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은 그저 빈 공간이 아니다.

감정의 극대화는 여백에서 이루어진다.

by 발검무적
子曰: "「關雎」, 樂而不淫, 哀而不傷."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관저」는 즐거우면서도 지나치지 않고, 슬프면서도 和를 해치지 않는다."

「關雎(관저)」는『시경·주남(周南)』의 첫 번째 작품이다. <시경>의 첫 편이니, <시경> 전체를 지칭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關雎(관저)」의 내용을 살펴보면, '후비(后妃)의 덕이 마땅히 군자에 짝할만하니 구하여 얻지 못하면 자나 깨나 생각하며 몸을 뒤척거리는 근심이 없을 수 없고, 구하여 얻으면 금슬과 종고의 악기로 즐거워함이 마땅하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래서 주자는 이 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淫은 즐거움이 지나쳐 그 바름을 잃는 것이요, 傷은 슬픔이 지나쳐 화를 해치는 것이다. 「關雎(관저)」는 그 근심이 깊으나 화를 해치지 않았고, 그 즐거움이 비록 성대하나 그 바름을 잃지 않았다. 그러므로 부자께서 칭찬하시기를 이와 같이 하셨으니, 배우는 자들이 그 말을 음미해보고 그 音을 살펴서 성정의 바름을 인식할 수 있게 하고자 하신 것이다."


'過猶不及;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가르침은 공자의 중용을 강조하는 기본적인 가치관 중의 하나로 유명하다. 그러나 굳이 선후와 정도를 따지자면, 부족함은 채울 수 있지만 지나침은 덜어낼 수 없게 되니 지나침에 대해 조금 더 경계한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그 근거로 나는 이 장의 내용을 든다.

가장 관객에게 슬픔을 느끼게 하는 영화를 생각해보자.

주인공이 눈물이 범벅이 되어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꺼이꺼이 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스크린 샷은 결코 관객에게 극한의 슬픔을 선사해 주지 못한다. 슬픔을 불러일으키되, 슬픔이 주인공의 몫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연출을 하거나 시나리오를 쓰는 이들의 기본원칙 중에서도 기본이다.


장례식장을 갔을 때, 고인의 죽음을 함께 추도하는 데 있어, 큰소리로 곡을 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몸이 상할 정도로 곡을 계속하거나 슬픔이 지나쳐 혼절하는 이들이 속출하게 되면 그것은 슬픔이나 추모의 단계를 넘어서 경악과 걱정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코미디는 다른가? 그렇지 않다.

넘어지고 부딪히는 '슬랩스틱 코미디'는 재미있고 웃음을 빵빵 터트린다. '스탠딩 코미디'에서 의미심장한 농담을 던지는 것은 그와 다른 의미에서 사람들을 빵빵 터트린다. 사람들의 불편한 구석을 건드리는 '블랙 코미디'는 의미심장하게 사람들의 빈틈을 후벼 판다.

최고의 코미디를 구사하는 코미디언이나 배우는 절대 자신이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웃기기 위해 자신이 먼저 웃음이 터져버리는 것은 NG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는 사람의 감정을 극대화하는 것에 어떤 장치와 안배가 필요한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나는 그것을 '감정의 여백'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도화지에 그림이 꽉 차있으면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은 그 이상의 무언가를 심상에 그려낼 수가 없게 된다.

감정도 마찬가지로, 상대방이 먼저 본래 그 감정이 갖는 본질을 모두 쏟아내 버리면, 내가 그 감정에 동조하거나 그 감정을 느끼고 공감을 표할 여지가 없어지고 만다.

그것은 앞서 예를 들었던, 즐거움이나 슬픔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분노나 아쉬움 등의 모든 감정에 공통되게 적용된다.

감정을 표현하는 자가 주체가 아니라, 결국 받아들이는 자가 주체가 되는 상황이라면 받아들이는 이의 감정이 오롯이 그 감정에 충실할 수 있도록 여지를 주어야 한다.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도화지만을 전시하고 관객의 상상력으로 그림을 그리라고 할 수는 없다.

때문에 예술을 창작하는 이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를 어떻게 하면 가장 효과적으로 그것을 감상하는 이에게 전달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또 고민하게 된다.

예술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연습 단계의 수준조차 채우지 못하는 것이니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만에 함몰되어 지나치게 노출시키게 되면 관객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하여 거부감마저 들게 만드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술도 그러한데, 하물며 사람의 감정 그 자체는 또 얼마나 그러할 것인가?

내가 사랑한다는 감정을 아무리 강조하고 쏟아내더라도 상대방에게 내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주가 아니라 상대방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주가 된다면 표현하는 내가 주여서는 안된다. 그것을 효과적으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과 이성과 감성의 여유를 충분히 안배해야만 한다.


내가 급하다고 다른 사람이 여유로운 것을 탓할 수는 없다.

내 상황과 내 감정은 내 문제이지,

다른 이는 딱히 관심이 없다.

내가 내 상황에 대해 상대에게 공감을 충분히 얻었을 때에서야 내 상황과 감정에 공감하는 반응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기 마련이다.

이것은 선동과는 명백히 다른 차별성을 갖는다.

정치를 하는 이들은 대중의 표를 원하고 자신들을 지지하는 인기를 원한다.

그래서 정치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방송언론을 통해 얼굴을 알린 자들이 심심치 않게 정치계로 데뷔하고 인기가 식으면 토사구팽 당하는 꼴을 많이 본다.

주로 '비례대표'라는 이름으로 정계에 데뷔하는 그들을 꼬드기는 이들은 당장 인기를 원하는 정치꾼 집단이다.

영화배우, 텔런트, 아나운서, 기자 등등이 그렇게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들이 정계에 진출하여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가를 살펴보면 그 어느 한 명 정치무대에 올라 국민을 위한 제대로 된 정치를 펼쳤던가를 의심할 수밖에 성적표를 들고 토사구팽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렸다.


검사, 판사, 변호사 출신들은 그 정도가 더 심각하다.

대한민국의 정치판이 '율사의 나라'로 변질되어버린 이후, '법비'들은 자신들의 출세와 이욕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 달려왔다.

'감정의 여백'을 이야기하다가 왜 갑자기 썩어가는 정치판을 언급했는지 의아한가?

정치는 말 그대로 국민들의 감정에 호소하는 분야의 최고봉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처절한 생존의 문제가 달려있기에, 예술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국민의 감정을 어떻게 호도할 것인가를 연구할 뿐 진정성을 가지고 국민들이 판단할 수 있는 감정의 여백을 만들 생각조차 없다.

그래서 갈수록 국민들은 정치에 대한 혐오감을 갖고 무관심으로 일탈하게 된다.


그들이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이 정말 잘못되었음을 국민이 공감하게 하는 여백을 두고서 지적하는 것인지, 나와 다른 편에 있기 때문에 무조건 트집을 잡고 물고 늘어지는 것인지는 당신의 감정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정치가 대중의 감정에 호소하여 함께함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지금의 그들이 하는 행태는 정치의 본질과는 한참이나 떨어져 있다는 뜻이다.

정치가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이 그렇게 잘못해서 그리 된 것만이 아니다.

대의민주주의 정치 시스템상,

정치가 삐뚤어져나갈 때 바로잡는 것은, 정치를 하는 이가 아니라 투표권을 가진 국민이다.

당신들이 지지해주지 않으면 그들은 존속할 수 없다.


당신이 바르게 생각하고 그 여백을 채워나가지 않으면, 당신이 사는 이 사회를 결코 바르게 바로잡을 수 없다는 말을, 공자는 부러 에둘러 이렇게 아무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은미하게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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