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만을 따르면 원망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원망이 많이 쌓이면 당신의 수명이 줄어들 확률만 커진다.

by 발검무적
子曰: "放於利而行, 多怨."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이익에 따라서 행동하면 원망이 많다."
이익을 챙기려고 원망을 사게 되면, 그 원망이 많아져 결국 그 이유로 인해, 목숨까지 걸고 싸우게 된다.

언뜻 보면 이익을 밝히기만 하면 부작용이 심해진다는 뜻이겠거니 싶은데, 구체적으로 뜯어보고 누군가 왜 '원망이 많다'라고 하는지 물으면, 확실하게 설명할 자신이 없어지는 평범모호(?)한 문장이다.


이 부분에 대해 공안국(孔安國)의 해설을 통해 그 의미의 실마리를 찾아보도록 하자.

"多怨은 원망을 많이 취함을 이른다."


익숙하지 않은, 약간 이상한 표현이 툭하고 걸리는가?

원망을 '듣게 된다'도 아니고, '얻게 된다'도 아니며, '취한다(取)'라고 표현한다. 적확하기 그지없는 표현이다.

'듣게 된다'라 함은, 미필적 고의(나는 그러려고 한 의도가 아니었는데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를 의미하는 것이고, '얻게 된다'라 함은, 비자발적 행위를 의미한다.

'취한다.'라 함은 자발적 행위의 결과이고, 자업자득의 당연한 귀결을 꼬집는, 매우 적확한 표현이라 하겠다.

원망을 스스로 취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게 뭐 좋은 것이라고?

그래서 정자(伊川)는 친절하게 그 인과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친절하게 해설해준다.

"자기에게 이롭고자 하면 반드시 남에게 해를 끼친다.
그러므로 원망이 많은 것이다."

원인은 단 하나.

자기에게'만' 이롭게 하려 들면 '반드시' 남에게 해를 끼치게 되기 때문에 원망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에게도 이로우면서 남에게도 이롭고 모두에게 이로운 것은 드물다, 아니, 솔직히 거의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내게 이롭다는 개념 자체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최초의 인류이거나 최후의 인류라면, 즉, 내 옆에 비교대상이 없다면, 내가 나뭇잎파리로 중요한 부분만 가리고 다니던 혹여 그나마도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던, 명품 옷을 입은 사람 때문에 자괴감이나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어진다.


이익은 내가 아무것도 없다가 무언가를 얻게 되는 것도 이익이지만, 인류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인간사회라는 것을 형성하게 되면서 이상하게 변질되고 말았다.

내 옆에 있는 사람보다 내가 하나 더 있으면 그것이 이익이고, 행복이 된다.


반대로, 전에는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행복했던 상황이, 내 옆에 있는 이가 10개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는 순간, 내가 가졌던 행복은 와르르 무너져버리고 어느 사이엔가 질투와 질시, 자괴감, 열등감 등이 스멀거리며 올라오게 되어버린다.


세계를 정복했던, 혹은 정복하고자 했던 이들에게 땅이 부족했을까?

그들은 다른 종족, 다른 나라의 땅을 쳐들어가 언어도 다른 이들을 정복하고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는 행위를 통해서 정말로 쾌감을 느꼈을까?

도대체 왜 그런 일이 생기는지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서는 위에 설명한 바와 같이 '이익'을 무엇이라 정의하는가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으로 회귀해야만 한다.

위에서 말한 행복과 이익은 또 조금 다른 개념을 갖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놈의 이익이 뭐란 말인가?

남보다 조금 더 갖는 것? 절대적인 부와 명예?


이 장에서는 그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대신하여 그것만 추구하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공자가 이 장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는, 바로 이익만을 추구하는 행위에 대한 소인배들의 사고방식을 어마어마하게 살벌한 협박형 경고로 갈음한 것에 다름 아니다.

원망을 많이 사게 되면, 밤길에 안전을 도모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명이 짧아질 수도 있을 거라는 나지막한 목소리의 말이, 협박과 크게 다른 점이 뭐 있단 말인가?


이번에도 구체적인 지향점에 해당되는 뒷 절은 다시 생략되어, 보이는 자의 눈에만 보이게 써두었다.

이익이 아닌, 인에 따라, 덕에 따라, 의에 따라 행동하면 그럴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선순위를 이익에 둔 자들이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것까지는 설명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이 정도 설명하면 그 끔찍하고 살벌한 설명은 필요 없다. 보여주는 슬래셔 무비보다 보이지 않는 심리공포 스릴러 영화가 더 무서운 것과 같은 이치이다.

개인의 이익인 사익에 배치되는 의미로, 우리는 '공익'이라는 단어를 쓴다.

'공익'은 우리 모두의 이익이라는 의미이다.

정말 그런가?

최근, 뉴스를 통해 공공연히 보아왔던 것처럼 '공익'이라는 미명 하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는 않지만, 결국 반대파를 숙청하거나 상대방에게 불이익이 가도록 공격하는 행위로 사용되는 것을 많이 접하곤 한다.


예컨대, 한 체인점에서 일하던 알바가 공익제보자라는 형태로 그 체인점에서 오래된 재료들을 유통기한을 바꿔가며 소비자들에게 판매하는 행위를 고발한다고 등장하는 경우를 본다.


또, 자신이 모시던 지방유지에게 여의도 배지하나 달게 하려고 분골쇄신했던 인물이, 그 지방유지가 여의도에 입성하고 나서 이익을 나눠가지는 시기가 되어서는, 그가 선거과정에서 심각한 선거법 위반을 저질렀다면서 공익제보를 하겠다고, 자신이 함께 처벌받는 행위도 감수하겠다며 과감히 고발하는 헤프닝을 보게 된다.


이게 과연 공익일까?

나는 그것이 공익인지, 그리고 그들이 공익제보자인지 잘 알지 못하겠다.


실상은 다를 수 있겠으나, 한번 유추해보자.

체인점의 알바가 점장에게 후한 대접을 받으며 함께 이익을 공유할 때는 문제가 안되던 사안이, 그 알바가 약속받았던 리더의 자리로 승진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소한 것으로 구박받으며 인상되기로 했던 시급이 고정되어버리면 그 점장은 알바의 원망을 사게 된다. 그리고 그 원망이 많아져 쌓이게 되면 파국이 벌어진다.


여의도에 입성시키기만 하면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을 거라며 시골 촌구석에서 분골쇄신하며 뛰었는데, 법적으로 정해진 별정직 공무원에 해당하는 보좌관 자리, 딸랑 2개 중 한 자리는 당연히 내 차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딱 2명이 아니라서 문제가 터진다. 심지어 정작 백수인 아들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선거 뒷돈을 두둑하게 댄 졸부 아버지는, 자식의 안정된 별정직 공무원 자리를 위해 그 돈을 '투자'했다는 사실도 나중에 논공행상을 할 때 튀어나오게 된다.

전쟁에 패배해도 비참해지지만, 막상 전쟁에 이겨도 공을 따지고 그 공에 맞게 누구에게 상을 줄 것인가 하는 논공의 일은, 언제나 그렇지만 '토사구팽'이라는 잔혹한 고사성어를 늘 달고 따라 나오기 마련이다.


저마다 공이 있다고 동상이몽을 꾸던 자들이, 나 말고 다른 놈이, 내가 받아야 할 상이라는 것을 받게 되면, 소위 '꼭지가 돌아버리기' 마련이다.

그러면 내가 형사처벌을 받는 한이 있어도 논개정신으로, 나에게 모욕감을 선사한 그에게 빅엿을 먹여야만 한다는 원망이 쌓여, 고발이라는 형태로 분출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마치 수천 년 전의 공자가 지금의 대한민국 저자 한복판에서 그들의 마음속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말할 수 있는 근거이고 증거이다.

가상의 예라고 우리가 주변에서 너무도 흔히 접할 수 있는 두 가지 사례를 들어 말했을 뿐이긴 하지만, 당신에게 이것이 익숙하게 들리고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은 당신 역시 그 사례의 당사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맛있는 것을 주는 사람에게 행복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것은 아이의 당연한 본능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그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아이의 행동을 자세히 관찰해보라.

커다란 장난감 선물을 주면,

아이는 행복한 얼굴로 받아 든다.

그런데 갑자기 또 커다란 장난감 하나를 더 주면, 이제 난감해 하기 시작한다.

이미 받아버린 커다란 장난감을 드는데 두 손을 다 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 들고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번째 선물을 받기 위해 첫 번째 받은 선물을 옆에 놓는다.

거기서 끝나도 몸이 간질거리기 시작하며 불안한데, 세 번째 큰 선물을 다시 아이에게 주면,

이제 아이는 두 번째 선물을 내려놓고 세 번째 선물을 받으며 울먹이기 시작한다.


이걸 다 받아갈 수 없겠는데...

어쩌지?


아이마저도 이러하다.

그런데 그것을 모두 챙겨가시겠다며 층층이 쌓아 능력도 안되면서 들어 올리려다가 모두 쏟아져, 말 그대로 깨빡쳐버리고 마는 것이 당신이고,

당신의 인생이란 말이다.


왜 당신이 자꾸 다른 사람에게 원망을 사고 그것으로 인해 일이 그르쳐진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의 성공을 질시하는 그 누군가 때문에?

아니다.

결국 당신의 일을 망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아니다.

바로 당신이다.


망진자(亡秦者)는 호야(胡也) 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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