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려주마. - 39
지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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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연애를 배워서요, 실전에 적용도 안되고 응용은 더 안돼요.”
웃픈 이야기지만 주변에서 제법 듣는 이야기입니다. 문맥상 그 의미를 조금 자세히 살펴보자면, 책을 연애로 배웠다는 말의 의미는 책으로 배워서는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을 책으로 배웠다는 것을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연애는 직접 하는 것이지 책으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사용하는 말인데요. 외국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국인들은 연애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책으로 배우는 것 같다는 말을 많이 듣는 편입니다.
책을 안 읽기로 유명한 한국인들이 갑자기 독서붐이라도 일었다는 새로운 견해일까요? 그럴 리가 없죠. 외국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인들은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것을 배우고 익히는 데 있어 실질적인 경험보다는 먼저 책을 통해 그 지식을 확인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예컨대, 영어도 그렇지만 제2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세계에 나온 한국인들이 나오기 전에 반드시 입을 떼는 것은 책을 통해서 회화공부를 하거나 학원을 다니지 않고서 그 나라의 말을 입에서 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발상의 프로세스 자체가 이해가 안 간다는 거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역시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와닿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 외국어를 책으로 공부하지 뭘로 어떻게 공부한다는 거지? 뭔 헛소리를 하는 거야?’라고 말이죠. 그런데, 외국인들은 따로 학원을 다니거나 대학의 랭귀지 코스를 밟지 않더라도 그 나라에 일 때문이거나 여행을 왔을 때 친구들에게 몇 마디를 듣거나 그들이 많이 사용하는 말을 들으면서 외국어를 익히기도 합니다. 요리를 배우기 위해 요리책을 펼치거나 요리교실을 가는 것보다 그 요리를 잘하는 사람의 모습을 등 뒤에서 보고 옆에서 도와주면서 레시피를 익히는 것이 오히려 정상적이라고 여기는 거죠. 그도 그럴 것이 언어도 요리도 실제로 자신이 사용해서 몸에 익히지 않으면 자신의 것이 되지 않는 분야의 지식인데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것은 그들에게 이상한 생각이 아닙니다.
오늘 분석하려는 한국인의 특성은 모든 것을 책에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억지스러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국인들의 특성 중에서도 직접 경험하고 익히는 것, 그리고 지식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지식을 위한 지식을 배우는 성향들에 대해서 분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도장에 꾸준히 다니고 단을 따더라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담배를 물고 있는 험악하게 생긴 교복의 소년들이 아가씨에게 용돈 달라고 시비를 걸고 있을 때 눈을 질끈 감고 길을 돌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 왜일까? 하는 문제가 바로 오늘의 주제, 되시겠습니다.
앞에서 먼저 다루었던 한국인들의 영어 공부도 그 대표적인 사례인데요. 한국인들은 그렇게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면서 정작 네이티브 스피커들과 제대로 된 소통을 하지 못하는 어이없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이나 중국의 대학에서 랭귀지 코스를 밟고 있는 외국인들과 한국인들의 패턴을 살펴보면, 그와 같은 성향은 보다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서구에서 온 외국 학생들의 경우, 한국의 학생들과 어울리거나 자신들의 발음이 틀리거나 문법이 틀리는 것과는 상관없이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계속해서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이 배운 외국어로 말해보려고 노력합니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의 외국어 실력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스스로를 평가하기까지 합니다. 동양인들, 특히 한국인의 경우, 성적으로 보면 반에서 항상 1,2위를 다투지만 밖에 나가 그 나라 말로 이야기하거나 간단한 회화를 통해 현지인들과 소통하는 것에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로 두려워하며 자신의 외국어가 일정 수준에 오르지 못했다고 혹독하게 자신의 레벨을 낮게 평가하곤 합니다.
겸손이 몸에 익은 예의 바른 민족이기 때문에 그렇다구요? 그런 점이 없지 않긴 하겠지만, 좀 더 실질적인 예로 들어가게 되면 한국인들의 특성은 훨씬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기술을 배울 때도 한국인들은 그것을 책으로 배우는 것에 익숙합니다. 학교를 다닐 때 남자들에게는 <기술> 과목이 그러하였고, 여성들에게는 <가정> 과목이 그러하였습니다. <기술>에서 배운 기술들만으로도 남자들은 어지간한 목공에서부터 집안 구석구석의 문제점을 고치는 일에 돈을 줘가며 인부를 부를 일은 없어야만 합니다. 여성들이 배운 바느질 실력만으로도 간단하게 바지기장을 줄이고 이름표를 오바로크(너무도 자연스럽게 현실에서 쓰이는 식민지 영어죠)를 돈 주고 맡길 일은 없어야 합니다. 상차림에서부터 요리는 또 어떤가요? 그런데 현실이 그렇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외국인들 입장에서 보자면, 잠깐 기초를 배우기만 했어도, 자기가 그 분야에 조예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 문화의 기준에서는 한국인들이 무언가를 배우는 방식에서부터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최근 유튜브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사회학과 샘 리처드 교수의 수업 영상에서 한국인과 미국인을 비교하는 비교사회학의 수업에서 그러한 점들은 여과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곤 합니다. 물론 주로 인용되는 영상들은 한국인들의 우수성을 역으로 보여주는 것 같은 국뽕 경향이 좀 강하긴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해당 수업에 참석한 한국인들을 통해 한국인들만의 특성이 되려 도드라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외국에 나가 외국인들의 방식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한국인들의 능력이 한국 사회에 갇혀 있을 때는 발휘하지 못했던 부분 그 이상으로 훨씬 더 현실에 빨리 적응하고 현실적인 공부를 통해 적용하는 능력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그런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한국 사회의 분위기에 눌려서 무언의 룰에 따르게 된다는 의미인 것이죠.
그것은, 한국의 교육이 배운 것을 현실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최종 목적을 두지 않고 시험 성적으로 등급을 매기는 것에만 혈안이 탓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자신이 배운 것을 현실에 활용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하지 않는 묘한(?) 분위기에도 있다 할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 사람을 통해서 직접 묻고 익히는 도제방식의 자유로운 토론식 학습이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습니다.
전에 설명한 바와 같이, 한국인들은 무언가를 배우기 시작한 즈음부터, 스승에게 무언가를 묻는 것이 예의가 없는 것 같은 이상하기 그지없는 분위기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스승이 물어보거나 시험 보는 내용에 대해 답을 잘하는 아이가 칭찬받고 인정받는 분위기는 어느 사이엔가 무언가를 질문하거나 자신이 새로운 생각을 내놓고 그것에 대해 스승과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통로 자체를 막아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한 이상한 분위기는 궁금증과 호기심이 가득해 터져 오르기 시작하는 아이들이 부모에게 무언가를 묻기 시작하는 그즈음부터 사기를 꺾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게 뭐야?’ ‘그건 왜 그런 거야?’라는 질문을 들은 부모는 자신이 어렸을 때 배운 대로 아이에게 대하게 됩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몰라도 돼.’, ‘선생님한테 물어봐.’, ‘그런 건 엄마한테 물어봐.’ 등등으로 대답하거나 학교에 가서 선생님에게 뭔가 물어도. ‘그런 건 시험에 안 나와. 시험에 나오는 거나 잘해.’부터 ‘너는 왜 쓸데없이 그런 걸 물어봐? 시키는 공부나 잘해.’등등으로 면박을 주기 일쑤지요.
그래서 인터넷이 나오면서 아이들은 초등학생이 90%인 지식인에게 묻고, 이제는 유튜브로 확대되어 유튜브가 지식을 찾는 사전으로 변질되어 버리게 된 것입니다. 부모들은 뭐가 다른가요? 그렇게 어른이 된 중년들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공부할 생각없이 자신들이 자주 보는 유튜브에서 떠들어대는 근거없는 화면에서 의문을 해결했다고 착각하곤 하는 것입니다.
한국인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낮춰 말하는 것이 익숙하고 서양인들이 자신이 가진 것을 훨씬 더 크고 자부심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어느 것이 우등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그런 성향과 특징을 만든 것이 잘못된 교육방식이나 사회분위기라면 다시 한번 한국인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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