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첫 장을 제대로 이해하는 이들은 몇이나 될까?

많이 들어보고 해석을 떠들어대는 것은 알고 있는 게 아니다.

by 발검무적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항상)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 同志가 먼 곳으로부터 찾아온다면 즐겁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해하지 않는다면 君子가 아니겠는가?”

<논어(論語)>의 저 유명한 첫 장이다. 수학을 포기했다는 이른바 ‘수포자’도 <수학의 정석> 첫 페이지 즈음은 이것저것 밑줄을 치고 형광펜도 칠해져 있기 마련이다. 서양에 <성경>이 있다면 동양에는 <논어>가 있다는 말이 전할 정도로 <논어(論語)>를 모르는 이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고 이 첫 장의 첫 구절만 들어도 그것이 <논어>의 내용임을 알아듣는 사람들은 많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사실은 그렇게 유명하고도 일반화된 <논어(論語)>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이들은 그다지 없다는 점과 전문가를 자처하며 현대 해설서를 낸 서적들 조차 그 행간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해 내고 풀이한 정통한 책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수포자의 <수학의 정석>처럼 첫 장에서 몇 페이지 지나지 않아 책은 깨끗한 상태로 유지되어 버리는 것과 같이, <논어(論語)>가 어떤 책인지도 알고 꼭 읽고 싶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 정도는 읽어야 인문학적 소양을 갖췄다고 여기면서도 정독으로 끝까지 읽어낸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만나기 어렵다는 현실이다.


굳이 <논어(論語)>의 첫 장을 시작하며 이런 암울하기 그지없는 현실을 개탄하는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은, 왜 <논어(論語)>를 반드시 공부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바로 이 첫 장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수학의 정석>은 첫 장 즈음만 공부하는 척하다가 덮어도 다닐 대학의 레벨이 낮아질 뿐, 인생이 망쳐지는 것까지는 아니겠으나 <논어(論語)>는 그것을 공부한 사람의 삶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삶이 판연하게 달라지는 척도가 된다고 단언할 수 있다. 물론 이 문장에서 ‘공부’라는 표현은 그저 읽고 풀이하고 무슨 의미인지를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이제부터의 공부를 통해 깨닫게 될 것이니 지금은 부연하지 않겠다.

첫 장의 첫머리에서 공자는 말한다.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항상)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 배우고 익히는 것이 기쁜 일이던가? 잠시 멈칫하며 고개를 갸웃거릴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주자는 <논어(論語)>공부를 시작하는 첫걸음의 주석에서 공자가 말하는 ‘배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먼저 확실한 개념규정이 필요하다고 여겨 다음과 같이 아주 상세하게 그 의미를 풀이해 준다.


‘學(학)’이란 말은 본받는다는 뜻이다. 사람의 본성은 모두 선하나 이것을 깨닫는 데에는 선후가 있으니, 뒤에 깨닫는 자(後覺者(후각자))는 반드시 먼저 깨달은 자(先覺者(선각자))가 하는 바를 본받아야 선을 밝게 알아서 그 本初(본초)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習(습)’은 새가 자주 나는 것이니, 배우기를 그치지 않음을 마치 새 새끼가 자주 나는 것과 같이 한다는 것이다. ‘說(悅)(열)’은 기뻐한다는 뜻이다. 이미 배우고 또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배운 것이 익숙해져서 중심에 희열을 느껴 그 진전이 저절로 그만둘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주자의 주석에 따르면, 공자의 ‘배움(學)’이란, 앞사람을 본받는 일에서 시작해서 스스로 깨닫는 일까지를 가리킨다.


원문에서 ‘때때로’에 굳이 ‘항상’이라는 괄호를 넣은 것은 현대어로 대강 ‘때때로 익히다’라는 이 구절의 의미를 현대어식으로 오독하는 이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현대어에서의 ‘때때로’가 갖는 의미는 ‘항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끔’ 혹은 ‘시간이 날 때면’ 정도로의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그저 기계적으로 ‘때때로’라고만 읽어버리면 공자가 강조하려고 하는 ‘습(習)’의 의미를 놓치기 쉽기 때문이다.

이른바 학습(學習)에서 ‘습(習)’이 갖는 의미에 대해 주자가 새의 날갯짓에 비유하면서 상세하게 부연한 것도 그것이 단순히 익숙해지기 위한 과정만으로 설명이 그쳐서는 안 됨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그 의미에 대해 정자(伊川(이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부연한다.


“‘習(습)’은 重習(중습, 거듭함)이니, 때로 다시 생각하고 演繹(연역)해서 가슴속에 흡족하게 젖어들면 기뻐진다.”


그렇기에 ‘學習(학습)’은 어떤 지식이나 기술을 배우는 데 그치지는 것이 아님을 정자는 역설한다. 배운 것을 스스로 깨닫고서 반복하여 익혀 자기 것으로 삼는 體得(체득)의 일을 통칭한 것이야말로 학습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공자가 그것을 왜 기쁜 일이라고 하였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배우는 것은 장차 그것을 행하려고 해서이니, 때로 익힌다면 배운 것이 나에게 있기 때문에 기뻐지는 것이다.”


이 주석의 방점은, 기쁜 이유를 설명하는 뒷문장보다 왜 배우는 가에 대한 목적의식을 툭 던지듯이 설명한 첫 문장에 있다. <논어(論語)>에서 전하는 공자의 가르침에 있어, 배움이란 곧 행함을 의미한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그저 모르는 것을 배워서 알고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에서 그친다면 배움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는 설명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실천이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몸에 배어 나오는 수준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부가 완성되기 위해서 바로 ‘습(習)’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이해와 설명이 맞물려 나온 것이다.

그래서 사 씨(謝良佐(사량좌))는 그것이 모든 상황과 대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임을, 그리고 그것이 일이관지(一以貫之)의 관점에서 모두 통용되기 위해서는 바로 ‘습(習)’이라는 개념이 갖는 의미가 강조됨을 다음과 같이 재차 부연한다.


“‘時習(시습)’이란 때마다 익히지 않음이 없는 것이니, 앉아 있을 적에 尸童(시동)과 같이 함은 앉아 있을 때의 익힘이요, 서 있을 적에 齊戒(제계)할 때와 같이 함은 서 있을 때의 익힘이다.”


배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어질 줄 알았던 논리는 뜬금없이 ‘기쁨’과 ‘즐거움’이라는 화두로 엮여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는 것도 즐거운 일이라며 설명한다.

원문에서 내가 늘 현대 번역서에서 번역하듯 ‘친구’라는 용어로 번역하지 않은 이유는 아래 주자의 주석의 행간을 뒤척이면 그 의도를 알 수 있다.


‘朋(붕)’은 동류(동지)이니 먼 지방으로부터 온다면 가까이 있는 자들이 〈찾아옴을〉알 수 있다.

공자와 그 가르침을 받은 학자들에게 있어 ‘朋(친구)’의 개념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뜻을 함께 하는 이’라고 하여 ‘동지(同志)’라 번역한 것이다. 현대어인 ‘친구’의 개념은 워낙 광범위하기 때문에 공자가 규정하고 있는 ‘朋(친구)’의 개념과는 확실히 그 맥락이 다르다는 것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어 부러 그리 표현한 것이다.


위 주석의 뒷절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굳이 먼 곳에서 온 동지의 방문이 즐거운 이유는 멀리서 찾아와 주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멀리서도 찾아올 정도라면 가까운 이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임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정자(伊川(이천))는 그것이 즐겁다고 표현한 공자의 설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하고 있다.


“선을 남에게 미쳐서 믿고 따르는 자가 많다. 그러므로 즐거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공부하고 익히는 것을 즐겁다는 표현으로 ‘說(열)’을 썼는데, 동지가 멀리서 찾아오는 것의 즐거움에 대해서는 ‘樂’을 쓴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다시 부연설명하고 있다.

“說(열)은 마음속에 있고, 樂(락)은 발산함을 위주하니 외면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개인의 주관적인 즐거움에서 그 즐거움을 공유하는 바가 외연을 확장하고 있음을 유념하라는 가이드라인에 다름 아니니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기쁨과 즐거움의 화두로 연계된 두 명제를 논하고서 마지막 마무리 문자엔 뜬금없이(?)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해하지 않는다면 君子가 아니겠는가.’라며 군자를 지향한다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바를 설명한다.


주자는 ‘慍(서운하다)’라는 의미와 군자라는 용어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慍(온)’은 노여움을 품은 뜻이다. ‘군자’는 덕을 완성한 자의 명칭이다.

마지막 문장이 뜬금없다고 여길 초심자들을 위해 공자의 논리적 흐름이 결코 생뚱맞은 것이 아님을 윤 씨(尹焞(윤돈))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학문은 자신에게 달려 있고,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음은 남에게 달려 있으니, 어찌 서운해할 것이 있겠는가.”


앞서, 배우고 익히는 개인적인 즐거움과 배움의 완성을 통해 실천이 병행되면서 동지들이 나와 뜻을 함께 하여 따르고 찾아오는 외연의 확장을 설명한 내용을 결국 어떻게 삶에서 반영하고 실천해야 하는지를 설명한 것이 마지막 문장의 의미라는 해설이다.

배움과 수양과 실천은 개인적인 범주이니 혼자서 노력하고 그럴 수 있겠으나 결국 그것이 동지(同志)들에게 인정을 받거나 움직임을 수반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자신이 좌우하는 것이 아님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수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그저 구분하기 위한 설명이 아니라 그것이 선순환구조를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배움과 수양, 그리고 실천이 나 아닌 타인들에게 어떻게 인지 되는가를 통해 그 서운함을 남에게 돌릴 것이 아니라 역시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공자의 기본적인 가르침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정자(伊川(이천))는 군자라는 표현으로 공자가 완곡하게 설명한 목표지향점이 마땅히 취해야 할 마음가지과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비록 〈선을〉 남에게 미치는 것을 즐거워하나 〈남에게〉 옳게 여김을 받지 못하더라도 서운해함이 없어야 비로소 이른바 ‘군자’라는 것이다.”


그렇게 마지막 문장이 앞서 두 문장의 과정을 모두 연계하여 논하고 있음을 배우는 자들이 인지하고 생각해 보라며 주자는 다음과 같이 이 장을 정리한다.


“남에게 미쳐서 즐거운 것은 인정에 순한 것이어서 쉽고, 알아주지 않는데도 서운해하지 않는 것은 인정에 반하는 것이어서 어렵다. 그러므로 오직 덕을 이룬 군자만이 능한 것이다. 그러나 덕이 이루어지는 까닭은 또한 배우기를 올바르게 하고 익히기를 익숙히 하고 기뻐하기를 깊이 하여 그치지 않음에 말미암을 뿐이다.”


앞서 개인적인 즐거움과 공유할 수 있는 즐거움으로의 외연확장의 표현으로 구분된 說(열)과 樂(락)이 갖는 의미에 주목해야 하는 의미를 정자(伊川(이천))는 다시 한번 다음과 같이 강조함으로써 그 격차를 설명한다.

“樂(락)은 說(열)을 말미암은 뒤에야 얻어지는 것이니, 樂(락)이 아니면 군자라고 말할 수 없다.”

혼자서 배웠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통달했다고 득의양양해하는 시기를 누구나 겪곤 한다. 이만하면 정말로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이 아주 잠시 기쁨을 주는 경우를 누구나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밤새 쓰고 훌륭하다고 여겼던 논문조차 잠시 눈 부치고 일어나 다시 읽어보니 얼굴이 붉어질 정도의 지경임을 확인하는 과정은, 이후에 그 부끄러움을 어떻게 더 나은 발전의 계기로 삼기 위해 노력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누가 말해주기 전에, 누가 비난하고 트집 잡기 전에, 자신의 부족함을 가장 먼저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이다. 무엇보다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 말고는 없기 때문이라는 진리 때문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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