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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Sep 14. 2021

대학을 나오지 못하면 신문기자가 될 수 없다고?

나는 신문기자로 끝낼 인생이 아니란 말이다.

1909년, 호적상으로는 키타큐슈의 고쿠라라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잡역부 등 막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리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집안을 부양하기 위해 소학교만 마친 채 곧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든다. 작은 전기회사의 급사로 일을 시작하였지만, 정작 그가 꿈꾸었던 직업은 신문기자였다.


그래서 궁핍한 환경에서도 열심히 책을 읽었다. 그러나 대학을 나온 사람이 아니면 절대 신문기자가 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꿈은 좌절되었다. 이후 인쇄소의 석판공으로 기술을 배우던 중, 불온 잡지를 구입한 혐의를 받아 빨갱이로 몰려서 연행되는 사건이 터진다. 열흘에 걸쳐 고문을 받고서야 구류 처리가 되었는데, 이 수감 체험은 19세 청년이었던 그에게 잔혹한 기억으로 남게 된다. 이를 계기로 부친은 그에게 책을 읽지 못하게 금지시켰고, 그가 어렵게 모은 책들은 모두 불태워져 버린다.

1936년 27세 때 결혼할 무렵, 아사히신문사 규슈 지사가 고쿠라로 이전되어 오자, 지사장에게 용감하게 편지를 써 신문기자로 채용된다. 그 뒤로 20년 동안 이 신문사를 다니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꿈꾸던 신문기자가 되니 그곳에는 지저분한 학력주의가 버티고 있었다. 대졸 정사원들에 비해 월급날도 하루 늦었고 회사의 행사에도 초대받지 못하는 등 심한 학력차별에 시달리며 사회의 학력차별과 불평등을 온몸으로 험하곤 좌절했다고 한다.

 

1944년 35세 때, 평소 교련에 잘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징집되어 한국 전라도까지 파병되어 위생병으로 근무하였으나 일본의 패망과 동시에 귀국하였다.

귀국한 후 신문사로 복귀하였으나, 일본의 극심한 인플레로 인해 월급만으로 생계유지가 힘들어지자, 빗자루 중개상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녔다. 이때 여러 지방의 고적을 돌아보면서, 여행과 고대사 연구를 향한 강한 욕구를 조금씩 갖게 된다. 신문사의 일이 정상화되면서, 그는 다시 현상금이 걸린 포스터를 그리는 일로 아르바이트를 바꾼다. 원래부터 미술과 디자인에 감각이 있던 그는 자주 입선되어 상금을 착실히 받아냈다. 그러나 마흔이 되던 해 자식은 4명이 더 늘어, 여덟 식구를 부양해야만 됐다.


그러던 중, 생계에 도움이 될까 싶어, 근무 중에 쓴 ‘사이고사쓰’라는 작품이 <주간 아사히>의 ‘백만 인의 소설’에 응모된 총 992편의 작품 가운데 3등으로 입선하면서 1951년 42세라는 늦은 나이에 등단했다. 원래는 더 높은 등수였으나 아사히 신문사 직원이란 이유로 밀려났다고 한다. 출퇴근하면서 구상을 하고 모기장 속에서 웅크리고 앉아 한 자 한 자 원고를 써나간 그의 데뷔작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일본의 추리소설가. 단순한 추리소설가를 뛰어넘어 거장으로 추앙받는, 일본 문학의 거인이자 진정한 국민 작가이며, '사회파 추리소설'이란 새로운 장르를 창시하고 이끌어간, 사회파 추리소설의 아버지인 마츠모토 세이초(松本清張;まつもと せいちょう)의 이야기이다.

 

1957년 세이초는 <얼굴>이라는 작품집으로 ‘일본 탐정 작가 클럽상’(현 일본 추리작가협회상)을 받고, 그 이듬해 <눈의 벽>, <점과 선>을 출간하여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키며 소위 사회파 추리소설의 시대를 연다. 그리고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엄청난 양의 작품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43세에 등단하여, 82세의 일기로 생을 마치기까지 근 40년간의 작가 생활을 하는 동안 그가 발표한 작품은 약 980편(에세이 등 포함)으로, 출간한 저서만 약 750권(편저 포함)이다. 소설만 따져봐도, 장편만 약 100편을 남기고 있다.(중단편만 약 350편)

오죽했으면 당시 일본 평론가들이 유령작가설부터 집필 공장을 마련하고 책을 뽑아내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근거 없는 비판까지 해댔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싶을 정도의 정열이었다. 게다가 그는 보통의 추리소설가를 넘어 논픽션 작가이자 역사가, 그리고 고고학자들에게까지 인정받는 학자였다.

마츠모토 세이초 기념관의 책표지 모음전

데뷔를 하고 난 직후 1952년, 세이초는 <미타 문학>에 '어느 '고쿠라 일기' 전'을 발표한다. 당시 일본 문학계의 방식은 기존 대가의 추천을 받아야만 발표할 수 있는 구조였기에 그는 자신이 존경하는 작가, ‘기기 다카타로’에게 원고를 보냈고, 그의 추천으로 발표하게 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고사쿠는, 재능은 있지만 고단한 인생을 보낼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주인공으로 어찌 보면 세이초 자신의 자전적인 부분이 상당 부분 녹아들어 간 캐릭터였다. 이 소설은 곧 대중적 인기를 반영하는 나오키 상에 당당히 후보로 오르지만, 곧바로 낙선하는 이른바 ‘광탈’을 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나오키상 심사위원이었던 나가이 다츠오에 의해 "이 소설은 나오키상이 아니라 아쿠타가와상에 더 적합한 작품"이라는 평을 들으면서 급기야 아쿠다가와상 선고위원회에 넘겨지고, 전형 위원의 한 사람이었던 사카구치 안고로부터 격상을 받아 마침내 제28회 아쿠다가와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뤄낸다.

1955년, 세이초는 최초의 사회파 추리소설인 ‘잠복’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추리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일반적인 소설처럼 인간성이 드러나는 추리소설을 읽고 싶다고 평소에도 말하던 그는 그 이후로도 수많은 추리소설을 발표하였다. 1958년에 발표하여 베스트셀러가 된 추리 소설 <점과 선>, <눈의 벽>은 범죄의 동기를 중시한 ‘사회파 추리소설’로 불리며 세이초 붐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일본의 추리소설계에서는 '세이초 이전, 세이초 이후'라는 말이 표준용어처럼 사용되기 시작한다.

 

소설 집필을 위해서는 당시 사건의 산증인을 찾아내어 새로운 증언들을 확보하기도 하고,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자료들을 집요하게 찾아냈는데, 소설을 연재하던 도중 일본 우익의 거물로부터의 항의를 받아 잡혀간 자리에서도 세이초는 자신이 쓴 글에 오히려 하나하나 근거를 제시하며 조목조목 설명했고, 이에 그 거물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를 풀어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92년, 82세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도 그는 정력적인 집필 활동을 결코 늦추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죽기 3년 전인 1989년 6월 10일에 작성된 세이초 자신의 유서에는 "나는 노력만은 해왔다(自分は努力だけはして来た)"는 글이 적혀 있었다.

말년에도 취재용 카메라를 들고 다니던 세이초

 고등학교도 아니고 소학교밖에 못 나온 자가, 대졸자만이 가능했던 아사히 신문의 기자가 된다는 것이 가능한가?

43살이 되기 전까지 어떤 작가 활동도 없었던 자가 데뷔 3년도 되지 않아 일본을 대표하는 문학상을 타고, 40여 년간 정상의 자리를 단 한 번도 빼앗기지 않으면서 한 달에 한 권 이상의 책을 출간해내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정상의 소설가로서 그렇게 원고를 써 내려가면서, 제대로 대학에서 전공을 하지도 않았던 고고학까지 고고학자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의 학식을 갖추는 것이 가능할까?

그는 이 불가능한 것들을 모두 해낸 사람이었다.


유명한 소설 한 두 권이 히트하여 평생을 먹고사는 작가는 수두룩하다.

하지만 내는 소설마다 모두 히트하고 정상을 40년을 유지한 작가는 그가 유일하다.

특히, 마흔이 훌쩍 넘어 소설가로 데뷔하여 여든이 넘을 때까지 작가 활동을 지속적으로 한 작가 역시 그가 유일무이하다.

일본에서 가장 많은 작품이 영상화된 공식적인 전설.

영상화된 세이초의 작품들

당신은 당신의 아버지 세대보다 훨씬 윗 세대였기에 가능했다고 말하고 싶은가?

그저 다른 사람의 책을 필사하는 일만 하더라도

만년필에 잉크를 넣어가며 원고지를 쓰는 일도 노가다에 가깝다.

그런데 그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그는 머리로 글을 쓰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가 소학교 출신이라며 비아냥을 들어가며 모두가 다 가는 회사 행사에도 초대받지 못한 차별을 당하면서도 기자로서 버티고 버틴 그 20여 년의 경험이 그에게는 습작 활동이었다.

기자 월급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 빗자루를 전국에 팔러 다니면서도 당시 그는 각 지방의 여러 가지 정보를 그의 작가로서의 글감으로 전환시켰다.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 당신이 앞으로 하고 싶은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이초의 고단한 젊은 날을 반추해보건대

이 세상에 쓸데없는 일은 없고, 쓸데없이 낭비하는 세월은 없다.

오히려 당신이 지금 적당한 대학을 나와 적당한 회사를 다니며, 적당히 받는 월급으로 적당히 놀면서 지내는 그것이 세월을 낭비하는 것일 수는 있겠다.

세이초의 꿈을 들었던 당시 모든 세상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소학교를 나와 신문기자가 될 수 없다는 말에, 27세의 나이로 당당하게 지사장에게 자신이 왜 신문기자 되어야 하는지 자신이 신문기자가 되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어필해서 기자가 되었다.

대학을 나온 것들이 그를 무시하고 짓밟고 눈앞에서 무시하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그는 20여 년을 그 신문사에서 발품을 팔아가며 기사거리를 찾았고, 그 모든 것들은 후에 그가 어마어마한 양의 사회파 추리소설을 집필하여 양산해내는데 밑바탕이 되어 주었다.


그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억울하게 고문을 당하고 구류를 당했던 그 감정과 경험마저도 그에게 있어서는 모두 작가수업이었고, 습작의 일환이었다.

심지어 그는 전쟁에 징집되어 한국에 파병되었던 경험마저도 다양한 작품으로 구현해냈다.

그의 인생 자체가 논픽션 소설이었고 대하소설이었으며 그의 인생역정이 역사였다.

 

당신이 당신의 가방끈이 짧아서 뭘 할 수 없다고 한숨을 쉬고, 당신의 집안이 대단하지 못해서 잘 나가지 못한다고 투덜대며, 당신의 대단한(?) 재능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없어서 여태 뜨지 못했다고, 혹시 착각에 빠져 살고 있는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치열하고 처절하게 자신의 삶과 전투를 벌이며 젊은 나날을 20여 년 기자로 보내고, 작가라는 천직을 만나게 되면서 다시 발동을 걸어, 한풀이라도 하듯 마흔이 넘어 시작해서 죽기 전까지 1000여 편이나 작품을 발표한 그를 앞에 두고 감히 당신이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의 그 같잖고 가당찮은 핑곗거리를 입에서 뱉어낼 시간에, 당신도 한번 미친 듯이 달려봐야겠다는,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 깊은 곳에서 용솟음치지 않는가?

아직 잠들어 있었다면 이제 당신의 안에서 그것을 끄집어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소학교만 나온 그가 마흔이 넘어서 이룬 것을

당신이 지금 이루지 못할 어떤 이유라도 있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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