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

당신은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by 발검무적
子曰: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의에 깨닫고, 소인은 이익에 깨닫는다."

​또 개념어가 등장한다.

지난번에 공부했던 ‘義’.

다시 말하지만, 단순하게 ‘정의’로 해석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道義’에 아까운 개념이라고 이해하면 쉽다.

주자는 이 장의 주석을 달면서, ‘義’와 ‘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喩는 曉(깨닫다)와 같다. 義는 천리의 마땅함이요, 利란 人情의 하고자 하는 바이다."

본문의 해석에서는, ‘밝힌다(밝다)’라고 현대적 해석을 했는데, 정확하게는, 주석에서처럼 ‘(신속하게) 깨닫다’라는 의미이다. 어느 한 가지에 깊이있게 파고들어 모든 기준을 그것으로 삼게 된다는 뜻에 다름아니다.


우리가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은 두 상반되는 개념이 어떻게 대조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義’와 ‘利’를 비교하면서 하늘과 사람으로 구분했다. 바로 전 장에서 공부했지만, 주자는 공자의 뜻을 풀어 해석할 때, 天道와 人道의 개념을 가지고와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으로 대조하여 설명한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그래야만 할 ‘義’는 하늘이 그렇게 해야한다고 안배한 것이라면, ‘利’란 이익을 밝히려는 인간의 본능적인 부분이라는 설명이다.

이익에 대한 부분은 너무도 적나라하여 이해가 쉬운데 반해, 군자가 의에 대해서 갖는 기준이 흔히 볼 수 없는 것이기에 그 이해를 돕기 위해 정자(伊川)는 이렇게 설명한다.

“군자가 義에 대하여는 소인이 利에 대하는 것과 같으니, 그것만 깊게 깨닫기 때문에 독실히 좋아하는 것이다.”

일반인으로서는 참 이해하기 힘든 부분일 수 있다. 이익을 밝히는 것처럼 어떻게 義를 자신의 행동 기준이자 목표로 삼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쉬우면 모두가 군자하지, 소인배로 소리 들으면 살고 싶겠는가? 귀한 것은 얻기 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귀한 것을 얻는 순간, 다른 것들이 하찮아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얻거나 그 경지에 오르지 않더라도 그것이 귀한 것인지를 깨닫는 것만으로도 출발은 한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지금도 이 글을 읽으며 공부하고 있는 것, 아니던가?

그래도 얼른 이해가 머리로 와닿지 않는 이들이 있을 것을 확신한 양씨(楊時)는 극단적인 예까지 들어가며 당신의 가슴에 확 다가올 만한 해설을 해준다.

“군자는 삶을 버리고 義를 취하는 자이니, 이익을 가지고 말하자면, 사람이 하고자 하는 바가 삶보다 깊은 것이 없고, 싫어하는 바가 죽음보다 심한 것이 없으니, 누가 기꺼이 삶을 버리고 義를 취하기를 좋아하겠는가? 그 깨달은 바가 義뿐이어서 利가 이익이 됨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소인은 이와 반대이다.”

아! 이런 글은 읽으면 이렇게 일단 감탄사부터 나와야 정상이다.

멋지지 않은가?

자꾸 안중근 의사가 떠오르는 것은 나뿐인가?

양씨의 이 극단적인 설명은, 일반인들의 머리와 가슴에 확 박히게 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설명방식이다.

살고 죽는 것.

일반 사람들에게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어디 있겠는가?

양씨도 말하지 않았는가? 누가 죽고 싶겠느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소중한 가치에 해당하는 ‘義’를 알게 되고 깨닫게 되면, 생사의 문제조차 뛰어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양씨의 마지막 문장 설명이 그야말로 기가 막히다.

그 깨달은 바가 義뿐이어서 利가 이익이 됨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 배우고 익혀 깨달음의 경지에 달한 분야가 義뿐이라, 이익 따위의 같잖은 것들이 눈에 들어올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진 경지이며, 적확한 표현이란 말인가?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아니,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본 적이 있는가?

배고프니까 밥을 먹고 식구들을 먹여살려야 하니까 직장에 나가고

죽지 못해서 사나?

아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목적이 있다.

그저 단순히 살기 위한 것이라면 사람들은 저마다 그리 아등바등거리며 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당신에게 그러한 가치를 깨닫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사람이, 당신의 인생에는 꼭 나타나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런 분들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원래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갖는 숭고한 의미이고 그래야만 한다.

일본어에는 '선생'이라고 불리는 직업이 정해져 있다.

의사, 변호사, 교사, 정치인

일제 식민지치하의 언어적 영향을 받아서인지, 한국어에 선생은 너무도 흔해빠진, 전화상담원이 상대를 부르는 말로 전락하고 말았다. 오히려 ‘사장님’보다도 조금 낮은 호칭일지도 모르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과연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자들이 당신에게 과연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던가?

의사 선생님은 돈 받고 당신의 아픈 곳을 치료해준다.

학교 선생님은 돈 받고 당신에게 지식을 판다.

판검사? 변호사들은 아예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싸다며 자신들의 직업에 '님'자를 붙여 부른다.

다행히 우리나라에서 정치꾼들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쓰지 않는다. 싸구려 호칭으로 전락하였더라도 그 치들에게 선생님 호칭이 돌아가지 않은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비싼 학비내고 의대를 나와 의사가 되어, 돈과 상관없이 오지와 전쟁터를 찾아다니며 자신의 의술이 필요한 사람들을 살리겠다고 뛰어다니고, 가난한 학생들이 주눅들지 않도록 학생주임과 싸워가며 학생의 도시락을 넌지시 챙겨주시는 선생님들도 계시단 말이다. 그런 분들이 계시기에 아직까지 지구가 멸망하지 않고 그나마 버티고 있다고 나는 최소한 생각한다.

‘뭐니뭐니해도 머니가 최고’라며 썩소를 날리는 그것들의 헛소리를 들을 때면, 그 치들의 턱이 돌아가도록 일단 한 방 갈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이익만이 최고라고 생각하게 되면 벌어지게 될 참사는 너무도 자명하다.


그들이 이익만을 밝혀야할 사업가나 장사꾼이어도 문제가 심각할진데, 정치를 하면서 혹은 선생짓을 하면서 그 따위 가치관으로 살아간다면, 그들의 행동 때문에 피해를 입게 되는 수많은 이들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들이 개인의 이익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피해가 막급한데, 같은 이익을 공유한다며 서로 공조하고 붕당을 만들어 키득거리며 돈 만질 궁리에 혈안이 되면 그 피해는 사회 전반에 급속도로 퍼져 결국 국가를 좀먹고, 전 인류를 멸망의 길로 아주 빠르게 인도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아까 위에서 양씨가 설명한대로, 이익을 밝히는 소인들이 아주 싫어하는 원치 않는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정말로 비참하게 말이다.

물론 이런 말을 하면, 이익만이 절대 가치가 되어버린 이들은 비웃는다.

책만 읽은 서생이 유토피아를 꿈꾸며 헛소리한다고.

현실은 다르다고.

지가 배가 고파서 길가에 내몰려봐야 정신 차린다고.

그럼 다시 묻는다.

당신이 지금 그렇게 이익을 추구하는 삶을 희망하고, 돈 많은 부자들을 부러워하는 이유가 당신이 당장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고, 살 집이 없어 길에 쫓겨나기 직전이라 그러한가?

그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왜 그렇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냔 말이다.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각이 수반되어야만 한다.

아무 생각없이 그저 행동하는 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동물일 뿐이다.

그런데 말이다.

아무 생각없이 행동하는 것도 아니고

이익만을 위해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동물 그 이하인 것이다.

동물도 그러지 않는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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