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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ug 26. 2021

1062억 말아먹고 남은 500만 원 들고 도박장으로.

그렇게 항공물류의 아버지가 되어 '1:10:100의 법칙'을 외치다.

1944년 미시시피 주 마크스에서 토들 하우스(Toddle House) 레스토랑 체인 설립자이자 스미스 모터 코치사(Smith Motor Coach Company)의 설립자인 제임스 프레드릭 "프레드" 스미스의 아들로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 그가 불과 4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태어나자마자 관절이 변형되는 병에 걸려 목발을 짚고 걸어 다녀야 했지만, 10살 건강을 완전히 회복한다.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농구, 축구 등 다양한 체육 활동을 하며 자신감을 길렀다고 한다.

이미 10대 때 아마추어 비행기 조종사 자격증을 따서 농업용 비행기를 운전했다고 한다.


1962년 예일대에 입학한 그는, 트랜지스터 등 작은 크기에도 높은 부가가치를 가진 상품이 출현하는 것을 보고 비행기를 활용한 항공 물류가 크게 성장할 것임을 직감했다. 트럭, 기차 등보다 훨씬 빠른 비행기에 고부가가치 상품을 꽉꽉 실어서 물건을 배달하면 고객이 불과 며칠 만에 물건을 전달받을 수 있게 될 거라 예상했다. 이를 통해 몇 주에서 몇 달이 걸리는 기존의 물류 산업 전반을 바꿀 혁신을 상상했다.


1965년 경제학 강의에서, 그의 상상이 현실화되는 과정의 첫걸음을 떼게 된다.

자전거 바퀴에서 착안한 새로운 화물수송 시스템에 대한 내용을 토대로, 학기말 보고서를 제출하게 된 것이다.

이 레포트의 내용은 미국 내 인구밀집지역에 화물 집결지인 허브(hub)를 만들어서 모든 화물을 여기에 집결시켜 재분류한 후, 자전거 바큇살(spoke) 모양으로 미국 전역에 배송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운송업계의 관행이던 두 지점 간의 최단거리 수송 방식을 완전히 뒤집는 발상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교수의 평가는 지독한 혹평이었다.

그의 아이디어가 기존 상식에 많이 벗어나 있다고 생각했던 담당교수는 "미국 북동부에 있는 볼티모어에서 그리 멀지 않은 수도 워싱턴으로 물품을 보낼 경우에도 중부에 있는 허브를 경유해야 한다는 것이 현실성이 없다"라며, "C학점 이상을 받으려면 아이디어가 실행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아이디어와 열정을 증명하기로 결심했다. 이후 그는 대학 졸업을 하고 베트남 전쟁에서 돌아온 뒤 자신의 구상을 실천에 옮겼다. 에머리 항공 화물과 미국 우편 서비스 회사인 유나이티드 파슬 서비스(UPS) 등 강력한 경쟁자들이 있는 미국 화물 운송 시장에 뛰어든 것이다.

1971년 그의 나이 27살 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과 벤처사업과로부터의 융자 및 자기 돈 400만 달러를 투입해 '페더럴 익스프레스(줄여서 '페덱스;FedEx')'라는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가 엄청난 부를 가져다준다”는 캐치프레이즈를 외치며 화물 집결지 방식과 익일 배송 서비스 신화를 만들어 낸 , 하루에 310만 개 이상의 화물을 전 세계 215개국에 운송하는 세계 최대의 특급 운송 기업 페덱스(FedEx) 최고경영자이자 회장인 프레드릭 스미스(Frederick Wallace Smith)의 이야기이다.


영화 탐 행크스의 <캐스트 어웨이>를 보면, 쏟아지는 태양 아래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벌판 그 한가운데로 페덱스 차량이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간다. 이윽고 택배차는 목적지에 도착해 감사의 메시지를 남긴다.

“이 우편물 덕분에 무인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예일대 경제학과에 진학한 스미스 회장은 두 명의 조금은 특별한 친구를 사귀게 된다.

한 명은 흔히, '아들 부시'라고 불리는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 둘은 프레드릭 카바 엡실론 사교클럽에서 만나 금세 친해졌다. 다른 한 명은 존 캐리 전 미국 국무부 장관이다. 둘은 비행기 조종이라는 공통된 취미를 가지고 있었고, 이것이 공통 연결고리가 되어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1966년 학교를 졸업한 스미스 회장은 미국 해병대에 징집되어 베트남 전쟁에 참가해야 했다. 그는 여기서 비행기 뒷좌석을 담당하는 파일럿으로 4년간이나 복무하게 된다. 당시 스미스 회장의 조종 파트너이자 전우는 다름 아닌, 그의 친구였던 존 캐리였다.

10대 때부터 자동차보다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에 재미를 들린 스미스 회장의 인생은, 비행기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비행기와 인연이 깊다. 이러한 인연은 자연스레 비행기를 활용한 항공 물류 회사를 설립하는 운명으로 그를 이끌게 된다.


제대 후 스미스 회장은 27살의 나이로 '페덱스'를 설립할 당시 상황은 이랬다.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400만 달러(44억 원)와 투자자들로부터 받은 9100만 달러(1017억 원)를 바탕으로 8대의 비행기를 구입해, 미국 내 여러 도시로 화물을 배송하는 항공 물류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기준으로는 9500만 달러(1062억 원), 현재 기준으로는 5억 5000만 달러(6149억 원)에 이르는 막대한 자본금으로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자본금의 대부분은 화물 배송용 비행기와 자동차를 구매하는데 모두 투자되었다.

처음에는 아칸소주 리틀락시의 리틀락 내셔널 공항을 허브로 삼고 야심 차게 사업을 진행한다. 하지만, 자신의 연고지도 아닌 지역이라 지원이 부족하다고 느껴, 자신의 고향인 멤피스시로 베이스캠프를 바꾼다. 멤피스시의 작은 공항이었던 멤피스 국제공항을 허브로 삼고 미국 내 35개 도시에 화물을 배송하는 사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게 된 것이다.


페덱스의 핵심 사업은 비행기를 활용한 익일 배송이다. 조금 비싸지만 책임지고 다음 날까지 물건을 전달해주겠다는 것이 핵심 모토였다. 하지만 사업은 그의 기대만큼 쉽게 풀리지 않았다. 제대로 된 홍보가 부족했던 탓에, 고객들은 굳이 그 비싼 돈을 내고 특급 배송을 이용하려 들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1973년 일어난 1차 오일쇼크였다. 오일쇼크에 따른 기름값 급상승(약 3~4배)으로 회사는 제대로 된 수익을 낼 수 없게 되었다. 회사 설립 후 2년 동안 1340만 달러(149억 원)에 이르는 막대한 부채가 생겨났고, 때문에 회사는 파산할 지경에 이르고 만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 스미스 회장은 이곳저곳에 투자를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간신히 운영되던 회사의 자금은 결국 5000달러(559만 원) 밖에 남지 않아 벼량 끝까지 몰리게 된다. 파일럿들에게 지급할 임금은 고사하고, 당장 비행기에 넣을 기름을 살 돈마저 없었다.


천억이 넘던 자본금에서 당장 수중에 500여만 원밖에 없던 스미스 회장은 도박을 감행한다.

말 그대로 도박을 하기 위해 라스베이거스로 날아간 것이다.

투자를 위한 마지막 미팅이 실패로 끝나버리고 좌절한 그는, 본사로 돌아가는 멤피스행 비행기 대신 라스베이거스행 비행기를 탔다. 환락의 도시 라스베이거스에서 500여만 원의 판돈으로 도박(블랙잭)에 뛰어들었고 이를 6배인 2만 7000달러(3018만 원)로 불리는 데 성공한다. 결국 그는 그 돈을 가지고 돌아와 직원들의 밀린 봉급을 주고 비행기에 넣을 기름을 샀다. 그리고 다시 투자자를 물색하는 통 큰(?) 기질을 보였다.


도박으로 직원들의 월급을 챙겨준 그는 과감한 모험을 감행하기로 한다. 자동차 등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처분해 회사 운영에 투입했고, 가족들 명의로 돈을 빌리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1975년 스미스 회장은 두 여동생과 금전적인 소송까지 휘말리는 이중고를 겪게 된다.

뼈를 깎는 인고의 시간들이었다고 그는 회상한다.

그 어려운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스미스 회장과 페덱스는 '반드시 다음 날 배달한다'는 기업의 핵심 비즈니스 가치를 고수했다. 회사가 아무리 어려워도 고객과의 약속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철칙 때문이었다.

인내 끝에 다시 햇빛이 찾아왔다.

그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시티뱅크, 뱅크 오브 아메리카 등 20~30개 투자사로부터 7000만 달러(782억 원)에 이르는 투자를 유치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당시 미국 벤처들이 받은 투자 가운데 최고 액수였다. 이 투자금을 가지고 그는 다시 배달용 비행기와 자동차를 사고 배송지를 늘리는 공격적인 경영을 밀어붙였다.

결국 1975년 하반기부터 흑자가 나기 시작했고, 1976년에는 360만 달러(40억 원)의 순이익을 기록하는 데 성공했다. 취급하는 화물의 양도 하루 평균 1만 9000개로 크게 늘어났다.

그 모든 일이 불과 1년여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1977년 미국 항공법의 변경으로 모든 항공 물류 회사는 운항지에 대한 제한이 없어졌다. 페덱스의 프레드릭 스미스 회장은 이 기회를 움켜쥐었다. 기존의 작은 비행기 대신 대형 항공기인 보잉 727 10기를 구매해 배송량을 크게 확대했다. 1978년에는 뉴욕 증권거래소(NYSE)에 회사를 상장했다. 1980년에는 미국 내 90개 도시로 서비스 지역을 확대했고, 1981년에는 캐나다로의 국제 배송도 시작했다. 이와 함께 기존 멤피스 국제공항의 허브를 국제 배송까지 처리할 수 있는 '슈퍼 허브'로 개편했다. 이를 통해 미국의 한적한 지방 공항이었던 멤피스 국제공항은 미국 최대 규모의 물류공항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1983년에는 인수 합병 없이 10년 만에 10억 달러(1조 1185억 원)의 매출을 달성한 미국 최초의 기업으로 등극했다.


무역의 장벽이 없어진 글로벌 시대를 맞아 페덱스는 거침없이 성장했다.

해외의 항공 물류 업체를 지속적으로 인수해 서비스 지역을 전 세계로 확대했다. 1984년에는 컴퓨터 기반 자동 선적 시스템, 1986년에는 물품 추적을 위한 휴대용 바코드 스캐너, 1994년에는 온라인 기반 물품 배송상태 확인 서비스 등 혁신적인 물류 기술을 잇따라 선보였다.

이후 페덱스는 약 670대의 비행기와 17군데에 이르는 허브를 보유한 전 세계 최대 규모의 물류 사업자로 성장했다. 항공 물류뿐만 아니라 차량을 활용한 지상 물류, 사무용 제품 배달 등 다양한 관련 사업으로 확장하여 진행하고 있다.


스미스 회장은 한때 이러한 성과를 인정받아 정치권의 부름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결코 쓸데없는 정치 따위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정치권과는 꾸준히 거리를 두고 회사 경영에만 집중했다.

그가 다른 경영인인들과 달리 지금까지 존경받고 기업을 키운 데에는 몇 가지 원칙들이 작용했다.

그중에 가장 큰 것은, 사람중심의 경영을 원칙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매니저는 후임보다 더 일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그 후임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잘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람이다.

 

스미스 회장의 원칙은 직원과 고객 모두에게 적용되었다. 그래서 그는, "직원을 제대로 보살피면 직원들이 알아서 고객이 원하는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고객이 회사의 미래를 책임질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다"라며 강조했다.

말뿐이 아님을 그는 인사에서 증명했다. 페덱스의 지상 물류를 담당하는 페덱스 그라운드의 데이비드 레브 홀츠 전 최고경영자는, 1976년 밀워키 지점에 차를 닦고 물건을 나르는 계약직으로 입사해 최고경영자까지 임명되는 산 증인이 되었다.

당신이 금수저라서 천억이 넘는 돈으로 사업을 시작했다고 가정하자.

다 말아먹고 파산위기에 몰려 고작 수중에 있는 현금이라고는 500여만 원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

실제로 날아간 자본금은 지금의 환산가치로 6000억 원정도에 해당한다.

나는 지근거리에서, 재산이 천억이었다가 절반이 날아갔다고 자살한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물론 그에게도 여러 말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겠지만, 500억은 고사하고 생전에 5억도 못 만져보고 세상을 뜨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훨씬 더 많다. 하지만 그는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그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스미스 회장은 그릇의 크기가 다른 행보를 보여주었다.

단순히 그가 미치기 직전이어서 도박을 했다면 더 큰돈을 벌 때까지, 혹은 그 돈을 다 날리게 될 때까지 도박장의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직원들의 밀린 월급과 비행기에 기름을 넣을 돈까지만 벌고 자리에서 일어나 회사로 돌아왔다.

그렇게 돌아와 도박장에서 벌어온 돈이라며 말하는 그가 자신의 자동차, 비행기 등을 모두 매각해 회사의 빚을 갚는데 다 썼고, 다시 회사를 박차고 나가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투자자를 만나고 다니는 모습에, 직원들은 자신의 손목시계를 팔아 기름을 사서 배송을 했고, 법원 집행관들이 비행기를 압류하려 하자 이를 감추기도 했다. 80만 건의 배송 물량이 발생하자 수 천명의 직원이 자율적으로 한밤중에 회사로 모여 밤샘 작업에 매달리기도 했다.

그가 보인 진정성 있는 모습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스미스 회장이 주창한 '1:10:100'이라는 법칙이 있다.

"불량을 고치는 것에는 1의 노력이 들지만,
문책 등이 두려워 이를 숨기면 10의 노력이 필요하게 되며,
이 문제가 고객에게 들어가면 100의 노력이 필요하게 된다."


그가 금수저였다고, 돈이 그렇게 많으면 나도 사업 빵빵 터지게 성공할 수 있다고 같잖은 소리 하는 이들에게 묻는다.

당신은 당신만의 아이디어를 구상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날들을 밤잠 못 자가면서 고민해봤는가?

그들의 부가 시작된 시작점에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그것을 만들기까지 피땀을 흘렸던 그 누군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부를 이어받고서도 다 말아먹는 놈이 있다면 오히려 더 큰 부를 일으켜 선대보다 더 나은 후대로 존중받는 이가 있다.

잊었을까 봐서 하는 노파심에 다시 말하지만,

스미스 회장은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4년이나 복무하였다.


할아버지에게 물려받고, 아버지에게 물려받아 태어나면서부터 재벌 소리를 듣는 우리나라의 대기업 문화를 보면서, 그리고 그 자식의 자식들이 마약범죄니 음주운전이니 하는 것으로 뉴스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서 늘 드는 생각이 있다.


'너희 할아버지가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벌어 치부한 것이 니들 그따위 뻘짓이나 하라고 했던 고생은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분명한 것은, 당신이 금수저든 흙수저든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가진 것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니 그 출발점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그것을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것에 연연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물론, 시대가 거듭될수록 개천에서 용 나기가 불가능해진다는 말들도 많다.

틀린 말도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삶이 그냥 오그라들거나 당신이 패배하고 실패하는 것이 당신의 부모가 당신에게 금수저를 물려주지 않았기 때문은 분명히 아니다.


그건 얘기가 다른 거다.

당신이 금수저가 아니라서 더 쉽게 성공하지 못하지 않냐고 징징거릴 수는 있지만, 실패는 다르다.

당신의 실패는 오롯이 당신의 책임이지 그것이 결코 당신의 부모나 환경의 탓일 수는 없다.

게다가 실패는 그만한 노력을 쏟아부었던 이만이 입에 담을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을 입에 담을 수 있는 이들은 그것이 엔딩이 아니라 과정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아직 그것이 과정인지조차 구분을 못하는 수준이라면,

같잖게 실패니 좌절이니 하는 말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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