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려주마. - 31
지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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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에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 G20 서울정상회의가 성황리에 치러지고 그 마무리였던 폐막식자리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폐막 연설을 한 직후 한국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자 한국인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하지만 외국인들에게는 너무도 어색하기 그지없는, 쎄한 정적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민주주의의 센터에서 정치 9단까지 오른 오바마는 특유의 유머까지 발휘하며 자신의 잘못이라며 이렇게 다시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합니다.
“한국어로 질문하면 아마도 통역이 필요할 겁니다. 사실 통역이 꼭 필요할 겁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질문하셔도 됩니다.”
참 굴욕적이긴 하지만, 이 말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한국 기자들이 유창한 영어로 질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그것이 진정 질문하지 않는 원인이라면 그들의 창피함을 없애주고자 배려까지 보인 것이죠. 그래도 쎄한 분위기의 정적이 깨지지 않을 것 같다가 홀연히 어느 남자가 일어서서 오바마의 표정을 풀어줍니다. 그런데 그의 답변은 오바마를 더욱 실망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실망시켜 드려 죄송하지만 저는 중국 기자입니다. 제가 아시아를 대표해서 질문을 던져도 될까요?”
그러자 오바마는 정색한 얼굴로 그의 질문을 막습니다. 그리고 말하죠.
“하지만 공정하게 말해서 저는 한국 기자에게 질문을 요청했어요. 그래서 제 생각에는…”
그의 의도를 파악한, 고집 센 루이청강이라는 이름의 중국 기자는 결코 물러서지 않고 이미 죽어있는 한국 기자들을 두 번 죽이는 멘트를 날립니다.
“저는 아시아를 대표해서 한국 기자들에게 제가 대신 질문해도 되는지 물어보면 어떨까요?”
이렇게까지 한국 기자들의 부관참시(剖棺斬屍) 성 확인사살까지 던지자 오바마 역시 더 이상 그를 제지하지 못하고 당시 주최국이자 가장 많은 기자단이 앉아 있던 한국기자단을 보며 채근하듯 묻습니다.
이 딱한 상황은 유튜브에 공개되어 이른바 ‘한국인의 개망신 인증’이라는 댓글이 설명하듯이,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인의 가면 속 모습이라며 전 세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언론인이라고 하는 이들, 이른바 기레기들의 수준이 수준인지라 뭐 딱히 변호해 줄 마음도 없지만, 그것이 한국인 전반의 특성이라고 지적하는 세계인들의 손가락질에도 딱히 뭐라 변명할 구석은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과 특성은, 외국인, 특히 질문과 토론, 소통을 통해서 더 많은 것을 배워나갈 수 있다고 익힌 서양인들에게는 이상하기 그지없는 한국인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이유 중에 하나임에 틀림없습니다.
평생 가르치는 것이 직업이었던 제 입장에서 보자면, 한국인들이 수업이나 강연이 끝나고 질문이 없는 이유를 분석하자면, 정확하게 왜 질문이 안 나오는지에 대한 경우의 수를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경우의 수가 왜 필요한지 뭐 그렇게 핑계 댈 것이 많냐고 의아해할 분들이 있으실 텐데요. 그럼 구체적으로 한 번 살펴보죠.
첫째, 강의 내용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는 이들인 경우에는 관심이 없어 강의도 끌려온 소처럼 들었는데 거기에 질문을 던질 리가 없겠지요.
둘째, 맨 앞에 앉아 강의의 내용을 모두 필기해 가면서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노트하고 몰입한 학생의 경우 오히려 정보의 흐름과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지 못해 허우적대느라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셋째, 강의 자체가 너무 어려워 뭐가 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면 질문조차 던질 수 없게 됩니다. 뭘 모르는지 모르는데 뭘 묻겠습니까?
넷째, 강의가 너무 유치하고 수준이 낮아서 뭘 묻고 자시고 할 것이 없는 수준인 경우에도 질문을 할 수 없을 수 있습니다.
다섯째, 여기서부터가 오늘의 주제와 유관한 내용들인데요. 내가 질문을 하는 것만으로 다른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 것에 부담을 느낀 나머지 눈치를 슬금슬금 보게 되는 거죠.
여섯째, 질문의 내용과 상관없이 내가 질문을 하는 것만으로 바로 강의실에서 튀어나갈 생각에 가방을 움켜쥐고 있는 다른 학우들에게 공공의 적이 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것이죠. 교실에서 수업이 끝나고 도시락을 까먹으려고 도시락을 막 꺼내려고 하는데 질문을 던져 나가려던 선생님을 잡는 친구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상황이 발생할까 두려워하는 거죠.
일곱째, 분명히 강의를 들으면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묻고 싶은데, 그것을 묻는 순간, 그것을 모두 이해한 학우들로부터 ‘그것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질문을 하는 거냐?’하는 핀잔 섞인 눈초리를 감당하게 될까 싶어 자신의 의문을 끄집어내지도 못하는 경우입니다.
마지막 여덟 번째는 총체적인 상황에 대한 것인데, 이제까지 질문을 해본 적이 없었고 질문을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아닌데, 마치 다른 나라나 외계에서 온 사람처럼 그런 일은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하는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 더 세부적으로 나누면 더 많은 경우의 수가 있겠지만 대략적으로 이 여덟 가지만으로도, 개인적인 이유부터 한국의 사회에서 왜 질문하는 것이 그렇게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지, 그리고 왜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이 한국인의 특성이 되었는지를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는 단서는 마련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서양에서는 자연스럽게 질문하고 토론하고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자신의 의견과 다를 경우 설득하는 등의 활동 자체가 아카데믹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설사 그것이 아주 엉뚱하고 수업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인다고 할지라도 말이죠.
2010년 오바마에게는 아주 당연한 일이었지만 한국과는 확연히 달랐던 점은 사실 한 가지 더 있었습니다. 당시 단상에 올라서 폐막 연설을 하는 것에서부터 질의응답을 하는 데 있어 어떤 장관이나 보좌관도 그를 서포트하기 위해 줄줄이 단상에 오르는 짓을 하지 않았다는 거죠. 당일 기자들에게 어떤 민감한 이슈의 질문이 나오더라도 자신이 처리할 수 있다는 당연한 자신감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한국에서 대통령이 결코 감히 할 수 없는 행동 중 하나죠. 참고로 하나 덧붙이자면, 당시 폐막연설에서 오바마가 강조한 내용은 이란의 핵문제에 대한 제재 가능성을 강조하는데 방점을 두었고, 경제회복에 대한 화두를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은 유치원에서부터 정식 교육이 시작된다고 하는 초등학교에 가서도 질문을 했다고 칭찬받지 못합니다. 대신 선생님의 질문에 대해 대답을 잘하면 똑똑한 아이라고 인정받고 칭찬을 받지요. 오히려 선생님을 당혹시킬만한 질문이나 선생님이 준비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뭔가 묻는다는 것은 해서는 안될 행동으로 질시를 받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한국의 가정에서는 학교를 다녀온 어린아이들에게 늘 이렇게 묻습니다.
“오늘은 뭘 배웠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어쩌면 그것이 당연한 질문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탈무드>로 유명한 유대인들은 어린 자녀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이렇게 묻는다고 합니다.
“오늘은 선생님에 뭘 질문했니?”
어색하신가요? 그 어색함이 아직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꽤 긴 시간 동안 대한민국에서 한국인 학문파트의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는 이유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이미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오바마의 기자회견장에서 한국 기자들은 질문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수준이 낮은 탓도 분명히 있겠지만, 그렇게 그들을 키운 부모와 사회의 책임이 절반이상은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질문하는데 왜 용기까지 필요하냐고 묻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수 있는 용기보다 훨씬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점을 한국인과 한국사회는 아직까지 배우지 못한 것이 아닐까요?
한국인들이 왜 그렇게 질문을 하지 않는지에 대한 문제는 단순히 이 하나의 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앞서 분석했던 후반부의 이유들처럼) 그들이 왜 그렇게 다른 이들의 시선을 신경 쓰고 의식하는가에 대한 부분으로 확장되면서 그야말로 한국인만의 특성으로 도드라지게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차근차근 분석해 나가기로 하겠습니다.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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