子夏가 말하였다.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되(존경하되) 女色을 좋아하는 마음과 바꿔서 하며, 父母를 섬기되 능히 그 힘을 다하며, 君主를 섬기되 능히 그 몸을 바치며, 朋友와 더불어 사귀되 말함에 성실함이 있으면, 비록 배우지 못했다고 말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웠다고 이르겠다.”
이 장에서는 자하(子夏)의 입을 통해 공자의 가르침 중에서도 왜 배우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일러주고 있다. 굳이 공자의 말씀이라 하지 않고 자하(子夏)라는 제자를 등장시켰는가에 대한 호기심(?)은 대략 다음의 이유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자하(子夏)에 대한 후대의 평가 중에서 그 이유로 유추할 수 있는 설명은 바로 ‘시(詩), 서(書), 예(禮), 악(樂)은 공자가 편저(編著)하였으나, 장구(章句)를 밝히는 일은 자하에서 비롯된 일이다.’라는 말로 압축된다. 뒤에서 그에 대한 스승 공자의 평가가 언급되는 ‘선진(先進) 편’의 15장의 저 유명한 ‘과유불급(過猶不及)’을 들어 공자가 자하(子夏)를 그다지 인정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몇몇 현대해설서가 보이는데, 그것은 그에 대한 폄하나 비난을 담보하는 평가가 아니라는 점에서 잘못된 일반화의 오류라고밖에 볼 수 없는 초보적인 오독(誤讀)이다.
아래 주석에서도 언급되지만, 자하(子夏)는 수많던 공자의 제자 중에서도 문학에 일가견이 있다고 객관적인 평가를 받은 몇 안 되는 대표적 인물 중 하나였다. 일단 그 수많은 제자들 중에서도 <논어(論語)>에 무려 20회나 언급되며 등장하는 것만 보더라도 그가 스승의 곁에서 차지했던 비중을 결코 부족했다고 폄하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참고로, 그가 등장한 절반이상인 11회나 되는 언급은 ‘자장(子張) 편’에 몰려 있다는 특징을 보인다.
자하(子夏)는 위(衛) 나라 사람이었던 출신 배경 덕분에 이후 위나라 문후(文侯)의 스승이 되어 제(齊) 나라 직하(稷下) 학파의 모델이 된 위나라의 학단(學團)을 형성하기까지 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배우고 실천했던 스승의 가르침에 대해 주자는 어떻게 풀이하고 있는지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자하(子夏)는 공자의 제자이니, 성은 卜(복)이요 이름은 商(상)이다. 남의 어짊을 어질게 여기되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과 바꾸어서 한다면 선을 좋아함이 성실함이 있는 것이다. ‘致(치)’는 委(위)와 같으니, 그 몸을 委致(위치)한다(바친다)는 것은 그 몸을 두지 않음을 이른다. 이 네 가지는 모두 인륜의 큰 것이요, 이것을 행함에 반드시 그 정성을 다해야 하니, 배우는 것은 이와 같음을 구할 뿐이다. 그러므로 자하가 “능히 이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만일 타고난 자질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면 반드시 학문에 힘쓰기를 지극히 해서일 것이니, 비록 혹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일찍이 배우지 못했다고 말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이미 배웠다고 이르겠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 장의 가르침은 ‘賢賢’에서 연상되듯이, 마치 공자의 정명론(正名論)에서 사용된 지극히 축약된 문법적 구조나 중의적 의미의 사용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워낙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등장하기도 한다. 예컨대 내가 본문에서, ‘여색(女色)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마음과 바꾼다면’이라고 해석한 ‘易色’이라는 용어의 해석에 대해서도 ‘色’에 대한 해석도 각양각색이다. 한(漢) 대와 위(魏) 대의 학자들은 여색(女色)이 아닌, 그저 인간이 본능적으로 좋아하는 것의 상징으로서의 의미로 해석하였는데, 육조(六朝) 시대의 해석에서는 ‘안색(顔色)’으로 해석하여 현인(賢人)을 숭상하는 자세를 묘사한 것으로 풀어 평소의 안색이 아닌 공경하고 장중한 모습으로 실천해야 한다고 풀이하기도 하였다.
이후, 송(宋) 대의 학자들은 ‘賢賢’과 ‘易色’을 아예 이원화하여 ‘현인을 숭상하고 여색을 가벼이 여기라’라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기도 하였다. ‘易’를 ‘바꾸다’의 의미가 아닌, ‘가벼이 여기다’라는 다른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이는 송대(宋代)의 도덕주의에 경도된 시대정신이 지나치게 반영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어, 원문의 의미와는 너무도 멀어진 풀이로 본다.
다양한 후대 학자들의 해석이 있긴 하지만, 역시 본래의 가르침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결국 이 장에서 일러주고자 하는 가르침의 본질은 인간의 본능을 배움을 통해 가치지향적인 것으로 향하게 하는 수양을 해야 한다는 전제하에 부모와 군주와 친구를 대함에 있어 내 진솔함 모두를 그대로 상대에게 전달할 수 있는 진정성이 수천수만 권의 책을 배운 가식보다 훨씬 더 훌륭하다는 반어를 통한 강조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유 씨(游酢(유초))는 이 장의 본질이 결국, ‘배움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답해주면서도 그 기반에는 인륜(人倫)을 바로 세우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음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삼대의 학문은 모두 인륜을 밝힌 것이었으니, 이 네 가지에 능하다면 인륜에 두터우니, 배우는 도가 어찌 이보다 더한 것이 있겠는가. 자하는 문학으로 알려졌는데도 그 말이 이와 같았으니, 그렇다면 옛사람들의 이른바 ‘배움’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學而(학이)) 한 편은 대체로 모두 근본을 힘씀에 있다.”
한편, 오 씨(吳棫(오역))는 자하(子夏)가 이 장에서 옮기는 스승 공자의 가르침이 담은 정수가 혹여 초심자들에 의해 경도되어 이것만을 강조하여 지엽말단의 것에만 치중될 것을 경계하라며 앞서 공부했던 학문의 근본에 대한 공자의 설명과 기본적인 마음자세를 다음과 같이 환기시키며 이 장을 정리한다.
“자하(子夏)의 말은 그 뜻이 좋다. 그러나 말하는 사이에 抑揚(억양, 억제하고 찬양함)이 너무 지나쳐서 그 말류의 폐단이 장차 혹 학문을 폐지하는 데에 이를 수 있으니, 반드시 앞 6장의 (여력이 있으면 글을 배우라는) 夫子(부자)의 말씀과 같이 한 뒤에야 폐단이 없게 될 것이다.”
전체 해석과는 별개로 문장의 맨 앞에 나오는 ‘賢賢易色’에 대해 후대의 다양한 해석을 잠깐 소개하였는데, 굳이 시대별로 변이한 상황까지 소개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이 장을 공부하면서 그저 막연하게 공자의 정명론적 구조이고 당연한 말씀을 한 것이라며 대강 지나쳤던 그 문구에 공자가 그 가르침을 전달했던 당대의 시대적 흐름이 담겨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설명하고자 함이 그 이유였다.
<논어(論語)>를 대강이라도 읽은 자들은, 아니 <논어(論語)>를 읽지 않은 자들조차도 공자가 현인(賢人)의 대명사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런데, 공자가 칠십이 넘는 평생 동안 제대로 된 대접을 받으며 중용되거나 최소한 작은 나라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위정자의 초빙을 받거나 절대적인 신뢰하에 중용되어 실질적으로 나라나 사회를 바꾸는 실행을 감행해보지도 못한 홀대를 받았음도 대부분의 학도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장과 상관없는 무슨 뜬금없는 말을 꺼내는 것인가 의아해할 필요 없다. 첫 문장에서부터, ‘현인(賢人)을 있는 그대로 어질다고 여기는 마음을 여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하라.’고 한 데에는 공자의 평생의 경험치가 오롯이 담긴 당대의 문제점이 드러나있음을 놓치지 말고 읽으라고 풀이해 주는 것이다.
이 장에서 구체적으로 당대 사회가 왜 좀 먹어가는가에 대해서 구체적인 진술이 단 한 줄도 없어 보이지만, 첫 문장의 네 글자를 통해 그 모든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현인(賢人)을 현인으로 대접할 줄 모르고 그저 질투하고 시기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대해 일침을 가하며 그것이야말로 세상을 좀먹고 사회를 썩어 들어가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임을 공자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었고,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 자하(子夏)는 그 핵심을 문장의 가장 첫머리에 두어 강조하고 문장의 마무리를 ‘(그 마음가짐이 갖춰지고 실천되기만 한다면) 비록 배우지 못했다고 말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웠다고 이르겠다.’는 다소 파격적인 선언(?)으로 대신한 것이다.
이것은 반대로 말하자면, 수천수만 권의 책을 읽고 배웠다며 거들먹거리는 자들이 앞서 6개의 장에서 설명했던 기본적인 마음가짐을 갖추고 실천에 옮기지 못한다는 지적과 신랄한 비판에 다름 아니다. 제대로 된 배움의 과정을 거쳤다면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 상대방에 대한 진정한 마음가짐과 실천의 자세가 정작 글깨나 읽었다고 거들먹거리는 자들에 의해 반대로 행해짐을 비판한 것이고, 그러한 그들의 행태가 바로 세상을 좀먹는 심각한 원인이 되었음을 이 장을 공부하는 이들이 뜨끔하도록 보이지 않는 부비트랩(?)을 잔뜩 깔아 둔 것이다.
누군가 잘못된 상황이나 상대에게 이른바 ‘바른 소리’를 할 경우, 그것을 튀기 위한 짓을 하는 것이라며 관종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이나 사회적 분위기를 보곤 한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는 정말로 관종이고자 하는 의도적 이상한 행동을 하는 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런 괴이하고 비정상적인 상황을 제외한 정말로 잘못된 것을 잘못이라고 목소리 내는 경우마저도, ‘모두가 잠자코 있는데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나대는 거냐?’라던가 ‘다른 사람들은 너보다 못나서 그냥 잠자코 있는 줄 아는 거냐?’라는 식으로 오히려 힐난하며 그를 왕따로 만들지 못해 안달하는 무리들이 분명히 있다.
그 이유가 매우 다양할 것 같지만, 의외로 그들이 그런 행태를 보이는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다. 불편하고 싫은 것이다. 그가 바른 소리를 하는 것 자체가 양심을 후벼 파기 때문에 싫고, 그의 말이 다른 사람의 양심에 경종을 울려 상황이 개선된다면 자신이 추구하던 이익을 챙길 수 없을까 봐 두려워 싫고, 무엇보다 그렇게 잘못된 것이 바로잡히는 일의 대상에 자신이 속해있다는 것이 들킬까 봐 싫은 것이다.
공자는 자신의 시대에 자신의 이상을 관철하기 위해 수많은 위정자들을 찾아 나섰고, 그때마다 그 권력자의 곁에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겠다며 자신을 비난하고 공격하고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 힘을 얻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안간힘을 기울이는 자들을 목도하며 한탄했다. 자신이 힘을 얻지 못하고 등용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한탄한 것이 아니라 그들 때문에 사회가 그리고 조금이라도 바른 소리를 내고자 하는 현인(賢人)들이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한탄스럽기 때문이었다.
어제 위 링크글에서 언급했던, 한전의 비리에 대해 칼을 뽑아 든 공익소송의 첫 공판이 있어 참석하였다. 마침 재판이 한참 오후로 잡혀 있어, 그 법원에 판사로 일하는 제자가 있음을 확인하고는, 수년만에 만나 겸사겸사 함께 식사하는 자리를 가졌다. 세상을 올바른 것으로 바꾸는데 일선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해 주는 일을 하는 제자에게 나는 결국 또 꼰대의 잔소리를 늘어놓고야 말았다.
소장을 접수하고 함께 소매를 걷어 젖히며 칼을 뽑았던 경상도의 열혈 변호사는 거리상 너무 멀기도 했지만, 요즘 진행하는 자신의 지역 공익 소송만으로도 힘겨워하고 있어 이미 접수된 소장과 내용만으로 내가 마무리를 하기로 했었다. 정작 한전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로펌에 방어를 위해 지불한 금액만으로도 이 소송을 하지 않아도 되었었다.
법조인의 시각이긴 했지만, 한전 본사에서 송주법 관련하여 민원을 받고 자신이 송주법 담당 책임자라며 전화를 걸어 민원인에게 버젓이 ‘서류로 써드릴 수는 없지만, 해당 배상금을 3년 뒤에 소급적용해서 일괄지급하겠다.’라고 약속한 사항을 처음엔 그런 말이 없다고 우기다가, 통화 녹취가 증거로 제출되자, 그 직원의 개인 일탈이자 그 개인이 한전을 대표할 수 없다는 궤변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판사 제자 역시 자신이 얼굴이 뜨겁다며 제대로 대꾸하지도 못했다. 한전을 대리하는 변호사 측에서야 법리적으로 그런 주장이라도 해야 밥값을 한다고 하겠지만, 한전에 민원을 제기한 민원인에게 본사의 담당 책임자라고 전화를 한 자가 한 약속에 대해, 법적인 서류가 없으니 법적으로 그가 한전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은 그야말로 궤변이고 구차한 변명일 뿐임을 법조인들도 모르는 바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사건 당시 한전의 감사실장은 국회와 산자부 감사까지 청구한 내게 이렇게 사정했더랬다.
“교수님. 저희가 잘못한 거 다 인정합니다. 그런데, 저희가 구멍가게가 아니라 배상하려면 근거가 필요한데 지금 근거가 없습니다. 그러니 소송을 제기해 주시면 그것을 근거로 배상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저를 그만 꾸짖고 그냥 소송을 제기해 주세요.”
그런데, 정말로 이 사안을 보다 못한 브런치의 열혈 변호사가 경상도에서 소장을 작성해서 소를 제기하자, 그들은 보상비용에 준하는 금액보다 더 큰 금액으로 로펌을 고용하고 버티기에 나섰다. 담당 변호사는 한전 법무팀에서 일했던 자다. 그들만의 돈잔치는 지금 한전이 전기요금을 인상해서 충당되어 왔던 악순환을 반복할 뿐이다. 누가 한전을 저런 괴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