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子曰: “飽食終日, 無所用心, 難矣哉! 不有博奕者乎? 爲之, 猶賢乎已.”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배불리 먹고 하루를 마쳐서 마음을 쓰는 것이 없다면 어렵다. 쌍륙(雙六)과 바둑이 있지 않은가. 이것이라도 하는 것이 그만두는 것보다는 낫다.”
이 장의 가르침은 문면 그대로 읽으면 뜻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어려운 의미를 보이고 있지 않다. 요컨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장기나 바둑을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라는 의미로 대개의 현대 해설서에서 해설하고 있는 평범한(?) 장으로 설명되고 한다.
서점의 한 칸을 가득 채울 정도로 <논어(論語)>의 이름을 달고 출간된 서적이 그리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간단한 의미조차 제대로 해제해 주는 저자와 해설서가 없다는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이 장은 이제까지의 어떤 고도의 비유보다 훨씬 더 중의적이고 다각적인 의미의 비유와 메시지가 한 단어 한 단어에 녹아들어 가 있는 전형적인 공자식 은미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방식을 갖추고 있다.
아래 주자의 주석을 보면, 오히려 당대의 배우는 자들에게는 이 장의 표현자체가 그리 은미할 것이라고는 없을 정도로 명징한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들게 만드는데, 현대인들의 사유가 갖는 차이가 그렇게 큰지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볼 문제라 본다.
‘博(박)’은 판으로 놀이하는 것이요, ‘奕(혁)’은 바둑알을 에워싸는 것이다. ‘已(이)’는 그만둠이다.
주자의 주석은 내가 쌍륙(雙六)과 바둑으로 해석한 용어가 정확히 어떤 놀이인지를 풀이해 준 것 정도로 그친다. 내가 장기라고 번역한 ‘博’에 대해 주자는 ‘局戱(국희)’라고 주석하고 있다. 대부분의 논어 해설서를 살펴보게 되면 그저 알기 쉽게 바둑과 연계하여 흔히 ‘장기’라고 대강 번역하고 만 것을 볼 수 있는데, 정확한 의미는 장기가 아니라, 주사위를 이용하여 놀이하는 ‘雙六(쌍륙)’을 의미한다. 아무리 의역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저 현대인들이 말하는 장기나 바둑처럼 해석하는 것은 원문의 의미를 혼란스럽게 할 수 있으니 명확하게 정정하여 번역한다.
이 장의 은미함(?)을 풀이하기 위해 첨언하자면, 이 장에서 의미하는 ‘博奕’은 도박(賭博) 성 놀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킬링타임용 유희(遊戱)로서의 행위를 지칭한 것임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똑같은 놀이인데 그것으로 돈을 따기 위한 것이라면 도박이고 그저 시간을 죽이기 위한 소일거리로 하는 놀이인 것과 왜 구분하여 설명하는지 의아할 수도 있겠다. 그 의미의 차이를 구분하는 이유에 대한 실마리는 이 장의 의미를 풀이한 이 씨(李郁(이욱))의 주석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인이 사람들에게 쌍륙과 바둑을 하라고 가르치신 것이 아니요, 마음을 쓰는 바가 없는 것이 불가함을 깊이 말씀하셨을 뿐이다.”
이 주석에서 다시 강조한 바와 마찬가지로 이 장의 핵심 방점은 바로 ‘마음을 쓰다.’에 있다. 바로 어제 공부했던 내용에서 공자가 제자인 재여(宰予)에게 쌀밥에 비단옷을 입는 것이 편안하냐고 물었던 그 편안함이, 이 장의, ‘배불리 먹고 하루를 마치는 것’으로 환치된 것임을 읽어낸 학도가 있다면 초급단계는 벗어났다고 칭찬 먼저 해주기로 한다.
이 장에서 ‘마음을 쓴다’함은 무언가를 위해 전일하여 목적을 가진 의도적 행위를 하는 것을 통칭한다. 때문에 앞서 쌍륙이나 바둑의 의미를 돈을 따겠다는 목적의 도박이 아닌 시간 보내기 용의 유희로 해석한 것인데, 공자가 굳이 그 의미 없는 킬링타임용 놀이라도 하는 것이 그만두는 것보다는 낫다고 대비한 것은 실제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인 사례로 제시한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의문이 생긴다. 현대인의 현대어의 논리로 보면, ‘킬링타임용 놀이를 하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듯 싶은데, 분명히 공자는 이 장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라는 현대어식 표현이 아닌 ‘그만두는 것보다는 낫다’라는 표현으로 약간의 의아하고 어색한 여지를 남긴다. 도대체 무엇을 그만둔다고 한다는 것인지 목적어가 없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바로 앞 문장에서도 비슷한 걸림은 또 있었다. ‘마음을 쓰는 것이 없어서는 안 된다’라 표현하지 않고 ‘마음을 쓰는 것이 없다면 어렵다’라고 하였다. 도대체 무엇이 어렵다는 것인지 역시 구체적인 표현이 빠져 있지 않은가?
이렇게 철학적 의미와 언어학적 구조를 해체해놓고 나니 이 장이 당신이 이제까지 읽었던 그 뻔한 가벼워서 날아가기 십상인 수많은 해설서의 해석에는 담겨 있지 않은 육중하고도 혼자서는 들기 어려운 무게의 가르침이 가득 담겨 있었던 것이 느껴지지 않는가?
해설서뿐이었겠는가? 심지어 한국기원이나 바둑학원의 창피한 것도 모르는 자들은, 이 장을 인용하며 공자께서도 바둑 두는 것을 옹호하였다는 근거로 언급하는 어설픔의 극치를 보여주며 스스로 부끄러운 줄도 모르니 정작 이 장의 의미를 제대로 일러주지 못한 가르치는 이들의 잘못이 얼마나 큰지 반성하게 된다.
이제까지 당신의 눈에 보이지 않았던 그 꽉 차 있던 이 장의 가르침이 갖는 무게를 풀이할 실마리를 <대학(大學)>에서는 다음과 같이 제공한다.
“小人閑居에 爲不善호되 無所不至니라.(소인은 한가로이 거처할 때 좋지 못한 짓을 하되 이르지 못하는 바가 없이 한다.)”
내가 한창 고문(古文)을 공부하던 어린 시절, 한 스승은 이렇게 말했더랬다.
“자기 공부란 특별히 할 일이 없다 느낄 때, 그야말로 한가롭다 느낄 때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젊었던, 아니 한참 어렸던 그즈음에 그 말의 의미는 내게 다가오지 않았더랬다. 하루에 몇 권의 책을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버겁고 새로운 지식을 집어넣고 내 것으로 만드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인데 특별히 할 일이 없을 때는 언제이고 그야말로 한가롭다 느낄 틈이 어디 있다고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내가 제자들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고 그 바쁜 일상 속에서 내 논문을 쓰고 내 글을 쓰고 내 공부를 하려고 할 때가 되어서야 그 말의 의미가 피부에 와닿았다. 먹고살기 위해 회사를 다니고 농사를 짓고 몸을 굴려 일을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생업을 위한 것이다. 생업을 위해 하는 일이 자신의 덕성을 기르고 사회를 올바르게 하는 것과 맞닿아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으나 그것은 말 그대로 희망사항일 뿐 대개의 호구지책(糊口之策)은 말 그대로 먹고살기 위한 행위일 뿐 진정한 구도(求道)와는 거리가 있는 행위일 경우가 많다.
물론 사리사욕을 위해 더 많은 돈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움켜쥐겠다고 방자하게 구는 자들은 앞서 인용한 <대학(大學)>의 문구에 해당하는 소인(小人)들과 같이 ‘한가로이 거처할 때 좋지 못한 짓을 하되 이르지 못하는 바가 없이 한다.’
눈치챘는가? <대학(大學)>에서 의미하는 ‘한가로이 거처한다’는 표현은 이 장에서 ‘배불리 먹고 하루를 마치는 것’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필수적으로 해야 할 생계를 위한 직업으로서의 행위를 제외한 행위를 통칭하는 말이 바로 그것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먹고살기 위한 필수적인 행위 외에 다른 시간과 정력을 무엇에 써야 할 것인가에 대한 권계가 바로 이 장의 행간에는 담겨 있다.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행위 이외에 자신이 전심을 다해 해야하는 것은 당연히 자신을 가다듬는 일이다. 그것은 배우고 익히는 것일 수도 있고, 그 배운 것을 실천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을 가르치는 것일 수도 있고, 가장 가까운 자기 자식을 돌보고 바르게 가르쳐 올바른 인식을 갖게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자신의 덕성(德性)을 쌓아 올바르지 못한 것을 보고 그냥 넘어가지 않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그 목적에 해당할 수 있다.
그래서 공자는 킬링타임용 게임이라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표현하지 않고 ‘그만두는 것보다는 낫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즉, ‘그만둔다’는 말의 목적어는 그러한 소기(所己)의 목적을 방기하고 그저 현재 자신이 누리는 것에 만족하여 德性을 기르지 않고 시간을 허비하는 자들의 방만함과 안일함을 지적한 것이다. 그렇게 안일하게 지내기보다는 차라리 쌍륙이나 바둑에라도 마음을 專一(전일)하게 쏟는 것이 낫다는, 아예 스스로를 방치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는 자조적인 표현이니 결코 쌍륙이나 바둑이라고 하는 것이 좋다는 표현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이나 먼 표현, 되시겠다.
조금만 더 깊숙이 들어가 보면, 이 장의 핵심 방점이 찍힌 ‘마음을 쓰다’라는 의미는 그것이 무엇이 되었다 하더라도 마음을 쓰는 것은 학습이자 반복된 노력으로 일궈내야만 하는 수양의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한 가장 직접적인 표현으로, <맹자(孟子)>의 ‘등문공(滕文公) 상(上)’에는 “인간에게는 도리가 있거늘,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어 편안히 지내기만 하고 가르침을 받는 일이 없으면 금수와 가깝게 되고 말 것이다.”라고 강조한 바를 볼 수 있다.
이 장의 ‘飽食終日’이나 위에 인용한 <대학(大學)>의 ‘閑居’, <맹자(孟子)>에서의 ‘飽食煖衣’는 모두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무언가를 하는 바가 전혀 없이 빈둥거리며 지내는 ‘逸居(일거)’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때야말로, 마음 쓰는 바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순수한 유희라도 가치가 있다고 역설한 것이다.
행여 이 장의 내용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뭐라도 하라는 식으로 오독하고 넘어가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렇게 해석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킨 적지 않은 해설서의,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책까지 출간한 무책임하기 그지없는 작가라는 자들을 포함한 이들의 무지하기 그지없는 미필적 고의를 보면서 이 장의 의미를 다시금 새긴다.
제대로 공부하지 않아 잘 알지 못한다면 차라리 침묵하고 나대지 않는 것이, 자신의 허황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헛된 부귀영화를 위해 정치판에서 떨려 날까 행여 자신의 존재가 지워져 공천을 받지 못할까 공천을 받아도 국회의원 배지를 달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두려운 나머지 해선 안될 짓까지 벌이는 것은 앞서 <대학(大學)>에서 호통쳤던 소인배의 전매특허 행동일 뿐이다.
젊은 혈기에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며 사회가 군바리 정권에 의해 퇴보하고 있다며 화염병을 들고 가투에 나섰던 운동권 출신 총학회장이라는 경력을 앞세워 정치판에 투신한 자들은 386세대 때부터 적지 않았다. 썩어빠진 경찰 출신이면서도 자신이 마치 정의로운 경찰이었다며 정치판에 투신한 자들 역시 적지 않다. 검찰과 법원에서 검사와 판사직을 하다가 자신이 제대로 나라를 정의롭게 바꾸겠다며 자신만이 정의로운 척 정치판에 나선 법비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다. 인권변호를 했다고, 사회참여단체의 변호사로 활동했다며 정치판에 뛰어든 자들 역시 적지 않다.
그런데, 그들이 여의도에, 정치판에 뛰어들어 무엇을 했는지 그들이 짧지 않은 4년간 혹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10여 년이 넘는 세월이 넘도록 무엇을 이뤄냈는지 꼼꼼히 살펴보라. 그들은 어느 사이엔가 국민을 대신해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하는 임무와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는 인식보다는 그들의 위에 군림하여 행사에 참여하여 거들먹거리며 손을 흔들고 적당히 악수를 하며,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행위 이외의 것에는 그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일을 잘 봐달라고 돈봉투를 움켜쥔 자들이 아니면 만나주지도 않으면서 그런 자들을 위한 민원을 해결하다가 문제가 되었을 때는 지역민원을 적극적으로 해결해주려고 했다는 둥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변명이라고 쏟아낸다. 그들은 결코 한가할 틈조차 없다고 볼멘소리를 토해낸다. 그런데 그들의 홈페이지를 찾아가 그들이 홍보해 놓은 자료를 통해 스케줄들을 살펴보라. 그들이 과연 정말로 돈 없고 힘없는 이들의 민원을 위해 단 한 번이라도 발 벗고 뛴 적이 있는지.
그들을 닮아 보좌관도 비서관도, 그 밑에서 매일 민원전화받는 인턴조차 국민들의 전화를 “눼눼”하고서 내팽개치고 모른 척하는 것이 매뉴얼이 되어버린 사실을 알고서도 당신은 다시 그들에게 표를 던져줄 것인가? 개돼지취급을 또 자처할 셈인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