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 잘해줄지를 걱정말고 나만 잘하면 된다.

논어판 '너나 잘하세요'는 신독(愼獨)의 현대 버전

by 발검무적
定公問: "君使臣, 臣事君, 如之何?" 孔子對曰: "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
정공이 "임금이 신하를 부리는 것과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묻자,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임금은 신하를 부리기를 예로써 하고, 신하는 임금을 섬기기를 충성으로써 해야 합니다."

질문을 한, 정공(定公)은 노나라의 임금이다.

주자는 주석에서 '이 두 가지는 모두 도리의 당연한 것으로서, 각각 스스로 다하고자 할 뿐이다'라고 설명한다.

주자의 해석에서 방점은 '당연한 것'에 있다.

<논어>에서 '당연히 그래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대개 당연함에서도 불구하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강조할 수밖에 없다는 반어적 표현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여씨가 다음과 같이 이 장을 해설한다.

"신하를 부림에는 (신하가) 충성하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자신의) 예가 지극하지 못함을 걱정해야 하며, 임금을 섬김에는 (임금의) 예가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자신의) 충성이 부족함을 걱정해야 한다."


주자가 많은 학자들의 해설을 정리하고 어떤 것을 대표적인 것으로 편집할까를 고민할 때, 여씨와 같이 제대로 공자가 말하려는 문맥을 파악한 사람의 글을 보면 얼마나 반가워했을까 공감하게 되는 순간이다.


이 장은, 이제까지 참람된 행위를 하던 대부를 꾸짖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강조하던 노나라의 임금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임금이 공자에게 임금과 신하가 서로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조심스레 묻는다.

대개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맞습니까?"라고 묻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장에서는 가장 위의 자리에 있다는 임금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며, 자신을 섬기는 자들은 자신에게 어떻게 해야 할 것을 묻는 조금은 위화감을 느낄 법한 구조를 취하였다.

당연히 의도가 있는 편집이다.

정공은 임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권을 쥐고 있는 세 대부의 가문에서 임금으로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 자로 팔일편에 에둘러 표현되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군신관계에 대해 공자에게 물었다는 것은, 실제로 물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려우나 최소한, 약간 부자연스러운 이런 설정을 한 것에는 큰 의미가 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게다가 그것을 공자에게 물었다는 것과 공자가 이 부분에 대해 할 말이 많아 한번 제대로 설명하려고 했는데 그 설정부터가 잘못을 하고 있는 자들이 찔려할 만한 구도를 갖춘 것이다.

위의 여씨(呂氏)가 정리한 말은 '너나 잘하세요'의 논어판이라고 할 수 있다.

군신관계는 이른바, 비즈니스적인 관계이거나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니, 자신의 위치에서 임금이나 신하나 자기가 할 '당연한' 도리를 최선을 다해서 하면 된다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그렇지 않음을 공자는 넌지시 찌른 것이고, 여씨는 그 행간을 제대로 읽어낸 것이다.


임금이 나를 예로써 대하면 나도 충성하고, 그렇지 않으면 나도 적당히 충성의 정도를 조절하고.

이런 방식이 인간이 사특한 이유였고, 지금도 그 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의 본능때문이라도 무시할만한 것이 아니다.

나에게 아첨하고 충성하는 것처럼 구는 신하에게는 예의를 갖추고, 말도 잘 안 듣는 것 같고, 자신에게 충성을 다해 뭔가 하는 것 같은 모습이 보이지 않는 신하에게는 예의고 뭐고 갖출 필요가 없다는 임금 역시 당시는 물론 지금도 적지 않음을 꼬집는다.


공자가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핵심은, 여씨의 설명처럼 '남이 나에게 어떻게 해주는지 간 보고 내 행동을 결정할 것이 아니라, 나는 나만의 정도를 걸으면 그뿐이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조금 더 나아가면, '내가 상대가 어떻게 하든 상관없이 정도를 걸으면, 상대 역시 그 모습을 보고 깨달아 제대로 행동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뿐이다.'라는 쿨한 공자식 '신독(愼獨)'을 보여준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리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당신은 여러 군상들을 만났을 것이다.

사수를 비롯해서 상사들의 면면은 정말로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공통점을 갖는다.

자신에게 아첨하는 부하를 더 아끼고, 그 아첨하는 부하와 상대적인 행동을 보이는 부하에게 마음이 덜 쓰인다. 자신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더 해준 상사에게 괜스레 충성을 바치고 싶어 지고, 맨날 차갑게 일만 던져주는 상사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게 된다.


그런데 말이다.

이게 당연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읽는 당신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가?

'사람들이 다 그러니까 나도 그렇지'라던가 '다들 그러니까 그게 당연한 거지'라고 생각하는가?

그런 썩어빠진 사고방식에 일침을 가하는 것이 평범해 보이는 이 장의 취지이다.

'다들 그러니까'라는 명분은, '그러면 안 되는 줄 알긴 아는데'의 핑계이고 변명일 뿐이다.

쟤도 그렇고 얘도 그러니까 나도 해도 된다고 누가 정했나?

결국 당신의 양심은 알고 있는데, 눈감아주려니 만들어낸 추잡한 명분일 뿐이다.

그러면 안 되는 건,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해도 안 되는 거다.

조직과 사회가 자꾸 무능력해져 가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내 밑의 사람을 뽑아 올릴 때, 능력이나 사람됨이 우선시 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내 말을 잘 듣고, 내 비리를 적당히 덮어줄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 내가 편해진다는 썩어빠진 생각이 조금씩 내가 속한 조직의 뿌리를 갉아먹고, 우리 사회를 좀 먹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 하나만의 문제에서 그칠 것이라고 착각하고 위안하고 싶은가?

아니다.

이제 당신의 그런 행동을 보고 쟤도 그렇게 하고 얘도 그렇게 하니까

그런 행동이 '일반화'가 되어버리고, '당연시'되는 것이다.


안된다, 그리 되어서는.


'내가 한 행동 하나가 어떻게 우리 조직과 사회를 무너뜨리기까지 하겠는가?'라는 안일하고 얼빠진 생각 따위일랑 제발 하지 마라.

결국 그 큰 둑은 손톱보다 가는 바늘 같은 틈에서 균열을 보이며 갈라져 무너지게 된다.

그나마 자신이 한 행동이 자랑할만하지 못한 것은 알고서 지적을 당하면 부끄러워하는 이들을 본 지도 십수 년 전의 일이지 싶다.

요즈음의 행태를 보면,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을 넘어, 당당하게 목소리를 키운다.

심지어 회식자리에서 그것이 자신의 성공 비결인 양 떠들고 지들끼리 친목을 돈돈히 다진다.

그런 이들이 지금 잠시, 잘 나가는 것 같아 보이고, 그들만의 리그로 승승장구하는 것 같아 보이고 심지어 그들을 동경하고 그 무리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철딱서니 없는 이들도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실상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그 끝은 그렇지 않다.


당신에게는 늘 선택할 권리와 기회가 주어진다.

당신이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을 때 당신의 자유의지는 힘을 갖는다.

선택의 여지조차 없을 때는 고민할 자유조차 없게 된다.

당신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선택할 여지가 없다면 구태여 살 필요가 무에 있겠는가?

선택할 수 있을 때, 올바른 것을 선택하려고 공부를 하는 것이다.

니 배만 불리겠다고 하는 공부는 공부라고 하는 게 아니다.


공부는 당신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기 위한 것이고, 그 공부는 수양을 통해 당신을 거쳐 다음 세대에 이어지기 마련이다.

당신이 당신의 위치에서 누가 보지 않더라도 당신의 할 도리를 다 한다면 다음은 당신이 어찌한다고 바뀔 것도 아니니 굳이 당신이 고민할 것도 아니다.


왜 내 행동의 기준을 다른 사람의 행동에 맞춰 가려하는가?

당신에게는 당신의 수준과 눈높이가 있다.

당신이 사람으로서 당연히 할 도리를 다하면

당신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당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조직과 사회의 변화와 업그레이드를 가져오게 된다.


그것이 공자가 가르치고 있는 진정한 정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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