리를 무능한 경찰이라고 탓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번 사건처럼 이렇게 복잡하고 처리하기도 미묘한 재수사인 경우에는 별로 익숙하지 못하거든요. 어쨌든 이렇게 버젓이 사람을 죽여놓고 자신도 자살하는 사건이 많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참! 민영빈 씨의 댁으로 들어가신다고 하던데··· 아픈 기억은 빨리 지우고 앞으로 행복하길 바랍니다. 그 집안에선 당신을 며느리로 생각하시겠다고 말하더군요.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니까 그렇게 무섭게 쳐다보지 말아요. 그런데, 유럽 쪽으로 나간다는 건 무슨 말입니까? 아예. 요양 차 스위스로들 많이 간다고는 하더군요. 예? 무슨 소리를요, 한 번쯤 나가보고 싶다는 꿈이야 몇 백번도 더 꾸지만, 형사가 그럴 능력이나 되나요? 그나저나 언제쯤 오십니까? 곧 정식으로 그 집으로 들어간다는 얘기도 신문에 났던데···. 아, 미안합니다. 피곤한 사람 붙잡고 이렇게 오래 얘기를 끌고······
여자가 나가면서 언뜻 윤 선배의 모습이 시선에 들어왔다. 아마도 자료를 모두 증거 처리반에 넘기고 일기장까지 감식반에 맡긴 것 같았다. 복도에서 마주친 두 사람은 최소한 느낌상으로는 꽤나 오래 서로를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윤 선배는 끝까지 그녀의 모습을 탐탁지 않게 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이 가지고 온 자료들을 모두 그녀의 무죄증명으로 제출해 놓고서도.
“왜 자꾸만 그래요? 선배가 결국 저 여자 무죄를 증명해 줬잖아요. 혹시 알아요? 이제 재벌 그룹의 결혼도 안 한 미망인이 되었는데 선배한테 사례라도 근사하게 할지···.”
“뭔가 개운치 않아. 꼭 대본대로 아귀가 딱딱 맞아 들어가는 느낌이거든. 이렇게 딱 떨어지는 결말은 드라마나 소설에서나 나오는 거지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질 않단 말이야. 영 개운치 않아. 영 꺼림칙한 결말이야.”
“선배의 예감도 틀린 적이 있어야죠. 저렇게 비실거리는 여자가 그 억센 남자를 죽일 수나 있었겠어요? 자, 이제 끝냈으니까 나가서 소주라도 한 잔 하죠. 저 여잔 내일 스위스로 요양 간다던데, 우린 나가서 목청소라도 해야죠. 참내, 누구는 뭣 빠지게 일하고 소주에 삼겹살 먹고 누군 해외로 요양 가서 맛있는 스테이크 먹고···푸우!”
“무슨 소리야? 요양이라니?”
“예. 왜요?”
윤 선배가 미친 듯 달려 나가는 것을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한 10여분 차이였지만, 이미 그녀는 차를 타고 사라진 뒤였고, 연락을 취해서 이미 서울에 없는 사람으로 되어 있었다.
5
여보세요. 저예요. 잘했어요. 나머지 돈은 제가 스위스에 도착하는 대로 보내드리죠. 더 이상 나한테 연락하는 일은 없어야 할 거예요. 아마 당신도 이미 공범이 되어 버렸을 테니까요. 그래요. 나도 두 사람의 피를 보면서까지 얻은 자리니까 그리 쉽게 놓치진 않을 거예요. 더 이상 희생이 필요하다면 난 가리지 않을 테니까요. 사람이 죽는 거···그렇게 어렵게 만도 느낄 수 없더라구요, 사람을 죽이는 거요? 모두 나한테는 쓸데없는 얘기들일뿐이에요. 웃기지 말아요. 그래요. 하긴, 당신이 내 담당의사니까 당신이 나보고 미쳤다고 말한다면 난 미친 거겠죠. 하지만 모두 날 중심으로 돌아간 꼴이잖아요. 당신도, 그 멍청한 형사들도. 난 지금 떠나요. 다신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에요.
아마 그 영감이 죽고 내가 유산을 상속받아야 할 쯤이면 다시 나올 수도 있겠죠. 이곳은 더 이상 내가 있을 곳이 못된다는 생각·· 안 드나요? 풋! 사랑? 그런 거 의사선생이 말할 입장이 못되잖아요? 하긴 사랑이라는 거, 그게 어떤 거든 그건 이제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이제 상대에게 선택당하는 게 아니라 내가 선택하는 입장이 됐으니까. 이건 파우스트가 메피스토에게 했어야 했을 말인 것 같군요. 글쎄요. 그걸 내 탓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요?
오랜만에 올린 단편, 그것도 추리소설은 어떠셨나요?
20년도 훨씬 더 된 낡은 원고들 중에서 한 편 또 가만히 이 공간에 옮겨 실어봅니다.
(핸드폰이라는 게 잘 끊긴다는 표현에서 감잡은 독자분이 있었을지...모르겠네요.)
만지고 다듬고 털면 또 그 당시의 느낌이 없어져버릴까 싶어 부러 그대로 실어둡니다.
젊을 때의 감성은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대로의 추억을 되살리게 만드니까요.
<논어> 읽기를 마쳤지만,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아 남아버린 숙제들을 내일부터 시작해서 마치게 되면 얼추 브런치 2년을 꽉 채운 기념일을 맞이하게 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