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에 스페인 레온(León) 지방의 작은 마을인 부스동고데아르바스(BusdongodeArbás)에서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13살이 되던 1949년, 철도원이었던 아버지가 갈리시아(Galicia) 지방의 라코루냐(laCoruña)의 선로 구축 현장에 동원되면서 가족 전체가 라코루냐로 옮겨오게 되었다.
그 해 그는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인해, 학교를 그만두고 라코루냐 시내에 위치한 ‘갈라(Gala)’라는 양품점에서 잔심부름꾼으로 일하게 되었다. 책임감이 강하고 고객 정신이 투철하다고 인정받은 그는, 16살이 되던 1952년에 지점 매니저로 승진했다. 그는 '갈라'에서의 경험을 통해 재고를 쌓이게 하는 것보다 고객이 원하는 것을 재빨리 제공하는 것이 의류 판매의 핵심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17살이 되던 1953년, 대규모 양품점인 '라마하(LaMaja)'로 이직한다. 당시 라마하는 여러 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의 형과 누나도 그 체인 매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라마하로 이직 후 그는 그간의 경험을 살려 매장의 품질 개선을 해냈고 그 포상으로 점장까지 승진하게 된다. 그리고 그 매장의 후임자로 만난 로살리아 메라(RosaliaMera)와 2년 뒤에 결혼했다.
승진 이후 그는 사장에게 몇 가지 사업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그중 하나가 가게 옷감을 드레스 제작자였던 자신의 형수에게 공급해 의류를 직접 제작 · 판매하자는 것이었다. 라마하의 사장도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이렇게 제작한 의류들은 고객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의류 제작을 지속적으로 맡게 되었다. 라마하 매장에서 10년 동안 근무하면서 그는 원단 공급업체와의 두터운 신뢰 관계를 형성해 이후 본인의 사업을 시작할 때 저렴한 가격으로 원단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된다.
1963년 그는 모아두었던 2,500페세타(Peseta, 스페인의 통화단위)로 라코루냐(laCoruña) 시내에 작은 상점인 ‘고아 콘벡시오네스(‘콘벡시오네스’는 스페인어로 ‘의류’라는 뜻)’를 오픈했다. '고아'라는 이름은 그의 풀네임(FullName)인 아만시오 오르테가 가오나(AmancioOrtegaGaona)의 앞글자를 거꾸로 읽은 것이다. 사업 초기 그는 당시 스페인에서 유행하던 ‘퀼티드 드레스(QuiltedDress)’를 제작해 판매했고, 드레스의 매출은 예상보다 높았다. 그는 초기 수입을 투자해 더 넓은 작업실을 얻었고, 다양한 의류를 제작해 생산 물량을 중간 상인이나 소매업체에게 납품했다.
당시 갈리시아 지방에는 봉재에 능숙한 부녀자들이 많았는데, 그는 이런 여성들로 구성된 봉제 협동조합을 설립했고, 이들은 1970년대 고아 콘벡시오네스의 주요 인력이 되었다. 1973년 10년 만에 고아 콘벡시오네스는 생산인력을 500여 명으로 늘려 생산력을 확충했고, 공급 및 유통 회사를 인수해 물류 시스템을 보강했으며 디자이너 업체와 계약을 통해 제품의 스타일을 개선시켜 나갔다.
그렇게 1975년 그는 충분한 자본을 모았다는 확신이 생기자 라코루냐 지역에 첫 번째 소매 상점을 연다. 그는 이 소매점에 ‘자라’라는 간판을 달았고, 이것이 오늘날 ‘자라’ 브랜드의 시작이었다.
2016년 9월, 미 경제지 포브스가 발표한 세계 부호 순위에서 빌 게이츠를 누르고 1위에 오른 인물. 의류 브랜드 ‘자라’(ZARA)로 유명한 스페인 업체 ‘인디텍스’ 그룹의 창업주 아만시오 오르테가(AmancioOrtega)의 이야기이다.
자라는 보통의 의류 업체가 최장 6개월에 한 번 새 제품을 내놓는 것과 달리 일주일에 두 번씩 신제품을 내놓는다. 옷을 디자인하고 만들어 전 세계 매장에 뿌리기까지는 최소 14일, 평균 20일밖에 걸리지 않는다. 모든 상품은 제조된 지 48시간 안에 매장에 진열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렇게 자라에서 생산되는 상품은 매년 4억 4,000개에 이른다.
아만시오는 회사를 가족경영 체제로 운영했다. 그는 제품 디자인을 담당했고, 그의 형이 영업을 맡았으며 그의 누나는 자산관리와 인사업무를 담당했다. 사업에 열정적이었던 아만시오는 직접 바르셀로나(Barcelona) 원단공장으로 찾아가 원하는 직물을 구해왔다. 또 트렌드 조사를 위해 패션의 본고장인 프랑스 파리(Paris)에서 열리는 오뜨 쿠뛰르(Haute-couture) 패션쇼를 직접 보러 다녔고, 이때 얻은 아이디어를 토대로, 합리적인 가격대에 맞춰 디자인한 옷을 내놓기 시작했다.
사실 아만시오는 옷가게 직원으로 일하는 내내 부유한 여성들만 잘 차려입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10대 때부터 쌓아온 경험을 토대로 획기적인 재고 관리를 통한 창고 비용 절감과 무분별한 광고 지양 등 마케팅 비용 절약으로 저렴한 물건들을 소비자에게 내놓는다. 그리고 자라만의 특색으로 내세우려던 빠르고 다양한 상품 출시를 위해선 기획과 생산, 유통까지 직접 개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오늘날 SPA(Specialty stores / retailers of Private-label Apparel; 기획부터 생산, 유통까지 한 회사가 직접 맡아서 판매하는 의류 브랜드를 흔히 가리키는 말) 시장을 개척한 선구자로 부각되기 시작한다.
갈라시아 라코루냐에 위치한 첫 번째 자라 매장
1980년대 들어 스페인 전역으로 매장을 넓히며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해 1984년 첫 물류센터를 개설했고, 1985년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기업명을, '인디텍스 그룹'으로 변경, 이후 1988년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미국, 프랑스, 멕시코, 스웨덴, 브라질 등 적극적인 해외 진출로 기업 규모를 대폭 키우게 된다. 2001년 인디텍스를 주식시장에 상장시키고 이후 온라인 스토어도 개설하는 등 경영일선에서 활동하다 2011년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철저한 매장 중심 주의자로, 매장 직원을 경험해보지 않으면 고객의 니즈를 알 수 없기에 본인도 그저 사무실을 지키고 앉아있는 회장이 아니라 매장에서 일하는 직원 중 한명일뿐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소비자가 원하는 상품을 캐치해 최적화된 공급망을 통해 최대한 빠르게 공급하는 것을 사업의 핵심 목표로 삼았다. "옷 가게는 생선 가게와 같다. 유행이 지난 옷은 어제 잡은 생선처럼 신선도가 떨어진다."는 말은 그의 패션 사업 철학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자라 뉴욕 매장
그가 '가족경영'의 형태로 기업을 경영했다고 해서, 능력도 없으면서도 자기 식구들만으로 임원을 채우는 한국적 마인드로 보면 큰 오산이다.
예컨대, 지금의 자라가 성공하게 된 기반을 갖춘 정보 및 물류 시스템을 갖추게 된 일화를 보면 그가 어떤 마인드로 가족경영의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확실한 효율성을 얻어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아만시오는 사업 규모를 확장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빠른 정보처리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그는 누나의 사위인 호세 마리아 카스테야노(JoséMariaCastellano)를 영입했다. 당시 호세 마리아 카스테야노는 아혼(Aegon, 네덜란드의 보험회사) 사의 스페인 지사에서 데이터 처리(DataProcessing) 전문 관리자로 일하고 있었다. 아만시오는 그를 외부 컨설턴트로 고용하여 자라의 정보처리 시스템을 구축하게 했고, 1984년부터는 그를 완전히 데리고 와서 전체 물류 시스템을 전산화시키는 전략을 성공시킨다.
1990년대에 들어 인디텍스 사는 전체 수익금의 78%를 브랜드 인수와 신규 브랜드 론칭을 위해 투자했다. 기업을 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기업으로 벌어들인 돈을 자신의 재부를 확장하는 것으로 돌리지 않고 다시 공격적인 사업 확장에 대부분을 투자한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인디텍스 사는 1990년에 아동복 브랜드인 ‘키디스 클래스(Kiddy’sClass)’를 인수해 자라의 하위 라인인 ‘자라 키즈(ZaraKids)’를 시작하여 소위 대박을 치게 된다.
마지막으로 화룡점정 한 가지 더.
전술했던 한국적 마인드의 가족경영체계를 하는 자들은 결코 전문경영인을 통한 기업혁신을 이루지 못한다.
그런데 일흔이 다되도록 현역에서 달릴 수 있다고 자신하며 경영에 매진하던 아만시오가 스스로 일흔이 되던 해에 전문경영인을 CEO로 영입하겠다고 공표한 것이다.
2005년 자라의 CEO로 취임한 ‘파블로 이슬라‘
2005년 CEO로 영입되어 2011년 경영권을 물려받은 현 인디텍스 최고경영자 파블로 이슬라 회장 역시 아만시오에게 간택받을만한 인물임을 스스로 입장해 보였다.
변호사 출신의 파블로 이슬라(PabloIsla)는 취임 후 바로 아시아 시장을 우선순위에 둔 확장 정책을 이어갔다. 이에 따라 자라는 2005년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시장으로 진출했고, 2006년에는 중국에 진출해 42개 중국 도시 지역에 120여 개의 매장을 오픈했으며, 같은 해 뉴델리(NewDeli)와 뭄바이(Mumbai)에 자라의 플래그쉽 스토어(FlagshipStore)를 열어 인도 시장에 진출했다. 2008년에는 롯데 쇼핑과 합작해 국내 시장에까지도 진출했다. 이후 포화한 유럽과 아시아 시장 외에 남미와 아프리카 시장에 눈을 돌려 2012년까지 불가리아, 카자흐스탄, 오스트레일리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페루, 에콰도르 등에 매장 수를 늘렸다.
2017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서 이슬라 회장은 글로벌 CEO 경영 평가 1위에 올랐다. 오프라인의 한계를 인식하고 이를 극복할 혁신 방안을 찾았던 성과를 인정받았던 것이다.
실패와 좌절을 극복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왜 그저 성공을 한 세계 최고의 부자 신화만 나열하느냐고 궁금해하는 독자가 있을까?
그렇다면 당신은 이제까지의 이 시리즈를 잘못 읽었으니 처음부터 다시 정독하기를 권한다.
돈이 없어 중학교 학업도 마치지 못하고 옷가게 심부름꾼으로 시작해서 경영혁신이란 혁신은 모두 직접 이루어낸 사람이, 디자인 공부는 고사하고, 무역과 물류 공부 따위는 해보지도 않고서 획기적인 물류시스템과 명품 브랜드들의 디자이너들마저 인정하는 디자인 능력을 갖춘 그가 실패와 좌절 없이 성공신화를 썼다고?
그의 인생은 그 자체가 당신들이 흔히 말하는 이번 생에 실패한 흙수저 중에서도 부러진 흙수저 인생이었다.
그 인생 구비구비 하나하나가 실패가 가득 쌓여 있는 더미를 넘어야 하는 도전이자 전쟁이었다.
심부름꾼에서 정직원이 되고, 직원에서 매니저가 되고, 매니저에서 점장이 되고, 그 점장에서 다시 자신의 소매 사업체를 열고, 겨우겨우 매장을 하나 열고, 글로벌 매장을 하나 열고, 그렇게 그는 성장해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나이 여든에 세계에서 가장 부자라는 공인된 인정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는 오래 입은 듯한 폴로티 하나 입고 스페인 거리를 걸어 다닌다.
그를 알아보는 이들도 거의 없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명확하게 아는 이였다.
은퇴 후, 승마가 취미라 승마장을 가지고 있어 그곳에서 여가를 즐기고, 세계 상권의 중심지에 부동산을 사들이기 시작해서 명동에까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을 정도의 부자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금 누리는 것들은 그가 직접 맨손으로 일궈낸 것들이기에 정당하게 누릴 자격이 있다고 할 것이다.
행여 돈 많은 할아버지의 첩으로 오해할까 싶은데, 아니다, 딸이다.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아만시오가 자신의 승마장에서 딸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모습.
당신이 흙수저라고 한 번이라도 부모나 환경 탓을 했었다면 당신은 일단 자신의 부족 하디 부족한 모습에 대해 반성해야 할 것이며, 무엇보다 당신을 이 세상에 건강하게 태어나게 해 준 부모님에 다시 한번 머리 숙여 석고대죄해야 할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신 것만으로도 당신의 부모님은 당신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다.
당신이 지금 햄버거 가게에서 쌍코피를 터뜨려가며 알바를 하고 있든,편의점에서 새벽에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잠들지 않으려고 버티는 힘든 삶을 하고 있든,그것은 당신의 부모님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다.
아만시오는 단 한 번도 그가 왜 그렇게 제대로 공부도 하지 못할 만큼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것이냐고 불만을 터뜨린 적이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처했던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그 일을 처리해서 더 많은 것들을 배우고 그것을 자신의 미래 꿈에 활용할 수 있을 것인가만 생각하며 달려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