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에게 성인(聖人)이 되는 법을 알려주랴?

방법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실천이 중요한 것이다.

by 발검무적
子曰: “性相近也, 習相遠也.”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性은 서로 비슷하나 익힘(습관)에 따라 서로 멀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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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은 性과 習을 구분하여 설명한다. 이른바 버릇이 되어버린 성질이라는 의미의 습성(習性)이라는 표현과 혼란스러울 수 있는데, 이 경우의 性은 성질이나 특성을 나타내는 부속어이므로 이 장에서 분리된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그렇기에 이 장에서 가르침이 찍는 방점은 ‘性’보다는 ‘習慣(습관)’쪽으로 조금 더 강하게 찍혀 있다.


그래서 주자는 이 장의 가르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해설로 본래 氣質之性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여기에서 말한 性(성)은 기질을 겸하여 말씀한 것이다. 기질의 성은 본래 좋고 나쁨의 같지 않음(차이)이 있으나 그 처음을 가지고 말한다면 모두 서로 크게 멀지 않다. 다만 선을 익히면 선해지고 악을 익히면 악해져서 이에 비로소 서로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장에서 공자가 지칭하는 ‘性’이란 <중용(中庸)>에서 ‘하늘이 명한 바’라고 규정한 ‘인간의 본성’이다. 아래 주석에서 확인할 수 있다시피, 북송(北宋)의 程子는 氣質之性을 가리킨다고 보았고 남송(南宋)의 주희(朱子)는 氣質之性과 本然之性을 아울러 가리킨다고 보았다.


한편, 다산(茶山; 정약용)은 性을 실체로 보지 않았다. 그는 <맹자(孟子)>와 <도덕경(道德經)>, <시경(詩經)>의 고전(古典)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면서 인간 정신의 虛靈(허령)한 본체를 ‘大體’라 하고, 大體의 구체적인 활동의 국면을 ‘道心’이라 하며, 大體가 善을 좋아하고 惡을 싫어하는 기호(嗜好)의 측면이 바로 ‘性’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性을 嗜好라고 규정하는 性嗜好說을 주장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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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에서 방점이 찍혀 있다는 설명한 ‘習’은 習慣(습관)을 가리킨다. 이는 선한 행위든 악한 행위든 그것을 학습하는 식으로 익힌다는 의미로 지칭된 것이 아니라 교육이나 환경의 영향을 받아 선이나 악의 기질을 형성해 가는 것을 가리킨 것이다.


그래서 이 장에 대한 의미에 대해 다산(茶山)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덕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러워하는 性은 聖人이나 凡人이나 같으므로 性相近이라 할 수 있지만 어진 사람을 가까이하느냐 소인을 가까이하느냐 하는 것은 갑과 을이 다르므로 결국 習相遠이 된다.”


이 설명은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의 차이는 결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서 출발해서 평범한 일반인이라 하더라도 누구를 벗하고 누구를 스승으로 삼고 누구를 경계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은 할 수 있다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안에 가장 중요한 행간의 의미에는 저마다 차이가 있는 사람들의 자질이나 노력정도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게 만드는 것은 결국 ‘제대로 된 교육’이라는 강조를 담고 있다.


그 행간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 정자(伊川(이천))는 이 장에서의 ‘性’의 의미가 本然之性(본연지성) 임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이 장을 정리한다.


“이는 氣質之性(기질지성)을 말한 것이요, 本然之性(본연지성)을 말한 것이 아니다. 만약 본연을 말한다면 성은 곧 理(이)이고 이는 선하지 않음이 없으니, 맹자가 말씀하신 성선(性善)이 바로 이것이다. 어찌 서로 비슷하다고 할 것이 있겠는가.”


자의반타의반 자신의 조국, 노나라를 떠나 천하를 주유하면서까지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자신을 품어줄 만한 위정자를 찾아 헤매었지만 결국 그는 실패하고 칠순이 다되어, 그나마 제자의 추천에 힘입어 겨우 고국을 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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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공자가 자신의 일생을 정리하며 삐뚤어진 천하를 바로잡을 마지막 방 안으로 택한 것은 제자들에 대한 교육과 그 방편인 저술이었다. 그것은 그가 이미 세상에 스스로를 드러낼 힘이 없어 노쇠해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완성된 학문 위로 천하주유를 통해 관찰하고 직접 경험한 수천수만의 케이스를 통해 결국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사람을 바꿔야 하고 사람을 바꾸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한도 끝도 없이 소요된다고 하더라도 교육을 통해 일깨움을 주는 것만 한 효과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위 주석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공자가 사회를 바꾸는데 교육을 가장 기본이자 효과적인 방편이라 생각했던 그 근저에는, 인간이 善을 좋아하고 惡을 미워하는 本性은 누구나 같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굳이 성선설(性善說)인지 성악설(性惡說)인지에 대한 주장을 설명하기에 앞서 공자의 사상은 사람이 기본적으로 사회도 자기 자신도 옳은 길로 가기를 원하는 본성이 있다고 믿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저마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남을 속이고 해하고 사회야 어찌 되든 간에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추악한 민낯을 드러내는 소위 위정자며 지식인이라고 하는 자들을 대하며 공자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고 무기력감을 느꼈을까 조금이나마 같은 길을 가려고 노력하며 나 역시 그 감정에 격하게 공감하게 되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배우지 못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이들은 물론이고 소위 배웠다고 거들먹거리면서도 자신이 배운 대로 행하지 않는 이들에 이르기까지 공자는 모두 배움을 통해 교정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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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작 이 장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교육’을 하는 주체는 스승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자신이 가진 그 생각과 마음을 유지하는데 있어 끊임없는 선택을 해야 하는 바로 자기 자신에 이 장의 강조점이 숨겨져 있다. 모두가 성인(聖人)이 되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혹 더 많은 것을 배운 자가 더 도덕적이라던가 더 좋은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은 자들이 더 훌륭하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공식을 떠벌이는 자가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이 장에서의 교육은 지식을 위한 교육만에 한정된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만약 배움만으로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문맹률이 높은 나라의 사회적 청렴도가 그렇지 않은 나라보다 언제나 높아야 하겠지만 누구나 알고 있다시피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힌 자들이 많은 사회일수록, 이른바 화이트칼라 범죄가 훨씬 더 많아진다는 통계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장의 가르침에서 말하는 습관을 만드는 행위 자체를 교육만으로 한정 짓는 것은 오히려 공자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는 것은 고사하고 그 손가락조차 보지 못하는 누를 범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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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가 보면 우리는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어린 시절 본능적인 도벽(盜癖)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 때 범할 수 있는 실수의 순간을 어떻게 겪고 지나오는가에 대한 것도 그 좋은 사례이다. 그저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며 그것을 덮어주는 어른이거나 아니면 그것을 범죄라며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따끔한 혼쭐을 내는 경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성장통을 겪게 되는데, 모두가 똑같은 판단과 선택을 하지 않고 저마다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나보다 성적이 좋은 친구가 마침 앞자리에 앉아 있는데, 그 답안지가 눈에 들어오게 되는 짧은 순간에서부터 겨우 들어간 회사의 공금을 처리하면서 회계처리에 빈틈이 보일 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선택의 순간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다.


공자가 이 장에서 강조하는 습관이란 ‘학이(學而) 편’에서 배웠던 바로 그 새의 날갯짓에 해당하는 몸에 배일 정도의 반복과 훈련에 해당한다. 그것은 어느 날 하루아침에 단 한 번만의 선택만으로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 단어를 외우고 개념을 익히기 위한 지식 공부에도 계속해서 읽고 쓰고 해야 하는 반복이 필요한데, 자신의 사리사욕과 올바른 정도(正道) 사이의 큰 괴리 속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 책에서 한두 번 읽었다고 밑줄 쳤다고 내 마음과 양심에 새겨져 그것이 행동으로 드러난다면 어느 누가 고민하고 사고를 치겠는가?


이 장에서 강조하는 선택은 그러한 도덕적 판단에만 그치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더 발전하기 위해 갈망하고 그것을 위한 능동적인 선택들이 모두 나를 더 고양된 존재로 만드는 노력에 해당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내가 배울만한 것이 있는 친구를 곁에 두고 함께 배우고자 하는 선택, 어렵지만 더 나를 발전시켜 줄 수 있는 스승을 찾아 따르는 것,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이들과 뜻을 함께 하고자 찾아 나서는 것 등등이 바로 그것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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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중고등학교, 아니 초등학교에서도 자신이 들을 수업을 택하는 시대라고 하지만, 내 시대에는 대학에 가서야 내가 들을 수 있는 수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다. 그나마도 전공필수라는 이름으로 선택권이 100%는 아니었지만 그나마 대학에서 준비한 수업 중에서 내가 과목이나 교수를 확인하고 그의 수업을 신청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었다.


아마도 공자의 시대, 아니 훨씬 이전부터 그래 왔겠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어떻게 하면 더 발전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학점을 따기 쉬운 수업이나 교수와 그렇지 않은 경우는 너무도 확연하게 차이가 나기 마련이었다. 깐깐하고 학점을 따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 교수의 수업인 경우 항상은 아니었지만 그 수업에서는 분명히 얻을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있었고, 그것은 반드시 학점과 정비례하는 것만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점이 좋게 나오지 않을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해당 수업을 듣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똑똑하다고 전국에서 서울대까지 들어온 이들은 더더욱 그랬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렵게 공부해서라도 무언가를 배우고 더 많이 익히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학점을 기록에 남겨 세상에 필요한 보여지는 것만이 필요할 뿐, 상아탑이 더 깊은 심연의 학습을 위한 준비장이라는 본연의 기능을 잃은 것이 다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금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대학이 상아탑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지엽적인 부분을 성토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미 중고등학교는 대학을 가기 위한 방편일 뿐이고, 학교에서 배우는 정규교육은 이미 학원에서 선행을 통해 배워 수능에서 만점을 맞기 위해 미리 끝내고 내신 때만 학교 족보에 맞춰 주변 아이들보다 더 뛰어난 성적을 받는 수단일 뿐, 교육이 정작 필요한 교육인 시기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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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원인이 단순히 제도 탓이고 정책 탓이고 나라 탓일까? 그것을 원해서 하는 사람은 없다고들 모두가 성토한다. 당장 입시지옥에 내몰려 초등학교 때부터 무간학원지옥의 틀을 끊임없이 달려야만 하는 입시생들이 그러하며 자식을 그렇게 독려하는 부모가 그러하며, 그 해당범위에 속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 모두가 그러하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 우리 모두가 만든 선택에서 기인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한다. 사회에서는 언제나 서열이 있어야 하고 교육기관인 중고등학교, 대학교도 교육기관이 아닌 서열을 정하는 기관으로 변질되어 버렸고, 실제로 그들이 사회를 장악하고 소위 사회지도층이라고 스스로 참람되이 지칭한다.


한자부터 공부하지 않고서 동양고전을 술술 읽으며 고문을 깨치는 일은 불가능하다. 현재 사용하지 않은 한문(漢文)을 읽으며 고전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루이틀 대강 공부하는 시늉을 내거나 엉성하기 그지없는 번역본을 보며 대조하며(?) 읽는다고 해서 한두 해만에 이른바 문리(文理)가 트이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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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그렇게 매일같이 노력하고 읽어내려는 습관을 들이게 되어 문리(文理)가 트이게 되면 동양고전철학의 정수에 해당하는 원전을 스스로 읽어낼 수 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언어로 쓰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을 읽는 것 역시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읽지 못했던 언어로 쓰인 진리(眞理)를 읽고 싶어 스스로 공부를 하는 이들이 많지 않은 세상이 되어버린 지금, 정작 올바른 사람으로 사는 방법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부모나 선생님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기 어려운 시대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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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장관에게 사회부총리라는 별칭을 주는 쇼만 한들 그것이 한낮 감투에 지나지 않는 현실에서 그 잘못 돌아간 것들을 바꿔나가는 것은 결국 선택을 잘못한 우리 모두의 책임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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