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이는, 나를 일깨워주는 스승이다.

사람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충고

by 발검무적
子曰: "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진 이의 행동을 보고는 그와 같기를 생각하며, 어질지 못한 이의 행동을 보고는 안으로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

뒤에 공부하게 될 ‘술이편(述而篇)’ 22장의 ‘三人行必有我師焉’(삼인행필유아사언;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반드시 그 가운데 나의 스승이 있다.’라는 구절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조금은 생경할 수 있는 동사 표현에 대해, 주자가 친절하게 주석을 달아주고 있어 먼저 동사의 명확한 의미부터 짚고 가도록 하자.

”思齊란 자신도 또한 이러한 선함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요, 內自省이란 자신도 이러한 악이 있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어진 이의 행동을 보고서는 나도 그와 똑같이 행동할 수 있는 선함이 있기를 바라고, 어질지 못한 이의 행동을 보고서는, 혹여 저렇게 행동하는 악이 나에게도 있을까 싶어 두려워한다는 의미이다.

간단해 보이는 주자의 해석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무엇을 중점에 두고 보는가의 문제이다.

원문의 해석을 내가 그리 하기도 했지만, 주어를 ‘어진 이’라고 하지 않고 ‘어진 이의 행동’이라고 한 것의 근거를 주자의 해석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전반적인 그 사람을 통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는 행동에 더 주안점을 둔다. 주자의 해석처럼 그가 그렇게 행동하는 의도의 원천에 선함이 있는가, 악함이 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조금 엄격한 잣대로 들어가면, 어진 사람도 얼마든지 악함을 가지고 잘못 행동할 수 있음을 감안한 미묘함의 차이를 드러내는 설명이라 하겠다.

때문에, 어질지 못한 이의 행동 요인은, 그 사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에 있는 것이고, 그 잘못된 행동을 하게 하는 악함이 나에게는 정말 없을까 하는 의미에서 ‘두려워한다’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두렵다'는 표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그런 행동을 언제든지 할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호씨(胡氏)가 다시 이 의미에 대해 혼란스러워하지 말라고 다음과 같은 해설로 이 장을 정리한다.

“사람의 선과 악이 똑같지 않음을 보고서, 자신에게 돌이키지 않음이 없다면, 단지 남을 부러워하기만 하고 스스로 버리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을 것이요, 단지 남을 책망하기만 할 뿐 스스로 책망하기를 잊지 않을 것이다.

사람에게 늘 선악은 공존한다는 지극히 심오한 철학적 내용을 정리해주고 있다.

배우는 이들이, 본능적으로 어진 이가 선함을 가지고 보이는 행동을 보고서는 당연히 배우고자 하면서, 그렇지 못한 행동을 보았을 때는 단지 비난할 뿐, 그것을 통해 자신을 돌이켜보고 자신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 엄격하게 스스로를 반성하는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음을 지적한다.

일반적인 인간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 맞다.

어질지 못한 행동을 보면 그저 비난하고 고개를 돌려 외면할 뿐, 그것마저 내 공부로 삼아 내가 저런 마음을 갖고 있지는 않았는가에 대해 반성하는 것이 그리 쉬울 리가 없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아이를 학대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이들에 분노하고 아이의 죽음을 추모하며 그 학대한 부모라는 자들에게 엄벌을 처하라며 눈물을 흘리며 피켓을 들고 법원 앞에서 시위를 하는 아이 엄마, 아빠들을 보라.


그들이 그저 자신의 자식이 없어서, 혹은 자신들이 이미 자식을 다 키웠기 때문에 그저 그렇게 강한 시위와 비난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직접 또래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이고 부모였기 때문에, 자신의 안에 있는 선악을 구분하는 양심이라는 것이 움직여 시위장에 나서게 된 것이다.


양육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처음 육아를 해보는 초보 엄마 아빠에게는 더더욱 육체적 정신적으로 한계에 다다르게 하는 시험대에 오르는 일이다. 시도 때도 없이 울고 보채고 정상적인 수면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치닫게 되면 너무 짜증이 나고, 어느 순간 그래서는 안될 분노에 찬 행동이나 말을 할 수도 있다. 선악이 혼재되어 있는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부모들이 아동학대 사망사건 같은 충격적인 뉴스를 접하게 되면, 다시금 자신은 정말 그러지 않는지를 생각하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갖게 된다. 그들이 <논어>를 읽고 수양을 해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양심이 본능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마음이 들고난 그다음이다.

바른 생각을 갖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고, 그 바른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 끊임없이 수양하는 것이라 이미 일러준 바 있다.

참고로, 이 장은 저 넓은 땅, 중국을 통치하고 있는 시진핑이 늘 강조하는 가르침이라고 해서 더 유명하다. 왜 그가 하필 <논어>의 이 장을 그렇게 강조할까?


요즘은 모든 분야에서 롤모델이 늘 필요하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서양에서 시작된 ‘롤모델’의 의미는, 위 장의 의미에 의하면 앞 절에만 해당한다. 뒷전에 대한 부분은 서양에서는 그다지 힘주어 강조되지 않고, 동양에서 오히려 더욱 강하게 방점을 찍고 있는 부분이라는 점에서, 동서양의 철학적 사고 차이를 보여준다.


‘타산지석’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는 이 장의 가르침은, 잘못된 행동을 통해 그것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행동이 나에게는 없었는지 나 스스로를 점검하는 계기로 삼는다는 것이다.

판사는 법과 정의에 근거하여 법관으로서의 양심에 따라 판결을 내린다고들 한다. 그런데 판사도 사람인지라 잘못된 판결을 내릴 수 있다. 특히, 판결문이라는 결정적인 스스로 작성한 문건이 증거로 남는 직업이기 때문에 잘못된 판결을 내리게 되면, 그 빼박 증거물로 인해 자승자박 하는 꼴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잘못 판결을 내린 판사에 대해, 잘못하였음을 확인하고 알게 되었으면 그 판결을 뒤집는 것에 해당하는, 잘못을 수정할 기회가 있다. 한국의 재판 시스템이 3심제로 만들어진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이것은, 이 장의 가르침대로 만약 다른 이가 잘못한 부분이 있다면 내가 그런 우를 범하지는 않는지 내 옷섶을 다시 가지런히 하게 되는 이치에 기반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사법부는 좀 많이 이상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대한민국 사법부에 대한 신뢰도가 OECD 국가 중에 최하위를 차지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왜일까?


예컨대, 최근 방송되었던 드라마 <로스쿨>에서도 지적된 바 있는, 검찰의 ‘기계적 항소’가 그러하고, 판사의 부정과 잘못에 대해 판사 집단이 그것을 덮어주는 ‘관례’가 그러하다.


일반인이 1심에서 패소하고 2심에 항소할 때, 재판부는 새로운 증거나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지 않으면 그 항소 자체를 기각한다.

그런데, 형사 재판의 경우, 1심에서 명백한 증거와 심리를 통해 검찰의 잘못된 기소라는 것이 드러나는 경우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1심에 무죄가 나오면 검찰은 기계적으로 항소를 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왜 그럴까?

드라마에서는 양심적인 검사가 국가적 낭비라며, 항소를 포기하는 경우가 그려졌지만, 그것은 드라마 속의 바람일 뿐이다. 현실의 대한민국 검찰은 '무조건적인 기계적인 항소'를 통해 2심까지 무죄를 받은 피고를 괴롭히는 판결을 요구한다. 그런데 그것을 기각하지 않고 받아주는 재판부의 모양새도 어이가 없다. 일반인의 항소에서는 그리 엄격하게 기각해버리고 무시하는 재판부에서 검찰의 기계적 항소를 또 받아준다.


더 심각한 케이스는, 판사가 잘못된 판결을 내린 것이 명백한 사안으로 인해, 선량한 피해자가 발생한 경우, 또 다른 판사가 재판을 통해 충분히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계적으로’ 판사 집단을 보호하는 판결을 펼친다는 점이다. 현행법상 판사는 면책특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이한 대법원 판례(이 부분은 다음에 연재될 소설에서 상세히 설명할 기회가 있으니 후술 하기로 한다)를 원용하여, 판사가 잘못된 판결을 내리더라도, 그 판사를 형사 처벌하기는커녕 징계조차 받지 않게끔 보호하는 암묵적 룰까지 만들어둔 상태이다.

한 사람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재판의 판결을 잘못 내려, 선량한 피해자가 발생하였다면 그 부분에 대해 잘못 판단한 이는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그런 취지로 잘못된 판결에 대한 행정소송을 내거나 판사를 고소, 고발하는 경우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나왔을까?

재판부에 의한 일괄적 기각.

모두 기각하는 것은 물론이고, ‘감히’ 판사를 고소, 고발하였다는 괘씸죄를 물어, (물론 비공식적으로) 그 재판을 진행한 변호사 혹은 피해자들에게 온갖 불이익을 주고 그들을 압박한다.

러한 이유로 한국 사법부의 신뢰도는 OECD 국가 중에 최하위 바닥을 쓸게 되었다.


당신의 지인 중에, 혹은 가족 중에 판, 검사가 있을 수 있다.

드라마에서도 적나라하게 묘사되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가족이나 지인에게는 절대 그따위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디까지가 가족이며 지인이고

어디까지가 막 해도 되는 것인지 기준이 명확한가?

로스쿨 시대인 지금은 좀 덜하지만, 법전이 한자 투성이라는 이유로

전공 특성상 법대 출신들은 고문 공부에 친숙하다.

그들이 <논어>를 읽고 이 장을 읽었다면

그리고 그것을 통해 무언가를 깨달았다면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쯤은 명백하게 ‘머리로는’ 알고 있다.

악함을 보고, 악한 행동을 보고, 악한 이를 보면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없다면 공부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내 안에 악함이 있을까 늘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다른 이들을 대하고 살아간다면

굳이 시비를 가리러 법원까지 갈 일이 생길까?

굴뚝 청소를 한 두 청소부 중에서 세수를 하게 되는 이는 얼굴에 아무것도 묻지 않은 자라는, 아이러니가 계속해서 발생하게 내버려 둘 것인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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