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께서 "참아! 우리 도는 한 가지 이가 만 가지 일을 꿰뚫고 있다." 하시니, 증자께서 "예!" 하고 대답하셨다. 공자께서 나가시자, 문인들이 "무슨 말씀입니까?"하고 물으니, 증자께서 대답하셨다. "부자의 도는 충과 서일뿐이다."
이 장은 주자를 비롯해서 후대 학자들의 주석이 조금 많이 실려 있는 편이다.
주석이 많이 실려 있다는 것은 그만큼 후학들이 공부하기에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어려웠을까?
일단, 이야기의 구조를 보자.
공자가 그 유명한 ‘나의 도는 하나로써 일관한다(吾道一以貫之)’라는 심오한 가르침의 화두를 던진다. 그런데 다른 제자들은 무슨 뜻인지 갸웃거리고 눈치만 보고 있을 즈음 증자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예”라고 짧게 대답하는 것이 이 장의 시작이다.
우리는 이미 지난 <논어> 공부를 통해 진정한 앎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임을 배운 바 있다.
네이버 블로그에 글을 좀 본다고, 이 장에 대한 해설을 한 사람들의 글을 몇 개 찾아보았다.
그중에서 헛웃음을 넘어 나를 화나게 만든 해설이 나왔다.
공자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증자가 마치 자신만 알아들은 것처럼 뻥을 쳤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자의 글을 보면서는 나도 모르게 화가 났다. 게다가 그 글을 쓴 사람이 자신의 블로그에 맹자와 사기까지 읽어가며 공부를 하네 어쩌네 써둔 것을 보니 더 기가 찼다.
<논어>는 시트콤의 대본이 아니다.
증자의 초상
증자는 증점의 아들로,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에서 맹자까지 이어지게 하는 공자 학문의 명맥을 이은 사람으로, 동양 5성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하고 다른 제자들 앞에서 아는 척했다는 해설을 어떻게 달 수가 있는가 말이다.
혹세무민이 어려운 말이 아니다. 그 무지몽매한 분은 그 단어를 몸소 실천하고 계셨다.
자아, 다시 설명으로 돌아와 보자.
'參(이름으로 사용될 때는 '참'이라 발음한다)'은 曾子의 이름이다. 이걸 '삼'이라고 읽는 자와 고문을 더불어 논하지 말라.
한편, 고문에서, '예'라고 하는 현대어에 대응하는 다양한 단어가 있는데, 여기서 증자가 대답할 때 사용한 '唯'가 갖는 의미는, '대답하기를 바로 하여 의심이 없는 것'이다.
주자는 이 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성인의 마음은 혼연히 한 이치여서 널리 응하고 곡진히 마땅하여, 用이 각각 같지 않다. 증자는 그 用의 부분에 있어서 이미 일을 따라 정밀히 살피고 힘써 행하였으되, 단, 그 體가 하나임을 알지 못하였을 뿐이었다. 夫子께서 그가 眞誠을 많이 쌓고 힘쓰기를 오래 해서 장차 터득함이 있을 줄 아셨다. 이 때문에 이름을 부르고 말씀해주셨는데, 曾子가 과연 능히 그 뜻을 묵묵히 알고 곧 신속히 응하여 의심이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아무런 의심 없이 바로 대답하는 것은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대답이고 이 장에서 이 동사를 쓴 이유는 증자만이 그 뜻을 제대로, 온전히 이해했음을 강조하기 위해 쓴 글이다. 동사 한 글자에 너무 어려운 것을 담아 읽어낼 수 없다면 선학들의 주석이라도 좀 보고 공부하고 블로그에 글을 쓰던 책을 내던 하란 말이다.
그렇게 공자의 가르침도 어려웠는데, 차마 스승님에게 여쭙지 못한 동문들이 스승님이 나가기가 무섭게 증자에게 달려들어 묻는다. 여기서 설명하는 방식에, 공자의 수제자답게 스승의 방식으로 대답하는 형태가 또 걸작이다.
夫子의 도는 忠恕일뿐이다.
스승의 가르침이 의미하는 바를 못 알아들어물어본 것인데, 이 녀석이 스승님의 흉내를 내는 것인가 왜 이리 더 어렵게 선문답을 하는 건지 더 답답해 하는 동문들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그런데 증자 역시 부러 스승의 흉내를 내고 싶어 낸 것이 아니다.
과연 왜 그런 식의 대답을 하게 된 것인지에 대한 주자의 길고 긴 해석을 참고해보자.
자기를 마음을 다하는 것을 忠이라 하고, 자기 마음을 미루는 것을 恕라 한다. 而已矣란 다하여서 나머지가 없다는 말이다. 夫子가 한 이치가 혼연하여 널리 응하고 곡진히 마땅함은, 비유하면 천지가 지극히 성실하고 쉼이 없어 만물이 각각 그 자리를 얻음과 같은 것이다. 이로부터 이외에는 진실로 남은 방법이 없고, 또한 미룸을 기다릴 것이 없는 것이다. 曾子는 이것을 봄이 있었으나, 말씀하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배우는 사람들이 자기 마음을 다하고 자기 마음을 미루는 조목(忠恕)을 빌어서 드러내 밝히셨으니, 사람들이 쉽게 깨닫게 하려고 하신 것이다.
성실함이 지극하고 쉼이 없는 것(至誠無息)은 道의 體이니, 만 가지 다른 것들은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다. 만물이 각각 그 자리를 얻는다는 것(萬物各得)은 道의 用이다. 하나의 뿌리가 만 가지 다른 것들이 되는 이유이다. 이것을 보면 一以貫之의 실제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중심이 忠이 되고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을 恕가 된다.”라 하니 뜻에 또한 통한다.
증자는 스승 공자의 말씀에, 머릿속을 번개가 때리는듯 팟하고 깨달음이 왔다. 그래서 주저할 것도 없이 ‘맞습니다. 진실로 그러합니다.’라는 의미로 “예.”라고 바로 답한 것이다.
그런데, 동문들이 달려들어 그게 무슨 뜻이었냐고 하니 어찌 제대로 설명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끝에, 자신이 깨달은 것을 스승에게 배운 대로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말해준 것뿐이다.
위의 주자의 주석대로 이해하자면, ‘忠’은 나의 마음을 상대에게 완전히 다하는 것이다. '충성'의 뜻이 아니니 착각해서 혼란에 빠지면 안 된다. 100% 노력을 쏟아부어 내 마음을 다 전한다는 의미이다. ‘恕’는, '용서하다'라는 의미의 한자이지만, 개념어로 사용되면, ‘내 마음에서 우러나와 그것이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 헤아리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내 온 마음을 다 전하고 나서 상대방의 마음까지 다 이해하고 알아주는 것이니 그래서 그것이 현대어로 전성되면서, ‘용서하다’라는 의미가 된 것이다. 즉, 진정한 용서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없던 것이라고 지워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왜 그런 마음을 품었는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를 공감하고 이해해주는 것이란 심오한 과정까지 그려낸 개념어라 하겠다.
내가 당해서 싫은 행동은 남도 싫어할 것이니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은 바로 이 개념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이해가 조금 어려울 것을 염려한 정자(程子)가 다시 이 개념을 조금 풀어서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 있어 소개한다.
“자신으로써 남에게 미침은 仁이요, 자기 마음을 미루어서 남에게 미치는 것이 恕이니, 道와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違道不遠)이 이것이다. 忠恕는 一以貫之이니, 忠은 天道(저절로 되는 것)이고 恕는 人道이며, 忠은 망령됨이 없는 것이고 恕는 忠을 이행하는 것이다. 忠은 體이고 恕는 用이며 大本과 達道이다. 이것이 違道不遠과 다른 것은 하늘로써 움직이기 때문이다.”
人道는 인위적으로 하는 것을 의미하고, 天道는 저절로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마지막 문장에 하늘로서 움직이는 것이 다르다고 한 것은 억지로 인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그렇게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임을 강조한 말이다.
그리고 정자는 다음의 설명으로 이 장의 의미 분석을 마친다.
“성인이 사람을 가르침에 각기 그 재질을 따르셨다. 우리 도가 一以貫之라 하신 것은 오직 曾子만이 그것을 통달할 수 있었으니, 夫子께서 이 때문에 그에게 말씀해 주신 것이다. 曾子는 문인에게 알려주어 말씀하기를, ‘夫子의 道는 일 뿐이다.’라 하였으니 또한 夫子께서 曾子에게 일러준 것과 같다. <中庸>에서 이른바 ‘忠恕違道不遠(충과 서는 도에서 거리가 멀지 않다)’라 한 것은 바로 아래로 인간의 일을 배우면서 위로 천리를 통달한다는 뜻이다.”
아! 얼마나 똑똑한 사람들이 많은지 겸손해지게 만드는 주석들이다. 수천 년 수백 년 전에도 이미 그 뜻을 이해하고 그것의 다음까지 읽어낸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는데, 공자의 가르침이 나오자마자, 그것을 바로 동문들의 눈높이 맞춰 설명해내는 증자도 그렇고, 어차피 자신의 가르침으로는 제자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을 알고서, 수제자에게 던져 다른 제자들에게 더 쉽게 설명할 것을 숙제로 줌과 동시에, 증자가 더 생각하고 더 나아갈 바를 능동적으로 제시해준 공자의 가르침은, 지금 다시 보아도 소름 끼치도록 완전무결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걸 가지고 다시,'여러 가지 잡학을 배우는 것은 결국 하나의 목적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둥, 헛소리로 혹세무민하는 자들이, 여기저기버젓이 잘난 척 하듯 글을 올려두었더라.
제발 모르면 그냥 가만히 입 다물고 있는 것이 더 낫다고귀에다대고 소리라도 질러주고 싶은 마음뿐이다.
결국 이 장에서 공자가 말한 하나의 도라고 한 것은, 실제 하나의 목표를 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천변만화도 결국 하나의 것으로 귀결되며, 그 하나로 귀결된 것이 다시 천변만화를 거듭하여 다양하게 변화할 수 있으니, 근본이 되는 하나의 도는 억지로 그렇게 만들어내겠다고 할 것도 아니고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의미이다.
한 가지를 하겠다고 해도 결국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공부가 다양하게 수반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런데 그것은 배우는 자의 성향이 산만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하나를 이루기 위해 혹은 그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종합적인 노력과 능력을 갖춰야만 그럴 수 있게 되는 경우가 불가피하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뜬금없이 로봇공학 한 가지만 잘하는 사람은 나올 수 없다.
수학이 바탕이 되어야 하고, 물리학의 기본을 알아야 하며, 전기공학적 지식도 갖춰야만 한다. 그런데 일부러 그렇게 해놓은 것이 아니다.
세상 만물, 학문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은 결국 하나를 위한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합쳐져 온전한 하나를 이루게 만들어진 것이다.
정치를 한다는 것이 법률을 공부한 율사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가히,'율사들의 나라'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정치가 법률 전문가들이 휘젓는 그들만의 홈그라운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는, '율사'라고 불러주기도 조악하기 그지없는 법비들이, 자신들이 법에 대해 잘 알고 공부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 혹은 자신과 이익을 함께 하는 자들의 이익을 위해 그쪽 방향으로 자신의 알량한 지식과 경험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법령에 의해 움직이고, 법령이 모든 행정행위의 기준이 된다 여기는 공무원사회를 움직이는 데는 그 법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자가 가장 효율적이라는 말 같지도 않은 논리를, 그들은 ‘현실적’이라는 말로 포장하여, 자신들이 정치를 해야 하는 정당성이랍시고 내민다.
그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그들에게 표를 던져줘 정치인으로 만들어주었더니 지금 이 나라가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그 꼬라지를 보라.
판검사 시절 범죄자들에게 소리 지르고 겁박하던 법비들이 선량한 사람들을 겁박하며 그 자리에 올라, 썩은 내 풀풀 내며 지 배 채우려고 여기 붙었다가 저기 붙었다가 하는 꼴을 더 이상 용납해주어서는 결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그들을 뽑아주지 않으면 그들은 결코 그들이 원하는 자리에 오를 수 없다.
다시 말해, 법비들이 대한민국을 율사의 나라라며 말아먹은 것에 대한 책임의 절반 이상은, 그들이 그렇게 설칠 수 있도록 만들어준 당신에게도 있단 말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지만, 그들을 끌어내리는 것 역시 당신들만이 할 수 있는 고유권한이다.
그러기 위해서 당신들은 눈을 크게 뜨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판단해 낼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당신이 지금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이고, 수행을 통해 시비를 가릴 수 있는 수준에 올라야만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