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7년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결혼 전 이름은 마리아 스쿼도프스카(Maria Skłodowska)이다. 당시 폴란드는 분할 지배하에 있었는데, 바르샤바는 러시아령이었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제정 러시아의 압정(壓政)을 겪으며 자랐다. 아버지는 김나지움의 수학 및 물리학 교사였다. 10세 때 어머니를 잃고 17세 무렵부터 가정교사 등을 하면서 스스로 공부를 해나갔다.
당시 폴란드와 독일에서는 여자가 대학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파리로 유학을 결심했지만 돈이 없어 가정교사로 돈을 모아 23살이 되던, 1891년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 입학하였다. J. H. 푸앵카레, G. 리프만 등의 강의를 들었으며, 수학·물리학을 전공하였고 소르본 대학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1895년 결혼하여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였으며, 남편과 공동으로 연구 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물리학에서는 새로운 사상(事象)이 잇달아 발견된 시기였는데, 뢴트겐의 X선 발견, H. 베크렐의 우라늄 방사능 발견에 자극받아 그들 부부도 방사능 연구에 착수하였다. 먼저 베크렐의 추시부터 시작했는데 부부는 방사능의 세기를 측정하는 데에 전기적 방법(남편이 발견한 압전기의 이용)을 사용했다. 그것은 방사선의 정량적 측정법으로서 베크렐의 사진법(寫眞法)보다 편리한 것이었다. 토륨도 우라늄과 마찬가지의 방사선을 방사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방사능(放射能;radioactivity)'이라 처음 이름 지은 당사자들이 된다.
폴란드 출신, 프랑스 국적의 여성 물리학자이자 화학자.
앙리 베크렐과 함께 방사능 연구의 선구자이며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하여 노벨 물리학상을 타고, 금속 라듐을 분리하여 노벨화학상을 탄 여성 과학자 중 부동의 원탑.
우리에게는 '퀴리 부인'으로 알려진, 이제는 '마리 퀴리(Marie Curie)'라고 불러야 할 그녀의 이야기이다.
마리는 방사능이 원자 자체의 성질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여러 가지 시료(試料)에 대하여 측정하던 중 우연히 우라늄 광물 피치블렌드가 우라늄 자체보다도 강한 방사능을 방출한다는 것을 알고, 그 속에 미지(未知)의 강한 방사성 성분이 존재할 것이라고 추정, 이것의 추출을 시도하였다. 보헤미아의 요아힘스탈에서 나온 피치블렌드에서 방사되는 방사능을 바탕으로 화학 분석을 시도하여(방사화학분석법의 시초), 1898년 7월 '폴로늄'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특별히 그녀가 조국 폴란드에 대한 애정을 담아 지은 이름이다. 이어 그해 12월 그 유명한 '라듐'을 발견하게 된다.
실험 중인 퀴리 부부
이 두 원소는 방사성 원소로서 발견된 최초의 것으로, 특히 라듐은 우라늄에 비하여 훨씬 강한 방사능을 지닌다는 점에서 과학계에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이 발견은 방사성 물질에 대한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새 방사성 원소를 탐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러한 업적으로 1903년 퀴리 부부는 베크렐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그 유명세에 힘입어 피에르는 소르본 대학 이학부(理學部) 교수, 마리는 그 실험실 주임이 되었다.
1906년 남편 피에르 퀴리가 마차에 치이는 사고로 사망한 뒤에도 단독으로 방사성 물질을 계속 연구하였다. 1906년 5월에는 남편의 후임으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소르본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1907년 라듐 원자량을 더욱 정밀하게 측정해내는 것에 성공하고, 1910년에는 금속 라듐을 분리하는 데도 성공하였다. 1914년 소르본 대학에서는 그녀가 연구에 더욱 집중할 수 있도록 라듐연구소의 건립하였는데, 그녀는 이 연구소 건립에 얼마 안 되는 그녀의 모든 재산을 쏟아붓는 열정을 보인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독일군이 파리로 진격해오자 라듐을 잠시 스위스까지 옮겼다가 전쟁이 끝나고 나서 다시 가져와 연구를 지속했다.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부상병을 치료하기 위한 기금을 모집하고, X선 치료 부대를 조직하는 데 앞장섰다. 마리는 프랑스 적십자로부터 국방 방사능 부대 대장으로 임명되었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딸 이렌을 포함한 150명의 여성 X선 기술자를 양성했다. X선 부대원들은 프랑스 및 벨기에 전선에서 200개의 이동 진료소를 개설해 백만 명 이상의 부상병을 치료했다. 심지어 그녀는 1916년에 운전면허를 따서 X선 장비를 갖춘 앰뷸런스를 직접 운전하기도 했다. 종전후, 이 공로를 인정받아 분야가 달랐음에도 파리 의학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
마리 퀴리의 자녀는 두 딸이 전부였다.
1911년 라듐과 폴로늄 발견으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이후 연구소의 운영은 물리학자인 장녀 이렌에게 맡겼으며, 이렌은 마리 퀴리의 실험 조수로 있던 F. 졸리오 퀴리와 결혼한 뒤 1935년 남편과 함께 인공 방사능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마리 퀴리는 그동안의 실험으로 몸이 쇠약해져 스위스에서 요양을 하였지만 1934년 7월 4일 백혈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말년의 마리 퀴리
사후 61년 만인 1995년 4월 20일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여성으로는 사상 최초로 역대 위인들이 안장되어 있는 파리 팡테옹 신전으로 이장되었다.
벌써 눈치챈 독자들도 있겠으나 다른 이들과 달리, 굳이 그녀의 업적에 대해 연대기적으로 상세하게 열거하면서 '여성으로서의' 그녀의 삶이 갖는 특징을 녹여낸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페미니즘의 강세를 보이며 여성들의 목소리가 한껏 높아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어느 사이엔가 시대의 조류가 되어버렸다. 그녀들은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대기업의 여성 이사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 아느냐고.
사회에 드리워진 그 두꺼운 유리천장이 얼마나 여성들을 가두는지 아느냐고.
똑같은 면접을 보더라도 남성에 비해 여성이 얼마나 불리한 처분을 받는지 아느냐고.
만약 마리 퀴리가 21세기의 대한민국 페미니즘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면, 상상컨대 콧방귀도 뀌지 않고 '너희가 도대체 스스로 그 벽을 허물고 뛰어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느냐?'고 쏘아붙였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러시아 치하의 폴란드에서 마리 퀴리의 아버지가 폴란드어로 쓴 학생의 답을 정답으로 처리했다는 것 때문에 교감 자리에서 쫓겨나 평교사로 강등되었다가 결국엔 교사직을 박탈당하면서 그녀의 가족에게는 불행이 휘몰아친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모아두었던 큰돈을 사기당하면서 급격하게 가세가 기울어진다.
결국 아버지는 집을 하숙 형식으로 꾸미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부업으로 생계를 꾸렸다. 그러던 어느 날 하숙생 중 한 명이 장티푸스에 걸렸는데, 그 병이 마리 퀴리의 언니들에게 전염되었고, 둘째 언니인 브로니스와바는 다행히 회복했으나 첫째 언니 조피아가 병을 이기지 못하고 12살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또한 마리아(처녀적 이름)가 10살이 되던 해에는 결핵으로 오랜 투병생활을 하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
마리 퀴리는 공부는 대단히 잘했지만 가난한 데다가 바르샤바 대학교는 남녀공학이 아니라 남자대학이어서 여학생의 입학을 허가하는 프랑스로 유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집안이 워낙 가난했기 때문에 유학자금을 모으기 위해 부유한 집안의 가정교사로 일하며 돈을 모으다가 23세가 되어서야 겨우 프랑스로 떠날 수 있었다.
가정교사로 일하던 시절에 하마터면 학업을 포기할 뻔한 일도 있었다. 가정교사로 일하던 부잣집 아들과 사랑에 빠졌으나, 가난한 집안 여성을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남자 집안의 반대로 헤어졌다. 마침 이별을 결정했을 때 소르본 대학의 합격통지서가 도착했고 그녀는 분연히 프랑스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만약 이때 그저 부잣집 며느리로 들어갔다면 과학자 마리 퀴리의 모습은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시 남성들은, 전체 사회는, 아니, 전 세계는 여성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마리 퀴리는 그런 사회에, 세계에 스스로를 맞추지도 굽히지도 않았다.
그녀는 매번 스스로의 자신의 삶을 극복하고 어느 여성도 걸어보지 않은 길을 처음 개척했다.
차분히 살펴보면, 그녀의 삶 어느 한순간 편하고 쉬운 적이 없었다.
그렇게 하기가 쉬웠을까?
우문이다.
그녀는 여성이기 이전에 사람이었고, 한 사람의 과학자로서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냈다.
그녀의 딸이 2대에 걸쳐 노벨상을 받은 것 또한 그녀의 당찬 유전자와 교육의 성과에 다름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리고 증명이다.
지금 여권 신장 어쩌고 구호를 외치다가 무거운 짐을 어떻게 여자가 드냐고 남학생을 찾는 철없는 여대생들을 보면, 나는 늘 반사적으로 마리 퀴리를 떠올리게 된다.
전쟁통에는 남자 운전병도 오금이 저려 제대로 핸들을 못 잡는다.
운전을 배워본 적도 없는 그녀는, 50이 넘어가는 나이에, 자신이 전쟁통에 앰뷸런스를 운전하겠다고 운전면허를 취득하고 보통 차도 아닌 앰뷸런스의 운전대를 잡았다.
라듐 발견에 대한 독점권을 특허로 인정받으면 그녀는 물론이고 몇 대가 풍족하게 재벌처럼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똑똑한 그녀나 그녀의 딸이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그녀와 그녀의 딸은 독점권을 거부했다.
라듐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세계의 것이므로 한 개인의 이익으로 취할 권리가 없다.
그녀는 이 한 마디가,
그녀의 당당했던 삶을 오롯이 증명한다.
그녀는 유일하게 폴란드와 프랑스, 두 나라의 지폐에 얼굴을 올린 최초의 위인이다.
최초의 여자가 아닌, '위인'이란 말이다.
그녀가 위인이라서 존경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삶이 존경받을만한 것이기에 위인이라 부르는 것이다.
당신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아왔거나 지금 차별받는다고 생각하는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대학을 갈 수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사회가 남성 위주라서 불공평하고 부당하다고 생각하는가?
엄청난 과학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에 거부되는 사회를 상상해보라.
그 시대의 풍파를 모두 헤치고 자신의 삶을 여성으로서의 삶이 아닌,
한 사람의 당당한 과학자로서 일군 그녀의 삶을 보고서도, 당신은 남녀불평등이 어쩌고 하는 입을 놀릴 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