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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10. 2021

나보다 못한 친구와 사귀지 말라?!

나를 사귀어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자가 있을까?

毋友不如己者


자기만 못한 자를 벗 삼으려 하지 말라.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얼핏 들으면 틀린 말은 아니다.

옛날 80년대 드라마의 엄마가 동네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애들을 보면서 지저분하고 꼬질꼬질해 보이는 아이를 가리키며 "엄마가 저런 애랑 친구 하지 말라고 했지?"라고 하는 말에 크게 다름 아니다.


당연히 부모의 입장에서 아이가 이상한(어디가 어떻게 이상한지 어떻게 알아내지는 알 수 없지만) 친구와 사귀는 것을 보면 싫을 것이다.

대치동의 잣대로 보면,

"너랑 같이 다니는 애 전교에서 몇 등하는 애야? 너보다 한참 밑이면 같이 다니지 말고, 너보다 훨씬 성적이 위면 친하게 지내도록 해."

인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이 말을 곱씹어보면 모순이 발생한다.

나보다 못한 자를 친구로 삼지 않는다면, 내 친구는 나보다 위인 사람이 많나? 아래인 사람이 많나?

나보다 나은 친구는 위의 원칙에 의하면 나를 친구로 삼으면 안 되고, 나는 나보다 나은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당신이 당신보다 나은 사람과 친구 하기를 원한다면, 그 친구는 당신보다 나은데 왜 자신보다 못한 당신을 친구로 만나줘야 한단 말인가?


새삼 공자의 말에 시비를 걸려는 의도는 없다.

대의적인 차원에서 보면, 공자의 뜻을 해독한 주자의 말에 따르면,

'벗은 어짐을 돕는 존재이니, 자기만 못하다면 유익함은 없고 손해만 있을 뿐이다.'라고 한다.

주자의 해석을 봐도 별반 행간의 뜻이랄 것은 없다.

친구 간에 군자가 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존재가 되라는 뜻 정도랄까?


자기보다 더 못난 친구가 잘난 남편을 만나 지금의 자신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을 산다고 자격지심에 부들부들 떠는 중년의 여자를 드라마에서 심심치 않게 본다.

우리 주변의 흔한 이야기라는 의미일 것이다.

실상, 어느 집의 장독대를 열어보더라도 장은 썩는다.

어떤 이유일지는 몰라도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모든 집은 저마다의 속을 썩이는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사회를 나와서 만난 친구를 아주 오랜만에 강남역에서 만났다.

10여년의 간극 사이에 간간이 통화를 하기도 했고,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 서로 공유를 하였으니 너무 오랜만이라 서먹할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가 서로 꽤 나이를 먹어 이제 관리를 생각해야 하는 나이임을 서로 인정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간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또 요즘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소소하지만은않은 그간 있었던 심각한 인생의 굴곡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가 제대로 산 것인지,

맞게 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우문(愚問)에,

다시 한번 공허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게는 아무런 문제도, 고민도, 힘겨움도 없을 것 같은 친구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수년 전 이혼을 했고, 우울증 약을 먹은 지 꽤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보며

원래 아프던 내 가슴의 또 다른 한 켠이 또 다른 의미로 아려왔다.


아마도 공자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나보다 못한 자를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라, 내가 친구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신독(愼獨)'을 강조하려던 것이었을 라고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내가 그런 친구가 되는 준비를 먼저 하라는 것이다.


어느 누구 하나 힘들지 않은 인생은 없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이겨내는가가 아닐까?

그러기 위해 친구에게 기댈 어깨를 내밀 수 있는 이가 되라고 했던 말이 아닐까?


말을 '곧이곧대로' 오해하고 상처 받고 슬퍼하지 말라.

당신의 오늘이 알알이 박혀 온전한 보석이 되어가는 과정을 고통만으로 여기지 말자.


그런 친구가 되기 위해 노력하면 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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