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분하지 않은, 신기하리만큼 적당히 무미건조한 수화기 저쪽 너머의 그의 목소리가 전화를 끊은 한참 뒤에도 내 머리를 울리기 시작해서 그 목소리의 울림이 도저히 다른 취재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거슬려졌을 때 나는 이대로는 수치스러워 숨을 쉬기조차 어렵겠다고 판단했다.
내가 그 어렵다는 언론고시라고 일컬어지는 공중파의 방송 기자직을 따내고 이 일을 시작한 이래, 기레기라는 말을 들은 것이 물론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늘 들은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내 기사의 댓글이나 무작정 정치적인 이유로 나에 대해 비난을 하려는 이들에게 간혹 들어봤던 말이었기에 그다지 민감하지 않아도 될만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다. 나에게 그렇게 폭탄을 던진 이가 서울대 출신의 교수 이유에서 오는 같잖은 자존심이나 자격지심 때문은 분명히 아니었다. 7년 차에 접어드는 가장 정력적으로 취재를 해내갈 내 연차에서 오는 뻔한 번아웃 따위와 오버랩된 것도 아니었다. 그와의 통화가 끝나고서도 한참이 지났음에도 느껴지는 멍함에, 술을 마셔보기도 하고 다른 취재에 미친 듯이 빠져보려고도 했지만 그의 아무런 감정이 섞여있지 않은 그 짧은 한 마디는 내가 저 안쪽으로 보이지 않게 포장하고 몇 겹으로 보호막을 쳐서 어떤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안배해두었던, 이제는 어디에 두었을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그 ‘저널리스트로서의 양심’이라는 것이었다.
사건의 시작은 여느 다른 취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표현했지만 그런 취재 형태 자체가 일반적이라고 기억하는 나의 행태는, 지금에서야 돌아보면 어느 사이엔가 나를 기레기라는 옷으로 차곡차곡 갈아입혀가고 있다는 것은, 이번 일이 터지고 나서야 통렬히 자각하게 되었다.
2019년 6월 즈음에 이한국 열사 기념사업회에서 데스크를 통해 연락이 왔다면서 이미 기사를 따로 작성할 필요도 없이 보도자료를 다 작성해서 보냈으니 그대로 기사로 내보내 달라는 전화가 온 것이었다. 처음 그들의 의도는 방송뉴스로 내보내 달라는 것이었으나 이메일로 받은 자료를 살펴보니 이미 보도자료 수준이 아니라 기사처럼 만들어 보내온 것이 그대로 인터넷판에 올리면 딱인 그런 형태의 뉴스였다.
지금은 나처럼 기레기였던 자들이 올린 인터넷판 뉴스가 제법 있었으나 정말 허접한 인터넷 뉴스 한두 개만을 남기고서는 모두 삭제되어버린 그 뉴스는, 지금도 검색해보면서 나의 할퀴어진 생채기를 다시 쓸어보는 듯한 느낌으로 내가 받았던, 그렇게 받아쓰기 기사를 냈던 보도자료의 형태, 고스란히 남아 있다.
‘대만 특파원이 찍은 '이한국 장례식' 현장 사진 32년 만에 공개’
내 기사를 비롯해서 다른 기사들도 역시 그랬지만 이 허접한 인터넷 매체의 기자들은 보도자료의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게 기념회에서 받은 그대로 기사랍시고 버젓이 올려놓고 있었다. 예상컨대 나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했던 대학교수의 연락을 피하면서 받지 않았거나 연락을 받고서도 기사를 작성하는 대가로 받은 용돈의 가치가 자기 양심보다 더 컸을 가능성, 두 가지 정도를 예상할 수 있었다.
머리기사 밑으로 ‘주영희 대만 정치대 교수, 당시 사진 기념사업회에 보내’라는 서브타이틀까지 그들이 만들어 보내준 보도자료의 내용이 충실하게 고스란히 담긴 그 기사의 전문은 보도자료에서 받은 그대로 지극히 짧았다.
1987년 6월 반 독재정권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고 쓰러진 고 이한국 열사의 장례식 현장 또 다른 사진이 국내에 처음 공개됐다.
이 한국 기념사업회는 주영희(朱零熙) 대만 정치대 한국어과 교수가 이 열사가 숨진 1987년 7월 5일부터 장례식이 열린 9일까지 현장을 촬영한 사진 약 300장을 CD에 담아 기념사업회에 보냈다고 14일 밝혔다. 이 사진들은 주 교수가 당시 서울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촬영한 것이다.
사업회 측은 “주 교수의 사진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장례식 전후 시위, 운구 행렬 모습 등이 담겨 있어 의미가 크다”라고 전했다.
기사라고는 꼴랑 이것이 전부이고, 기사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당시 우리 언론에서 찍었던 것보다는 가치가 있다고 기념회에서 역설한, 바로 그 1987년 당시의 사진과 설명이 달려 있었다. 조금 눈에 거슬리는 특이점이라면, 사진마다 ‘대만국립대 주영희 교수 제공’이라는 설명이 사진 아래 박혀 있었다는 점이다.
지금 이 인터넷 매체의 기레기들이 내리지 않은 기사를 보면, 내가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레벨이었다는 낙인을 환기시키며 그 낙인이 박힌 왼쪽 심장근처 어딘가가 울렁거리면서 내가 왜 그때 이 이상한 부분들을 확인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이를 앙 다물게 된다.
보도자료와 사진이 기사로 올리기 좋게 이메일로 온 것과 동시에 기념사업회 측에서 연락이 왔다. 공중파에 방송뉴스로 다뤄진다는 것은 그들 사업회에 있어서는 상당한 홍보가 되는 것이었기에 굳이 데스크를 타고 이런 요청이 왔을 것이라는 예상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다른 기사를 작성하느라 신촌에 들르는 길에 기념사업회에 들렀다.
서강대 근처의 기념사업회에서 만난 사업회장이라는 사람은, 1987년의 민주화를 다룬 영화가 개봉을 하고 천만까지는 아니었지만 700만이 넘는 히트를 친 지 몇 년 지나지 않았던 것도 그렇고 이한국 역을 맡았던 강동원이라는 비중 있는 카메오를 통한 홍보효과를 제법 누린 경험이 있었던 것을 자랑처럼 떠벌렸다. 당시 내 입장에서는 크로스 체크할 뭔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그들이 뭔가 더 넣고 싶은 기사문을 받아쓰러 간 것도 아니었을 텐데, 왜 굳이 그곳에 가서 그들과 어색한 웃음을 섞었는지도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들과 전화통화를 나누는 정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수준에서 슬쩍 들러서 무슨 이야기를 듣겠다고 했던 것인지 그것도 기억에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나는 기사의 작성을 위해 그들을 만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기사를 올리고 나서 항의 메일과 직접 전화를 걸어온 그 대학교수에게, 차마 쪽팔려서 거짓말을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