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려주마. - 32
지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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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을 이야기하면서 술이야기는 빠질 수 없는 소재 중의 하나입니다. 워낙 술자리 문화가 발달(?)해 있다 보니 이른바 주도(酒道)라고 하는 술자리 예절에서부터 시작해서, 회식자리의 명당 찾기, 심지어 술을 마시면서 하는 다양한 건배사의 발달(?)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에게 있어 술자리는 그 자체가 음식문화와는 별개의 아주 심도 있는 사회문화를 모두 경험하게 되는 복합공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술자리의 문화중에서도 외국인들이 가장 이해하기 어렵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형태가 하나 있죠. 바로 술잔을 돌리는 문화입니다. 자신이 마시던 술잔을 비우고 바로 상대에게 그 잔을 내밀어 잔을 돌려서 마시는 형태가 바로 그것인데요. 굳이 다른 사람이 마시던 잔을 마시라고 내미는 위생적인 문제도 문제지만, 친한 친구들 뿐만 아니라 처음 술자리를 갖게 되는 비즈니스 관계에서마저도 스스럼없이 소주를 비우고 바로 그 잔을 받으라고 내미는 모습은 그들에게 있어 그야말로 문화충격일 수밖에 없습니다.
외국인들 입장에서 보면 술잔이 없어서 한 잔을 가지고 여러 사람이 마셔야 하기 때문에 잔을 돌리는 것도 아니거니와 자신이 마시던 일회용 커피종이잔을 내밀어 마시라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동의하던 한국인들이 왜 술을 마실 때만 그 잔을 돌려가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 잔에 마시라고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죠.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잔을 돌리고 그 잔에 술을 받아 마시면서도 단 한 번도 그것에 대한 유래나 이유에 대해서는 궁금해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역사적인 유래에서 그 연원을 설명하는 견해를 먼저 설명하면, 한국에는 고유한 술자리 문화중에서도 바가지 모양의 큰 대접 같은 그릇대포(大匏, 커다란 술잔)에 술을 가득 부어 상하 구별 없이 술잔을 돌려가면서 일심동체임을 다지는 일종의 의식처럼 진행되아ᅠ갔다고 합니다. 그것을 자연스럽게 마시기 위해 원형으로 둘러앉아 술자리를 갖게 되었고, 그렇게 되면 수건 돌리기처럼 어느 한 사람 열외 없이 그 자리에 참석한 이들이라면 반드시 마셔야 하는 일종의 파도타기(?) 같은 형태의 풍속이었다고 전합니다.
기록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삼국시대부터 잔을 돌려서 마시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경주 포석정에 가면 구불구불 굴곡진 물길을 만들어 놓고 그 위를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술잔이 자기 앞에 와 멈추면 시를 읊는 풍류를 누렸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자기 앞의 잔을 받아서 마시고 다시 새로운 잔에 술을 채워 보냈을까요? 자연스럽게 그다음이라면 잔을 바꾸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것이 합리적인 추정입니다.
조선시대에도 철마다 술을 마시는 모임들이 있었다고 전하는데요. 특히 기록에 의하면 관리들의 술자리 모임이 각 관청마다 비공식적이지만 공식적으로 자주 열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컨대, 복사꽃이 필 땐 교서관 주관의 홍도연(紅桃宴), 장미가 피는 초여름엔 예문관의 장미연(薔薇宴), 여름에는 성균관에서 취하는 벽송연(碧松宴) 등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모임의 이름이 그리 지어진 이유는, 그 술자리에서 사용한 술잔의 이름으로, 홍도배(紅桃杯), 장미배(薔薇杯), 벽송배(碧松杯)라 커다란 잔의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 이 역사적 근거를 더욱 확고하게 뒷받침해 줍니다.
특히, 금주령이 내려졌을 때 그들을 단속해야 할 사헌부의 술모임에서 사용했던 ‘아란배(鵝卵杯)’라는 잔의 의미는, 아이러니하게도 ‘거위알 술잔’이란 뜻으로 금주령을 어기는 일에 대해 경계하자는 뜻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 모임에 모인 이들이 술잔을 기울이면서 했던 것은 당연히(?) 파도타기 식의 술 마시기였다고 하는데요. 굳이 각자의 잔을 들고 마셨겠으나 술을 권하거나 벌주를 마실 때는 그것을 돌려서 마시는 술문화가 다시 발동되는 구조였다고 전합니다.
민간의 혼례에서도 ‘합근례(合巹禮)’라 하여 표주박 술잔에 술을 따라 신랑과 신부가 입을 맞대고 마시는 절차가 있어 잔을 돌리는 풍습이 새로울 것이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제사에서도 조상님과 함께 한다는 의미로 참석자가 돌아가며 같은 잔의 술을 나눠마시는 음복(飮福) 풍습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관료들에게만 있었던 술문화가 아니었던가 봅니다. 한국어에서 ‘수작을 피우다’, ‘수작을 걸다’, ‘개수작하다’등의 말로, 아무도 제대로 된 뜻을 알지 못하지만 일반화되어 버린 용어 ‘수작’이 있는데요. 이 수작이란 말이 바로 한국의 음주행태를 고스란히 증거 하는 단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본래의 의미는, 술상에서 주인이 손님에게 권하는 것을 ‘수(酬)’라 하고, 손님이 주인에게 권하는 것을 ‘작(酌)’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뜻이 조금 전이확장되면서, 손님에게서 받은 잔을 되돌려 권하는 것을 ‘수(酬)’라 하고, 술을 붓거나 스스로 따라서 마시는 것을 ‘작(酌)’이라 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파고 들어가서 설명하자면 ‘수작(酬酌)’의 의미는 세 가지 뜻으로 해석됩니다. 첫 번째 의미를 살펴보면, 술을 권할 ‘수(酬)’라는 글자의 본래 의미는 ‘잔을 돌리다’는 뜻으로 주인이 손님한테서 받은 술잔을 다시 손님한테 권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술 따를 잔 ‘작(酌)’이라는 글자는, ‘잔질 하다’는 뜻으로 손님이 주인에게 술잔을 주는 행위를 포함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수작(酬酌)’의 본래 뜻은 ‘술잔을 서로 주고받다’이다. ‘두 사람이 수작하다.’의 용례가 바로 이 의미가 제대로(?) 사용된 의미입니다.
이후 수작이라는 의미가 술자리에서 서로 간에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확장되어, 두 번째 의미인 ‘서로 말을 주고받다.’라는 뜻으로 전이된 것입니다. ‘수작을 건네다.’의 용례가 바로 이 두 번째의 의미에 해당하는데, 서로 술잔을 주고받으며 정다운 얘기가 오간다는 데서 생겨난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 의미는, ‘남의 말이나 행동, 계획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는 의미입니다. ‘허튼수작하지 마라.’의 용례가 바로 이 세 번째 의미에 해당하는데, 술잔을 주고받으며 얘기가 오가다 보면 간혹 술기운에 언행이 불손해져 남에게 무례를 범하기 쉬웠기 때문에 세 번째 의미로 확장 전이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술잔 돌리기는 통일신라시대에 여러 사람이 놀면서, 신라 화랑들은 공생공사의 의지를 다지기 위해, 목숨을 거는 맹약의 증표로서, 조선시대에는 관공서에서 일심동체를 다지기 위해, 혼례에서 화합을 위해, 제사에서 조상님과 함께 하기 위해 행해졌습니다.
이러한 한국인의 풍습은, 현대에 오면서 술잔 돌리기가 비위생적인 것을 알면서도, 상당수가 끈끈한 인간관계를 위해 술잔 돌리기 문화를 감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끈끈한 인간관계는 한국인의 의식 속에 중요한 덕목으로 오랫동안 폭넓게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대의 비즈니스 술자리 못지않게, 두레나 품앗이등의 단기간 내에 대규모의 노동력을 집약적으로 필요로 하는 농경 관행을 생각해 보면 마을 내에서의 인간관계는 단순히 사회적 능력뿐만이 아닌 생존과 무관하지 않은, 아주 중요한 덕목이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나’가 아닌 ‘우리’가 익숙한 것은 ‘내 잔’이 아니라 ‘우리 잔’이고, 밥을 같이먹는 '식구'를 넘어 잔을 함께 나눈 사람이야말로, ‘우리’의 울타리 안에 들어올 수 있다는 심리적 통과의례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찌개문화에서 하나의 커다란 찌개 안에 여러 사람들이 숟가락을 넣어서 먹는 음식문화와 연관 지어 생각하면 좀 더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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